누구나 화장실에서 한 번쯤 울어봤잖아요?
막내작가의 눈물
수화기를 드는 일 자체가 공포였다. 옆에 앉아있는 메인언니는 그저 본인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마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 느껴졌다. 괜히 물티슈를 뽑아 노트북과 전화기를 닦았다. 이제 정말 섭외 전화를 해야 하는데.
전화를 걸어서 처음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런 건 ‘방송아카데미’에서도 배운 적 없다. 이론과 실제는 정말 다르다. '안녕하세요. ABC 방송국입니다?' 아니야, 여긴 방송국이 아니라 제작사인데 나중에 문제가 되려나? 그러면, 'ABC 방송국의 방송을 만드는 제작사 어디입니다?' 이건 너무 구구절절하다.
혼자 끝 모를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불쑥 구원자가 나타났다. 나보다 두 살 많은 막내작가 언니다. 내 앞자리 그녀는 나보다 3개월 일찍 이 회사에 들어왔다고 했다. 3개월 차이는 엄청났다. 그녀가 섭외 전화를 하는 모습은 가히 예술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알아온 친구와 통화를 하 듯 자연스러웠다. 수화기를 뺨과 어깨 사이에 끼우고 양손으로는 취재 내용을 빠르게 타자로 쳤다. “그러니까~~ 웅.. 웅.. 그랬는데?” 하면서 어르신과도 친근한 반말을 섞어가며 대화를 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살가웠다. 그렇다! 그녀는 섭외의 신이었다. 섭외의 신이 나에게 은혜로운 파일을 메신저로 내리셨다!
미영언니: 섭외 전화 매뉴얼이야. 이 양식대로 질문하고 섭외하면 돼
나: 고마워 언니 ㅠㅠ
살가운 데다 착하기까지 한 그녀. 눈물 나게 고마웠다. 한글파일 하나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 안녕하세요. ABC 000 프로그램 담당하는 000 작가입니다.
실례지만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 프로그램은 ~~
1. 사는 곳
2. 가족관계
3. 직업
4. 일상
5. 출연 의사 등등
기본적인 호구조사부터 출연자를 섭외할 때 반드시 물어봐야 하는 자세한 질문 목록이 순서대로 적혀있었다. 이대로만 질문하면 원하는 모든 내용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살았다!
하지만 형식은 형식일 뿐. 예비 출연자와의 대화 과정에서 대화는 자꾸만 안드로메다로 향했다. 수다스러운 예비 출연자는 내가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반려견 이야기를 30분 넘게 해댔고, 나는 그의 말을 어떻게 끊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가 질문도 다 하지 못한 채 녹초가 돼버렸다.
기사와 뉴스를 샅샅이 뒤져 다른 출연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분야에서 30년 넘게 일한 장인을 찾고 있었다. 드디어 장인에 걸맞은 ‘목수’를 찾았다.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하며 취재내용을 받아 적었다. 너무나 완벽해 더 이상 물어볼 게 없다고 확신하며 전화를 끊었다.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메인언니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언니, 이분은요 목수 일을 하시는데요. (히스토리 설명)"
"그래? 출퇴근 시간은 언제래?"
"(아차 시간!) 그건 못 물어봤는데..."
"다시 전화해봐"
"네..."
"아 선생님~ 통화되세요? 방금 전화드린 작간 데요. 제가 깜박하고 못 여쭤본 게 있어서요. 보통 출퇴근 시간이 어떻게 되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언니 보통 9시부터 8시까지 일하시는데 주말에 일할 때도 있데요!"
"주말에 일 안 하실 때는 보통 뭐하신대?"
"일 안 할 때요?..."
"다시 물어봐"
'다시 물어보라고? 이미 좋은 하루 보내라고 했는데? 통화하는 거 귀찮아하던데. 자꾸 전화 걸어서 방송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어렵게 잡은 예비 출연자의 심기를 거스를까 불안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메인언니의 지령이다. 다시 다이얼을 눌렀다.
"서.. 선생님. 네네. 아 진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요. 바쁘시죠? 네네 짧게 만요 죄송해요"
전화를 끊고,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주말에 쉴 때는 특별히 하시는 거 없고 쉬신다고..."
답변을 내놓자마자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메인언니의 질문.
"취미 같은 건 없으시데? 아니면 우리가 취미 활동하시는 거 만들어서 촬영하자고 하면 하실 순 있으시데?"
"그거까지는..."
"어떻게 넌 내가 물어보라는 것만 물어보니? 그분 전화번호 줘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언니는 어떻게 내가 안 물어본 거만 물어보세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창피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앞에 앉아있는 막내언니가 내 눈치를 살핀다. 쪽팔리다. 목구멍이 따갑고 눈앞이 어른어른 흐려진다. 화장실로 가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오늘따라 복도는 또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뒤에서 누가 따라오는 거 같다. 메인언니다. 속도를 붙여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언니도 빨라졌다. 망했다.
"너 울어? 뭐 그런 거 갖고 울고 그래. 처음엔 다 그런 거야~ 으이구."
언니의 다독임이 나의 눈물을 더욱 길어 올렸다.
"언니 저 세수하고 나갈게요."
"그래~ 언니가 너 미워서 그런 거 아니다?"
충혈된 눈에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표정. 거울 속 쭈구리 같은 내 모습이 참 못났다. 스물넷 나이는 도대체 어디로 먹은 건지. 사무실로 돌아가기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화장실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다. 하지만 별 수 있나, 빨리 섭외를 마쳐야지. 속성으로 나 자신을 다독였다.
‘가만! 목수 선생님 전화번호를 내가 어디 적어놨지?’
막내작가는 고달프다. 가장 힘든 건 마음 놓고 울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