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좀 쓰리긴 합니다만
지갑을 잃어버렸다.
아침에 빵을 사고는 가방 뒷주머니에 넣었는데 없다. 매장에도 없고 오간 길을 몇 번이나 되돌아가 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모르는 새 뒷주머니에서 빠져나갔고, 길에 떨어졌으니 누군가 집어갔나 보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이 하얘진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지갑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생각한다. 언니가 외국여행길에 사다 준 작은 손지갑에는 내 이름으로 된 두 장의 신용카드, 남편이 비상용으로 준 체크카드, 운전면허증. 하필 엊그제 출금해서 넣어 둔, 평소보다 많았던 현금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위급상황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넣어 둔 두 장의 카드, 장기기증 등록서와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있었다. 그것 말고도 동네 도서관 카드와 자원봉사자 교육이수증, 글쓰기 교실 아이들 간식 살 때마다 받은 동네 와플집 쿠폰이 있었구나.
이미 일어난 일,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한다.
'이건 그리 큰일이 아니야. 휴대폰을 잃어버렸더라면 더 복잡했을 거야.'
'외국에서 잃어버렸으면 어쩔 뻔했어. 잃어버리고 금방 분실 신고했으니 다른 피해는 없을 거야.'
'그래, 더 안 좋은 일 막으려고 액땜했다고 치자.'
'나도 지난번 지갑을 주웠을 때 주인을 찾아줬잖아. 그러니 어쩌면 누가 주워서 우체통에 넣었을지도 몰라.'
'현금은 돈이 꼭 필요한 사람이 잘 썼다고 생각하자.'
그다음엔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는 후회를 거듭한다.
'저녁에 샀어도 되는 빵을 괜히 아침에 샀나 봐.'
'지난번엔 화장실에 휴대폰을 두고 나오더니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는 거야, 가방에 잘 넣었는지 확인을 했어야 했어.'
'현금은 뭐 하러 들고 다녔나?'
'평소에도 덤벙대고 부주의하더라니.'
가장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다.
'누가 내 면허증 도용하면 어떡하지?'
'개인정보를 보이스피싱 조직 같은 데 팔아넘기기라도 하면?'
'카드는 정지시켰다고 해도 나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은데.'
'내 사진도 어디 쓰레기봉투나 풀숲에 던져 버려지겠군.'
.....
.....
그러다 문득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
'그깟 지갑 하나 잃었다고 이리 마음이 번잡해지면서, 모든 것 다 두고 어떻게 이 세상 떠날래?'
그렇지.
어느 날 문득 다 두고 가야 하는 날에는, 지갑이나 돈 얼마, 나 자신의 본질은 아닌 신분증 따위는 하등 중요한 게 아니지. 세상을 떠날 땐 이보다 수천만 배 더 정들고, 소중하고, 아끼고, 사랑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다 놓고 가야 하는 건데.
이런 것들로 하나씩 배워두라는 거구나.
하나씩 사라지고 하나씩 놓아두어야 하고 하나씩 잃어버리는 일들을.
이렇게 자꾸 연습해 두어야 하는 거지.
그러네, 슬그머니 들어와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재물을 한번 내려놓아 보라고,
깊어가는 위령성월에 하느님이 실습 한 번 빡세게 시켜주신 거였네.
.......
그러므로 아직도 좀 속이 쓰리긴 합니다만
오늘도 천주께 감사, Deo Grati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