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을 쓰고 산티아고로

튀르키예 모스크

by 글방구리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의 목을 가차 없이 쳐내던 그 시대부터 시작된 친정의 가톨릭 신앙은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이은 내 조부 때 꽃을 피웠다. 순교로 뱃속에서 아비를 잃어 유복자가 된 조부는 또 다른 순교자의 집안인 조모를 만나 슬하에 팔 남매를 두었다. 딸 다섯 중에 셋을 수녀로 만들었고 자녀 누구도 그 신앙을 거스르지 않았다. 단지 조부의 막내아들이 소신학교를 갔다가 나와서 훗날 결혼을 하였는데 그가 나의 아비다.

나는 그의 막내딸로 태어나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세례명을 부여받으며 공고한 구교 신앙 집안의 일원이 되었다. 나 역시 숙명처럼 주어진 천주교 신앙을 굳이 의심하거나 벗어버리려 한 적이 없다. 천주교 신자라는 것은 내가 여자라거나 혈관에 흐르는 피의 속성이 B형이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바꿀 수도 없고 바꿀 필요도 없다고 여긴.


조부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사돈을 맺지 않았다. 그런 조건은 말로 하지 않아도 지켜야 하는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사방팔방 둘러봐도 온통 천주교 신자뿐인 곳. 내게 친정은 다른 종교는 침범할 수 없는 천주교 신앙의 무균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철이 들고 행동반경이 넓어지면서 그 신앙은 종종 다른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부작용을 보였다. 여행하며 들른 산사의 대웅전에서도, 친구 따라 호기심으로 참석한 교회 부흥회에서도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으니, 무속을 포함한 소수 종교나 희귀 신앙에 대한 거부감은 말해 무엇하랴.


내 신앙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가지는 것이 다른 종교에 대한 무지와 결핍을 초래할 수 있고, 다른 믿음을 가졌거나 굳이 신앙에 기대지 않는 선한 사람들을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며 살았다. 뭘 모르던 어린 시절을 지나 철이 들 법한 삼십 대 초반까지도.


삼십 대였던 1990년대 후반, 처음 성지순례를 갔다. 가톨릭 관련 여행사에서 주관하는 패키지 순례였다. 보름쯤 됐던가 이스라엘과 이탈리아, 이집트를 돌아오는 코스였다. 동행하는 신부님, 여행사 소속 TC,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 외에는 모두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는데, 그 당시엔 그게 보편적이었다. 오히려 젊은 사람이 왜 성지순례를 가려하는지, 나를 살짝 특이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당시 내 머릿속에 성지는 두 갈래 길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 걷는 이스라엘과 가톨릭 교회 심장부인 로마 바티칸. 그래서 이집트 일정은 순례 중에 옵션으로 끼워 넣은 관광 코스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틀 동안 지내면서 예수님 피난 성당이던가 한 군데 다녀와서는 피라미드니, 박물관이니 하는 관광 일정을 바쁘게 돌아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

카이로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아침,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새벽이었지만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하며 들었던 활기찬 기상 음악은 아니었다. 여럿이 모여 웅얼웅얼 시위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먼 산에서 메아리 울리듯 한 박자씩 늦게 합쳐지는 돌림노래 같기도 하고, 무슨 염불이나 주문을 느리게 외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뭘까 궁금했지만, 불안한 치안 때문에 호텔 밖 출입을 엄금했던 현지 가이드의 말이 떠올라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침대에 누워 기다렸다. 조용해지고 난 뒤, 커튼을 열었지만 창밖은 아직 어둡고 고요했다.


그게 이슬람교 신자들이 하루 다섯 번 바친다는 기도(아잔)와의 첫 만남이자 실제로 들었던 유일한 경험이었다. 이슬람교가 아무리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고 해도, 내게 이슬람은 힌두교나 '그 외의 기타 잡종교'와 다를 바 없던 종교였다. 이슬람 신앙을 가진 사람을 단 한 사람도 알고 있지 않았거니와, 굳이 그 종교를 알거나 이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이슬람이라면 오사마 빈 라덴과 9.11 테러가 먼저 생각났을 뿐, 이집트의 태양보다 먼저 떠올랐던 이슬람교의 아잔은 기억나지 않았다.


성지 순례를 다녀오고 몇 년이 지났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다. 어느 해 가족이 함께 모처럼 경주로 여행을 갔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다녀온 이후 처음이었다. 첨성대, 천마총, 석굴암 등 어지간한 문화 유적지는 수학여행 때도 다 돌아봤으련마는, 친구들과 어울려 논 것 외에는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은 경주였다.

그런데 석굴암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가 유럽의 성지 순례 때 서 있었던 어느 성당에 와 있는 줄 착각했다. 예수님이 아닌 석가모니불이, 열두 사도가 아닌 관세음보살이 있었지만, 천년도 넘게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이 숨 쉬며 드나든 그곳에는 성당과 똑같은 기도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헐벗은 채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이든, 꼬불꼬불한 머리에 가부좌를 튼 모습이든 눈에 보이는 형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극히 거룩해진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서 마음을 모아 기도를 드렸다. 몸에 익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성호를 그으며.


그때부터 조금씩 다른 종교에 대해 궁금해졌던 것 같다. 무의식의 저 밑에 묻혀 있던 아잔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모스크도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졌다. 도대체 이슬람교인들은 왜 해마다 메카를 찾으려 하는지, 왜 그곳에 직접 가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곳을 향해 절을 하는지, 왜 한 달 동안이나 금식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남편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하면서 튀르키예 항공편을 예약했다. 항공사의 스톱오버를 활용하면 이스탄불에 머물면서 모스크를 둘러볼 수 있다고 했다.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가볼 수 있는 몇몇 모스크에 들어갔다. 챙겨간 히잡을 쓰고 신발을 벗어 들고 최대한 예를 갖췄다. 이탈리아의 성당과 경주의 석굴암에서 느낀 기도의 기운에 집중하자니 오래전 들었던 아잔이 다시 들리고, 신도들은 한 방향을 향해 절을 시작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들어와 절을 하는 경건한 할아버지는 마치 유대교 랍비 같기도 했고, 대웅전에서 백팔배를 하는 큰스님 같기도 했다. 하느님은 아마도 기도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여호와를 부르든, 알라를 찾든, 하느님을 부르든 기도의 진정성은 신 앞에 겸손되이 무릎 꿇는 데서 찾아질 것 같았다.


이번 순례의 목적지는 분명히 야고보 사도가 묻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나를 찾고 하느님을 찾는다는 바로 그 여정. 그러나 순례는 히잡을 쓰고 시작되었다. 이날 입때까지 가톨릭의 하느님을 믿으면서 결핍되었던 타 종교에 대한 이해를 넓혀달라고 기도했다. 다른 사람의 다른 믿음, 다른 신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사랑도 설자리를 잃고 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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