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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4학년, 놀기 딱 좋은 때 아닌가?

내게도 소중했던 '은하수 방과 후'를 추억하며

by 글방구리

지난 인생을 돌이키면서 해보지 못한 일,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를 손꼽아 보자면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이 모자라다. 외교관의 자녀로 태어나 이중언어, 삼중언어를 마음껏 써본다거나, 재벌 삼세로 태어나 세계일주를 밥 먹듯 해보는, 그런 허황된 꿈은 빼자. '여자'라고 해서 부모에게 금지당했던 것들도 없지 않지만, 성별을 골라 태어날 수도 없었을 테니 그것도 제외한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고, 어쩌면 매우 잘할 수도 있는 일인데 하지 못한 일. 그것은 '공동육아 방과 후 교사'다.


기껏 아쉬운 일로 꼽은 게 방과 후 교사라니. 정년이 보장되고 죽을 때까지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국공립 교사도 아니고, 어린이집 보육교사와는 달리 '아줌마'가 아닌 '선생님'으로 대우해 주는 유치원 교사도 아니고, 법적으로 보호받지도 못하고 국가의 녹봉은 한 푼도 받기 어려운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명사 같은 방과 후 교사라니. 내 안에는 원래 이렇게 '싼 티 나고' 궁상맞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이냐.


사실 아예 해보지 못한 건 아니었다. 딸내미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일 년 동안 '은하수'라는 고학년 방과 후를 만들어 일곱 명의 아이들이 함께 지냈더랬다. 어린이집 교사를 그만둘 수는 없어서, 오전에는 어린이집에서 보조교사로 근무하고, 아이들이 하교한 뒤에는 방과 후로 넘어왔다. 일 년 동안 4학년 여섯 명, 5학년 한 명. 비록 일곱 명이라는 작은 그룹에 교사는 나 혼자였지만, 즐거웠던 추억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이들이니 노는 것은 기본. 안에서도 놀고, 밖에서도 놀았다. 자기들끼리도 놀고, 나하고도 놀고, 동생들하고도 놀았다. 비석치기도 하고, 공기놀이 같은 전래놀이도 했지만 여자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아이돌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안무도 짜고 공연도 하고.(그룹 이름이 뭐였더라, 프리티캔디?)


우리는 돈을 벌기로 했다. 일 년이 지난 뒤에 제주도 여행을 가자는 목표를 세웠다. 마을신문을 만들어 구독자를 모았다. 마을 이야기 취재를 하기도 하고, 광고를 따와서 신문 판매도 했다. 취재부터 영업, 발송까지 직접 발로 뛰었다. 어린이 기자들은 우리 동네를 잘 알기 위해 당시 막 조성되었던 '둘레길'을 땀 흘려 걷기도 했다.


단오잔치 때는 떡꼬치를 만들어 팔고, 어린이집 토끼장 청소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몸이 작은 아이들은 냄새가 진동하는 토끼장 안에 직접 들어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장철에는 마늘을 까는 일도 도왔다. 비용은 주는 대로 받았다.


둘레길을 걷고는 생태지도도 그렸다. 그러고 보니 나무 목공도 하고, 일본 중국 등 다문화도 경험했구나.
신나게 놀았던 건 맞다. 그러나 이런 걸 그저 놀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더 큰 배움은 없었을까?

일 년이 지나는 동안 내 역할은 제안하고,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안전한 방법을 찾아주는 정도였다. 물론 아이들이 자기들 힘으로 제주도를 가겠다고 했으니, 조금 더 싸게 갈 수 있는 방법(비행기 표를 미리 알아보고 끊는다거나, 이른 계약으로 비용을 아낀다거나 하는 것)을 찾아주었다.


그래서 졸업을 앞두고 아이들의 힘만으로 제주도 여행을 갔다. 삼박사일 여행 경비는 모두 우리 힘으로 해결했다. 제주 4.3 공원에 갔고, 강정마을에 갔고, 배를 타고 마라도에 가서 짜장면을 먹고 왔다. 마지막 날 밤, 아이들은 펑펑 울면서 방과 후를 졸업하게 됨을 아쉬워했다.


나는 이듬해에도 아이들에게 같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경력이 인정되는 어린이집 교사를 포기하고 방과 후 교사로 갈 의향도 있었다. 내 딴에는 마음을 크게 낸 거였다. 그러나 방과 후 부모들은 생각이 달랐다. 4학년 때도 방과 후를 보내겠다는 부모가 없었다. 4학년이 되면 학습이 걱정되어 학원을 보낸다고 했고, 새로운 친구들과 놀아야 한다고도 했다. 내가 방과 후 교사로 가려면 조합에서 교사 인사권을 당시 어린이집과 마을을 잇고 있던 단체에 양도해야 했는데, 그들은 그 권한을 양도할 의향이 없었다. 여러 경로로 설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걸로 끝. 나는 어린이집 교사로 복귀했고, 이후 몇 년 동안 방과 후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랬던 내가 어린이집을 퇴직하고 나서 다시 사교육 선생이 되어 3,4, 5학년 아이들과 '글쓰기 선생'으로 만나고 있다. 수업에 오는 아이들 중에는 2학년까지만 방과 후를 다닌 아이, 아예 다니지 않은 아이, 그리고 3학년까지 다니고 4, 5학년에서 하루를 다시 만난 아이 등 다양하게 초등학교 삼사 년을 보낸 아이들이 있다. 뭐라 단정 지어 말할 수도 없고, 일반화시킬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만, 아이들 면면을 보면(특히 갈등 해결능력이나 관계 맺음, 일상 생활 습관 등) 아이들에게 '공동육아 방과 후'라는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뿐이다.


"아이가 학원에 가고 싶대요."

내년 방구성과 신입조합원 모집을 앞둔 시점에 방과 후 퇴소 의향이 은근슬쩍 들려온다. 사춘기 이전까지, 청소년이 되기까지는 '아이가 원해서'라는 말에 휘둘릴 필요가 없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부모로서 너무 일찍 아이를 놓아버리는 건데, '아이가 원한다'는 말을 앞세우는 것도 답답하다. 아이는 콕 집어 학원을 가고 싶다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 글쓰기에 오는 아이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지만 대부분 어쩔 수 없이 매여서 가는 곳이 '학원'인 것만 봐도 그렇다.

"너, 친구들은 학원 다니는데, 넌 안 갈래?" 하고 부모가 물어올 때, 어느 간 큰 아이가 "아니, 나는 더 놀고 싶어. 일 년 더 놀래." 하고 답할 수 있으랴. 취학 전 유아는 더하다. 부모가 뭘 원하는지, 뭘 불안해하는지 아이들은 너무도 잘 파악한다. 부모가 자기 생명을 책임지고 있으며,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음을 아는 본능적인 태도다.


인생을 살아보니, 초등학교 시절, 그거 참 잠깐이더라. 게다가 이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 길게 120년은 산다지 않는가. 그깟 십이삼 년, 충분히 놀게 해 준다고 한들 무슨 큰 문제라고. 놀면서 관계를 배우고, 놀면서 추억을 쌓고, 놀면서 많은 것을 맛보게 해주는 그깟 일이 년. 교사도 있고, 공간도 있다는데, 그걸 고민하다니. 교사가 없다면 모를까, 기꺼이 고생을 감내하겠다는 교사가 있는데도 방과 후 대신 학원을 선택한다는 건데. 내 눈에는 부모의 근시안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최남단 마라도 땅을 밟았던 아이들. 나는 이 아이들이 보고 느낀 것이 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졌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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