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무게 10kg이 찐 사연?

전투식량의 비밀

by 글밥 김선영

‘막내작가가 되는 법’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구성작가협의회’라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그곳엔 각 방송사에서 구인을 올리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말로만 듣던 유명 프로그램에서 막내작가를 애타게 찾는다는 글로 가득했다.


급여가 얼마인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맡는지는 제대로 쓰여있지 않았다. 마치 ‘열정이 중요하지, 지금 조건 따지니?’하고 묻는 듯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받아만 준다면 그깟 조건쯤이야' 하며 미련한 관심종자는 이력서를 채우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하고 처음 써보는 이력서. 사실 딱히 이력이라 할 것도 없다. 패스트푸드점이나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과 학생회, 동아리 활동이 전부. ‘이런 거까지 쓰면 오히려 더 없어 보이려나? 토익 점수도 필요하나? 스펙 좀 열심히 쌓아둘 걸...’ 쓸수록 자괴감만 들었다.


고민 끝에 추린 엉성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몇 군데 넣었다. 결과는 말 그대로 깜깜무소식. 방송계는 인맥이 중요하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방송아카데미만 나오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미 막내작가로 취업을 한 아카데미 동기가 ‘프리뷰’ 알바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흔히 프리뷰라고 불리는 일은 PD가 촬영해온 테이프를 실시간 틀어놓고 화면과 소리를 분리해 시간대별로 기록한 문서를 뜻한다. 일종의 영상기록물이라고 해야 할까. 프리뷰어나 막내작가의 ‘손가락 노가다’를 통해 탄생한 이 프리뷰 문서는 메인작가와 피디가 구성을 하고 편집을 할 때 참고한다고 했다. 모든 영상을 일일이 다 돌려보면서 구성을 하긴 힘들 테니 자료가 필요한 것이다.


프리뷰를 잘하려면 빠른 타자 속도는 필수란다. 다행히 나는 워드 1급 소지자다. 빠른 타이핑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다. 경험이 중요한 세계라고 했으니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프리뷰 급구라고 걸린 게시물 끝에 달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을 서브작가라고 소개한 그녀는 나를 무척 반가워했고, 노트북은 있냐며 여의도로 당장 와달라고 했다.


도착한 곳은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 책상이 가득한 사무실을 상상했던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말 그대로 그냥 가정집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어깨 가득 피로를 짊어 멘 작가들이 눈에 띄었다. 비를 맞은 듯 떡진 머리의 그녀들은 전화기를 붙들고 뭔가를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덩치가 내 두 배는 될 법한, 한 피디로 추정되는 남자가 '라꾸라꾸' 침대에 쓰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한 여자가 나에게 테이프 더미를 넘겨줬다. 위기에 처한 부부를 솔루션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출연자 부부를 찍은 원본 영상이라고 했다. 나는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영상을 타자로 풀기 시작했다. '도시락'이라고 불리는 테이프 재생기계는 정말로 도시락처럼 생겼다. 플레이, 빨리 감기, 리와인드 버튼과 아주 작은 액정 화면이 달려있었다. 테이프 영상이 나오고 화면 상단에는 타임코드가 나왔다.

[당시엔 아날로그 방식의 6mm 테이프를 사용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00:02:34 말다툼하는 부부 / 남자 옆에 놓인 술병
남: 네가 그러고도 애 엄마야? 집구석이 이게 뭐야!
여: 나도 종일 일하다가 이제 막 애들 씻기고 쉬는 중이야

00:02:50 아이들 장난감을 발로 차는 남자
남: 시끄러워! (장난감에 맞은 여자)


대화가 어찌나 빠른지 30초가량의 내용을 치려고 몇 번 씩이나 테이프를 앞으로 돌려서 확인해야 했다. 짜증 나는 점은 리와인드로 내가 원하는 부분에서 딱 멈추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몇 번씩 들었던 내용을 다시 듣고, 되감기를 수차례. 초단위로 실시간 대화를 타이핑하는 일은 고역이었다.


