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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배의 힘

2023년 6월 1일 목 / 성모 신심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by 글방구리

가톨릭 교회는 성모님을 유달리 좋아하고 공경하다 보니, 개신교 신자들로부터 '마리아교'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는 신자들도 많다. 나 역시 손목에 묵주팔찌를 하고 있다. 그런데 (자주 하지도 않지만) 마음먹고 묵주기도를 할 때는 굳이 가방에 넣어둔 5단짜리 묵주를 꺼내서 하게 되니, 내 손목에 낀 팔찌묵주는 그야말로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나 천주교 신자입네, 하는 신분표시거나.


각별히 성모 신심을 고양하자는 성모성월의 마지막날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었던 어제 5월 31일. 여느 날처럼 아침에 일어나 복음을 읽었다. 오늘의 복음은 루카복음 1장 39-56절이다.

루카복음서에 따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태를 알게 되고 받아들이고 난 뒤,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다. 마리아보다 먼저 임신을 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알아본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고백을 듣고 주님을 찬미한다. 그게 유명한 마니피캇(magnificat).


어제는 그렇게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매일미사]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 사이에 배치하느라 이 방문 축일이 5월 31일이 되었다고 한다.


언제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성모님은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를 했으면서도 엘리사벳을 도우러 먼 길을 가셨다, 그렇게 성모님은 이타적인 분이다'라는 강론을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또, '엘리사벳의 뱃속에 들었던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봤다, 그래서 뱃속에서 뛰논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이 임산부면서도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와주고 돌아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애덕이냐'라는 말도 들었다. 복음 묵상이야 다 제 맘대로 하는 거니까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오늘 복음을 읽으며 마리아의 덕행을 찬미하기보다 '사람은 역시 좋은 선배를 만나야 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 다음은 내 뇌피셜에 따른 묵상.


어느 날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누구에게나.

마리아에게는 자신의 의지나 행동과는 전혀 관계없는 '임신'이 그것이었는데, 마리아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엘리사벳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아기를 가진 것만큼이나, 다 늙어서 아기를 가진 것 역시 한 여인의 인생에서는 놀라운 일일 테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마리아는 무척 두려웠을 것이다.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움과 암담함. 그러나 거스를 수도 없는 사건. 마리아는 자신과 같은 처지를 먼저 겪고 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서둘러' 엘리사벳을 찾아간다.


왕래하지 않고 있던 어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움에 가득 차서 달려왔다면? 나이가 들어 현명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 거고, 최선을 다해 위로하고 공감해 주었을 거다. 성경에는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시다,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논다'(루카 1,42 참조)고 되어 있다. 이를 내 식으로 번역해 본다면 "잘했어, 마리아! 대단한 용기야. 그런 용기 내는 사람은 흔치 않지. 너와 네 아기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어. 봐, 내 뱃속의 아기도 그렇다잖아!" 정도?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했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며 기뻐한다. "제가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에요. 저는 스스로 최선을 선택할 만큼 똑똑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제게 지혜를 주신 분이 계시는 것 같아요. 저는 따를 뿐이죠. 저는 그분께 감사해요."라는 뜻으로 부른 노래가 아까 그 마니피캇(magnificat).


어린 시절 내게 아버지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히려 피하고 싶은 때가 더 많아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영 마뜩잖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한참 더 지날 때까지도 나는 성모님을 가까운 분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교회에서 배운 대로라면, 성모님은 '동정'이시고, 원죄 없이 태어나셨으니,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고, 아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위대한 성인이시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전에는 결혼을 한 평신도는 결혼하지 않은 사제, 수도자보다 '급이 낮은' 사람들인 양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정결이나 동정성에 대해서도 다소 왜곡된 가르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성욕을 느끼거나 결혼을 하는 것도 죄가 되나?'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러니 언감생심, 남자 보기를 돌같이 했을, 동정 성모 마리아를 본받는다는 건 아예 접고 들어가야 했다.

성욕 자체가 죄가 되는 게 아니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독신만큼이나 거룩한 일이라는 걸 내 몸으로 경험하고 난 다음에야 성모 마리아를 비로소 '어머니'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만약 나의 아이들이 스스로 독신으로 살면서 사제, 수도자가 되겠다고 한다면(아쉽지만 그럴리는 없을 것 같다) 말리지 않겠지만, 어떤 삶을 살든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욕구를 죄악시하지는 않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생명력이 왕성한 나이에 이성을 보고 가슴이 뛰지 않고, 호르몬의 분비가 되지 않는 게 더 문제가 아닐까?


약하고 어렸던 마리아는 좋은 선배에게서 힘을 받아 자신의 운명을 씩씩하게 받아들였다. 그 후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주님의 어머니'로 살았다. 아들이 죽어서 끝이 난 십자가의 길까지, 한평생 가시밭길을 피하지 않고 의연히 완주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을 때 내게도 엘리사벳 같은 선배들이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주고 이해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아마도 있었을 게다. 그러니 지금까지 힘껏 살아왔겠지.


비록 묵주팔찌는 액세서리로만 끼고 다니지만 나는 이제 그분을 내 마음의 어머니로 모시고 산다. 그분처럼 이 지상의 삶을 완주할 때까지, 내 운명을 받아들이며 기꺼이 그 길을 가 보겠다.

지난 어버이날, 75세 노인들에게 꽃바구니를 드렸다. 서로에게 어버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선배로서 좋은 영향을 주면서 사는 게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호칭값을 하는 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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