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은 내가 볼게, 예고편은 누가 만들래?

막내작가가 쓰는 첫 번째 글

by 글밥 김선영

거의 모든 방송에는 보도자료와 예고편이 붙는다. 막내작가가 일로써 글쓰기를 처음 접하는 게 바로 보도자료와 예고 만들기다. 보도자료는 각 신문사 등 언론 매체에 뿌려지는 방송 홍보 글이고, 예고는 방송 내용이나 하이라이트 영상을 압축해 30초 언저리로 구성한다.


인복을 타고 난 나는 첫 사수로 성격 좋은 메인언니를 만났다. 나의 손발이 오글거리는 보도자료를 보고도 당황하거나 혼내지 않고 "이렇게 표현하는 건 어떨까?" 하며 침착하게 알려주었다.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나는 이게 얼마나 드문 경우이고 복인지 알게 됐다. 길어야 1년, 짧으면 한두 달 만에도 수시로 바뀌는 게 막내작가다. 때문에 자신의 노하우나 조언을 애써서 가르쳐주는 선배는 정말 흔치 않았다.


운 좋게도 친절한 사수를 만나 1:1 첨삭 지도를 받은 나는, 한두 달 만에 보도자료를 거의 수정 없이 패스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눈에 그려지듯 글을 쓰면 좋은 평을 받았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내용을 보도자료로 써야 한다면?


육 남매의 가장인 민호 씨는 매일 새벽 인력사무소에 일자리를 찾으러 간다.


나의 첫 문장은 보통 이렇게 시작했다.


서울시 성북구에 사는 육남매 아빠 민호 씨.
그는 오늘도 새벽같이 집을 나섰지만
인력사무소에는 먼저 온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눈앞에 그려지듯 써보자.


새벽 4시,
요란한 알람 소리에 잠을 깨 허겁지겁 집을 나서는 남자.
'오늘은 인력사무소에 자리가 있을까?'
하루벌이가 걱정인 민호 씨는 육 남매의 가장입니다.


주인공의 일상을 통해 있을 법한 상황을 상상한다. 이를 글의 첫 장면으로 표현해본다. 사전 취재가 부족하면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출연자랑 얼마나 오랜 시간 깊이 있게 통화했는지에 따라 보도자료 글이 술술 나오기도 하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쥐어 짜야 할 때도 있다. 신기하게도 첫 장면만 넘어가면 보통 이후는 저절로 써지니 걱정이 없다. 마지막은 이렇게 정리하면 된다.


그럼에도 육 남매를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는
민호 씨만의 속사정은 무엇일까요?
오늘 밤 10시에 000에서 확인해봅니다.


보도자료가 A4용지 한 장 정도의 꽤 장문(?)이라면, 예고는 30초 안에 방송 내용을 담아야 해 더욱 어렵다. 예고 영상은 막내 PD인 조연출과 막내작가가 함께 만든다. 이제 막 방송계에 발을 디딘 햇병아리 둘이 세상 누구보다 진지해지는 시간이다. 모니터 앞에 앉은 조연출과 나. 나보다 두 달 먼저 들어온 조연출 오빠가 먼저 입을 뗐다.


조연출: 미다시는 뽑아봤어? 이 그림 다음에는 이 그림이 어때?

나: *미다시요? 네네. 근데 저 그림 다음에 저 그림이 나오면 사람들이 이해 못할 거 같은데...
[*소제목이나 문구를 뜻하는 방송 은어]


조연출: 원래 예고는 짧은 시간 안에 내용을 담아야 하거든. 원래 이렇게 중요한 것만 툭툭 붙이는 거야


조연출 오빠의 넘치는 자신감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구나’ 하고 그의 의견에 따랐다. 그가 붙여놓은 화면에 내가 구상한 자막 문구를 얹어본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머리를 싸매고 투닥투닥. 짧은 영상이지만 누군가와 의논을 하고 함께 만들어간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자부심과 비슷했다. 감히 내가 그런 마음을 가져도 될까? 우선은 그렇다고 나 자신을 세뇌해야 한다. 우리가 만든 예고편을 보고 시청자가 방송을 볼지 말지 결정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무조건 잘하자! 우리는 프로페셔널한 ‘방송쟁이’니까!


날밤을 새워서 드디어 완성한 첫 예고 영상. 조연출과 나는 예고를 뜬 6mm 테이프를 들고 가 조심스레 선배들에게 예고 시사를 부탁했다. 결과는? ALL 재편집이다.


‘뭐야, 조연출 지도 잘 모르네!’


방송 일을 하려면 적당히 아는 척과 모르는 척을 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씀이 틀린 게 없다.


예고는 방송 전반의 내용을 다 담지 않아도 된다. 아니 담을 수도 없다. 시청자의 호기심을 끌만한 영상, 배경음악, 자막이 한데 어우러져 방송을 보게 하면 된다. 최근에는 낚시성 예고도 많다. 나름 효과적인 듯하다. 본편 방송과는 내용이 좀 동떨어졌어도 그 장면에 임팩트가 있거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면 짤이 되어 퍼지거나 예상치 못한 홍보효과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친 낚시질은 시청자의 원성을 들을 수 있고, 나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하므로 해서는 안 된다.


예고는 방송의 첫인상이다. 따지고 보면 막내작가는 방송 전반에서 참 중요한 역할을 한다. 꼭꼭 숨어있는 주인공 발굴부터 시청자를 끌어오는 일까지. 그러니 막내작가여! 그대는 절대로 하찮은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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