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어때?"
여섯 살 아이들 예닐곱명과 함께 모여 앉은 자리에서 제안받은 이름이었다. "바다?" 우리 나이로 세 살이라지만 19개월밖에 안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그 어린이집의 부모가 되어 처음으로 '아마'(엄마 아빠를 합한 말로, 어린이집에서 부모를 아마라고 부르고, 부모가 참여하는 활동을 아마활동이라고 한다.)를 하는 날이었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 사람의 특징을 직관적으로 잡아내곤 한다. 어른들이 선호하거나 말거나, 그 말이 담긴 뜻이 무엇이거나 간에 그냥 사람을 보고 떠오르는 대로 이름을 제안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바다'라는 단어는 좀 의외였다. 어쨌든 아이들이 붙여준 이름이라 그 날 하루는 바다로 불리며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집에 와서 이름에 대해 다시 곰곰히 생각했다.
'아무래도 바다는 아니잖아?'
내게 바다는 너무 컸다. 그 전까지 바다는 하느님을 묵상할 때, 자주 떠올렸던 단어요 이미지였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안아주고, 용서해주고, 받아들여주는. 그러면서도 끝없는. 바다를 표현하는 모든 형용사는 하느님과 통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다는 너무 식상했다.
'그래, 바다에 띄우는 종이배라고 하자. 잠수함이나 항공모함 같지 않아 쉽게 젖어버리고 자주 뒤집히기는 하겠지만, 물 없이는 살 수 없는 작은 종이배. 그 정도가 딱 맞겠어.'
그래서 나는 종이배가 되었고, 종이배라는 이름으로 산 지 어느새 20년이 되었다. 지금도 아이들은 내게 "종이배!" 하고 부른다. 가끔은 "종종종!"이라고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꼬꼬맹이들은 한참 생각하다가 "종이컵?"이라고 할 때도 있지만.
선생님이라는 단어도 일반명사고, 종이배라는 말도 일반명사다. 그러나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와 종이배라고 부를 때, 그 관계의 깊이는 다르다. '선생님 앞에서는 뭐든지 잘 해야 한다는 각오가 앞선다면, 종이배 앞에서는 뭐든지 잘할 필요는 없다. 선생님은 내게 뭔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면, 종이배는 딱히 뭘 가르쳐 주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다. 선생님한테는 속마음을 다 말할 수 없으나, 종이배한테는 다 말해도 된다. 왜냐하면 종이배는 그냥 덩치만 좀 크다 뿐이지, 여기에서 함께 지내는 우현이, 서우, 예설이와 같은 친구니까.' 아이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해도, 나는 아이들이 나를 종이배라고 부를 때 이런 마음을 느끼리라 믿는다. 아이들이 "종이배!"라고 부를 때, 나는 아이들과 평등한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부모들은 내게 "종이배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도 "서우 어머님, 윤슬이 아버님!" 하고 부르지,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부모와 교사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내게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소피아'라는 세례명인데, 하느님 앞에 평등을 주장하는 성당에서는 아무도 나를 "소피아!"라고만 부르지 않았다. 아니, 나는 소피아라고 불렸는데, 나는 성당에 있는 분들을 "안나 수녀님!" 혹은 "요셉 신부님!"이라고 불렀지, "안나!" "요셉!" 하고 부르지 못했다. 어쩌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한 관계를 시작하려면, 이름에 뒤따라 오는 직책과 역할은 떼어버려야 할지 모른다. 직책과 역할은 직책과 역할을 할 때 필요할 뿐이지, 서로 관계를 맺을 때 계급장으로 작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