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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날갯짓으로 글을 써야지

아이들에게 저작권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by 글방구리

'글방구리.'

오랫동안 일하던 보육현장을 떠나 늘그막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며 이런 문패를 내걸었다. 보육교사 이전에 했던 왕년의 직업을 밑천으로, 소일거리 삼아 동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해보기로 한 거다. 그랬더니 보육교사 시절 처음 인연을 맺었던 아이들이 훌쩍 커서 글동무를 하겠다고 찾아왔다. 그렇게 지낸 지 어느덧 4년이 흘렀다.


다른 사람이 보기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내가 꽤 천천히 늙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순전히 풀방구리 쥐 드나들듯 글방구리를 드나들며 생기와 활력을 뿜어 주는 아이들 덕분이다. 소리 내서 웃을 일이 많지 않은 요즘 세상에서도, 아이들이 적어낸 글을 읽다 보면 웃음이 빵 터지곤 한다.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해내는 건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쓱쓱 적어 내려가는 아이들의 글은 혼자 읽기 아까울 때가 많다.


글방구리에 오는 아이들의 글솜씨가 남달리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국문과나 문예창작과 출신 교사도 아니고, 문단에 데뷔한 작가도 아닌 내가 특출나게 잘 가르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의 글 하나하나가 솔직담백하고 반짝이는 것은 꾸미지도 숨기지도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리라. 내가 하는 일은 별것 없다. 어른 흉내를 잔뜩 내서 멋부린 문장을 칭찬하지 않았더니, 여럿 중에 누가 누구보다 더 잘 쓴다고 비교하지 않았더니, 글의 비밀은 지켜주기로 한 약속을 잊지 않았더니, 아이들의 연필은 원고지 위에서 춤을 췄다. 꿀 찾는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아이들이 글을 재미있고 신선하게 쓴다고 해서, 그들이 일상에서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 천사들은 아니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고도 하고, 능청스럽게 잡아떼기도 한다.


글방구리를 열었던 첫 해 학기 초, 나는 아이들에게 작은 공책을 하나씩 주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으면 메모처럼, 편지처럼, 낙서처럼 아무 거나 적어 오라고 했다. 글쓰기 습관을 들여주고 싶어서였다. 그 다음주, 3학년 D는 자신이 쓴 시라며 내게 공책을 내밀었다. 그 공책에는 '콩, 너는 죽었다'라는 제목의 시가 적혀 있었다.

"D야, 이 시는 뭐야? 왜 베껴 썼어?"

"아, 그거 베낀 거 아니고 제가 생각해서 쓴 시인데요."

"이걸 네가 생각해서 썼다고? 베낀 게 아니라고?"

"베낀 거 아닌데요. 집에 콩이 있어서 제가 쓴 건데요? 저 시 쓰는 거 되게 좋아하는데요?"

"아....."

내가 김용택 시인의 시 전체를 외우고 있었던 게 아니어서 D가 전문을 그대로 베껴 왔는지, 아니면 제목만 가져오고 내용은 자신이 바꿔 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당당하게 자신이 생각해서 썼다는 말을 들으며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막막했다.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오갔다.

'야. 내가 이 시를 모르고 있는 줄 알았니? 어떻게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니?'

'아니지, 내가 그 공책에는 뭐든지 써도 된다고 했잖아. 그걸 자기가 썼다고 어디에 내보낸 것도 아닌데 굳이 따져 물을 필요가 있나?'

'제목만 베끼고 내용은 자기가 썼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생각해서 썼다고 하는 건 아니지.'

내 속은 이렇게 복잡했지만, D는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해맑게 웃고 떠들다가 돌아갔다. 그 이후로도 D는 종종 공책에 시를 적어 왔는데 대부분 자작시여서 더는 그 일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4학년 수업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그날 시 감상평을 쓰는 수업을 준비했다. 아이들은 시 감상이라는 말을 난생처음 들었다는 듯, 시끌벅적했다.

"그건 어떻게 써요? 독서감상문처럼 쓰면 돼요? 아니면 일기처럼 써요?"

"그래. 시를 읽고 감상문처럼 써 볼 건데. 그런데 여기에는 시집이 없으니까, 먼저 도서관에 가서 시집을 찾아 읽어본 뒤에 자기 마음에 드는 시를 공책에 적어 와.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그 시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왜 그 시가 마음에 들었는지 감상평을 써보자."


그 말에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다.

"베껴오라고요? 남의 거를요?"

"어어~? 그럼 안 되는 거 아녜요? 남이 쓴 글 베끼면 나쁜 거잖아요."

도서관에 가지 마요, 지루해요, 시 감상평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등등의 불만이 나올 건 예상했지만, 아이들에게서 "베껴 쓰는 건 나쁜 거잖아요"라는 항의를 받을 줄은 몰랐다. 당황스러웠다.

"아, 아니, 얘들아. 그게 아니고. 시집을 여러 권 빌려올 수도 없으니까, 마음에 드는 것만 적어 와서 다시 읽어보자는 거야. 좋은 시를 필사해 보는 것도 공부가 되니까 그렇게 하라는 거지, 그걸 베껴서 너희들 이름으로 어디에 내라는 게 아니야."

아이들은 각자 원고지를 들고 도서관에 가서 시를 한 편씩 적어 왔다. 그중에서 윤동주 시인의 '병아리'를 적어왔던 한 아이의 감상평에는 이런 후기가 적혀 있었다.

[병아리]
이 시를 고른 까닭은 마음에 확 와닿았기 때문이고, 이 시를 보고 느낀 점은 병아리 소리와 엄마 닭 소리를 내가 생각한 소리와 다르게 써서 사람들이 듣는 소리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를 베낄 때 마음이 찝찝했다. 이유는 다른 사람 시를 베끼는 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베끼고 어디에 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기분이 별로였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서로 보여주지 말고 쓰라고 하지만, 마무리를 할 때는 아이들이 쓴 글을 다 같이 읽는다. 같은 글감이어도 각자 생각과 느낌, 표현 방법이 다르고, 이렇게 달라야 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창작 활동이 되는 거라고 말해주곤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생각이 잘 안 난다면서 친구 공책을 넘겨다보기도 하고, 친구가 먼저 쓴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똑같이 쓸 때도 종종 있다.


D처럼 베껴 썼으면서도 베껴 쓴 줄도 모르는 아이부터, 공부 삼아 적어오라는 교사의 말에도 죄책감과 찝찝함을 느끼는 아이까지 창작 활동과 윤리에 대한 아이들의 의식은 백지상태에 가깝다. 다른 사람이 쓴 문장이니 그걸 허락 없이 가져오면 안 된다고 가르치려니, 평소 강조하던 나눔과 협력의 가치와 상충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일까 걱정스럽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는 내 권리를 존중받고 싶으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아주 원론적인 가치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겠다. 그 가치가 내면화될 때 아이들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다른 나비가 날아다니며 따온 꿀을 슬쩍 가져오면 안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힘들여 쓴 글을 내 글인 양 홀랑 가져오면 안 된다는 것을. 나아가 아무리 적은 양이라고 해도, 내가 내 날갯짓으로 애써 구한 꿀이 가장 맛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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