남편이 내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 가여운 아내의 사연에 주책맞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누가 행여 볼까 휴지도 꺼내지 못하고 소매를 당겨 눈물을 훔쳤다. ‘저렇게 무시를 당할 바에 이혼하는 게 낫지, 솔루션은 개뿔!’ 나는 어느새 위기의 아내에 빙의하여 온 마음으로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절대 편집되면 안 돼. 이건 시청자도 꼭 알아야 해!’하며 타이핑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진하게’ 표시를 했다. 부디 메인작가님이 내가 표시한 장면을 방송에 내보내 주길 바라며. 심리치료사의 상담과정에도 꿈쩍없는 남편의 태도를 볼 때는 고구마를 먹은 듯 내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4시간이 지났다.


눈알이 빠지도록 타이핑을 했건만 60분짜리 테이프 1권을 겨우 완성했다. 60분 테이프 1개를 타자로 다 풀면 페이는 10,000원. 정말이지 못할 노릇이었다. [현재는 분당 400원 선으로 알고 있다] 뒷목과 어깨는 뻣뻣하게 뭉쳤고, 산처럼 쌓여있는 테이프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내가 프리뷰를 하는 동안, 옆에 앉아있는 막내작가는 섭외인 듯 상담인 듯 통화를 두 시간째 붙들고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저렇게 하는 걸까? 나는 잠시 쉴 겸 귀를 기울였다.


"정말 속상하셨겠어요. 그러니깐요! 저희 방송이 그래서 솔루션을 해드리는 거잖아요. 너무 걱정 마시고요 어머님. 아, 바쁘시구나. 제가 언제 다시 전화드리면 될까요? 네?! 출연을 안 하시겠다고요?"


막내작가의 기겁 소리에 나까지 가슴이 졸아 들었다. 기껏 힘들게 섭외를 하고 몇 시간 동안 취재를 했는데 얼마나 애가 탈까. 쩔쩔매는 막내작가의 모습이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은 아닐까 생각하니 손아귀에서 땀이 났다.


나라면 끈질기게 설득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나는 내향적인 데다가 무뚝뚝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첫째 딸이었다. 초면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도, 살갑게 구는 법도 모르는 숙맥이 어떻게 사람을 설득할까? 생각할수록 우울했다. 하지만 내 옆에 앉아있는 막내작가는 더 우울할 것이다. 좌절에 빠져있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려다가 엉뚱한 말이 나왔다.


"많이 힘드시겠어요. 음, 여기 참 가정집 같은 분위기네요~"


"저는 여기가 정말 집 같아요. 2주째 집에 못 들어갔거든요 ㅎㅎㅎ 막내 시작한 지 세 달 정도 됐는데 몸무게가 10kg 쪘어요."


"10kg요?"


나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삼각김밥과 레쓰비 등 편의점 음식 흔적들. 패스트푸드 포장지에는 반쯤 남긴 햄버거가 양상추를 메롱하고 내밀고 있었다. 콜라 대신 담배꽁초로 가득 찬 테이크아웃 컵을 보니 괜스레 기침이 나왔다. 문득, 이곳이 전쟁터처럼 느껴졌다. 어떻게든 위기의 부부를 화해시키고 아름다운 결말을 만들고자 치열하게 싸우는 전사들! 그리고 그들이 먹다 남긴, 아니 미처 다 먹지 못한 전투식량들.


벙 쪄있는 나에게 선배 작가로 보이는 한 여자가 다가왔다.


“프리뷰 많이 했어요?”


“아... 은근히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한 개밖에 못했어요.”


그녀는 실망한 표정이었다.


“아 처음이라. 점점 속도가 늘 거니 괜찮아요. 내일 시간 돼요? 테이프 산더미인데.”


나는 놀라서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아, 맞다! 내일은 제가 약속이 있어서요.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나는 행여 프리뷰를 더 시킬까 봐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작은 화면을 집중해서 보느라 눈이 너무 아팠고, 남의 부부싸움을 구경하는 일도 피곤했다. 마치 내가 한바탕 싸운 거처럼 온몸에서 진이 빠졌다. 식사시간도 따로 없이 패스트푸드를 전투식량 삼아 싸우는 그들과 함께 있는 자리가 불편했다. 그 치열한 전쟁터에서 행여 나에게 미사일 파편이라도 튈까 두려웠던 걸까.


나약하여라! 막내작가, 나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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