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에 들어간 불안의 무게
오가는 비행 날짜 빼고 여행 기간은 보름. 여태까지 했던 어떤 가족여행보다도 길었다. 그중 반은 여행이고 반은 순례지만, 반이 순례인 이상 캐리어를 끌고 갈 수는 없었다. 배낭부터 구해야 했다. 이번에 가면 언제 또 갈지 모르는 도보여행을 위해 새 배낭을 사는 게 내키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우연히 뜻하지 않은 지인에게 적당한 배낭을 빌릴 수 있게 됐다. 각자에게 맞는 크기의 배낭이 확보되었으니, 그 안의 무게는 각자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채우자고 했다.
성탄절 이후 연초까지 이어지는 유럽은 비수기인데다가 비가 자주 온단다. 아예 문을 닫는 알베르게도 많았다. 미리 예약을 할 수 있는 곳도 있지만 예약 없이 가야 하는 날도 있었고, 침구가 아예 없는 알베르게도 있었다. 날씨가 맑든 흐리든, 비가 오든 말든 정해 놓은 만큼은 차질 없이 걸어야 산티아고 대성당 주현절(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에 참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모든 조건들을 감안하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도보여행에 필요한, 보름치의 '생존배낭'을 꾸리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상상이라도 할 수 있어야 현실적인 준비가 가능한데, 내가 일정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으니 짐보따리를 어떻게 싸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들었다 놨다, 넣었다 뺐다, 뺀 것을 다시 넣는 과정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우리 가족은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다닐 때마다 나를 '도라에몽'이라고 부르곤 했다. 여행 중에도 일상적으로 필요한 물건들이 어지간하면 다 내 가방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에몽! 선크림 있어요?"
"에몽! 머리끈도 있어요?"
"에몽! 혹시 소화제 있나?"
도라에몽 주머니처럼 4차원 세계까지 연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내 가방에도 휴대용 수건부터 옷핀, 밴드와 간단한 비상약 등 당장의 필요를 채워줄 각종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좋게 보면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는 내가 얼마나 불편함을 싫어하는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그것이 손톱 거스러미를 깎아내고 긴 머리를 묶는 것 같은 매우 소소한 일상의 일들일지언정, 밖에 나와서도 집안에서 있을 때와 비슷한 편안함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부피가 큰 침낭은 남편 몫의 큰 배낭에 넘기고 내 가방엔 최소한의 여벌옷을 넣었다. 남편은 침낭 말고도 오래 걸어본 적이 없는 가족을 위해 등산 스틱이며 무릎 보호대 같은 보호용품을 챙기는 것 같았다. 겨울 옷들이라 부피가 커서 몇 벌 넣지 않았는데도 배낭은 금세 찼다. 나는 내 개인 짐 외에 세면도구와 비상약 정도를 준비하기로 했다.
"남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처음엔 많이 싸갖다가도 하나씩 둘씩 다 버린대."
힘들게 가져가서 무겁다고 버리는 일이 없으려면 짐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스페인에서도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최대한 제공해 주는 도라에몽이 되고 싶었다.
비누 샴푸 치약 같은 세면도구는 그간 모아뒀던 호텔 어메니티를 긁어모았다. 각자의 우비가 있지만 바로 꺼내 쓸 작은 우산 하나는 있어야 했다. 전압이나 충전기에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한 멀티 어댑터, 옷이나 신발이 마르지 않을 때 사용할 휴대용 드라이어, 작은 반짇고리와 기내 휴대가 가능한 초소형 가위, 따뜻한 물을 담을 텀블러. 그리고 돌아올 때 기념품을 담아 올 접이식 장바구니까지 싸면 쌀수록 보따리는 커졌다. 거기에 종이책 한 권과 100% 꽉 채워 충전한 전자책도 빼놓을 수 없는 목록이었다. 여기에 날마다 일기를 쓰겠다고 작은 공책을 추가했고 볼펜도 잃어버릴 수 있으니 두 자루는 넣어야 했다. 모든 게 다 필요할 것 같았고,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물건들이었다.
비상약은 또 어떤가. 날마다 복용해야 하는 고혈압 약,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속을 썩이는 염증을 대비하여 미리 처방받아 둔 항생제를 챙겼다. 음식과 물 바꿔 먹으니 소화제와 지사제는 기본이고, 근육통에 대비한 물파스와 동전 파스, 찰과상에 쓸 연고와 밴드, 급체하거나 현기증이 날 때 손가락을 따주는 사혈침을 넣었다. 딸아이의 생리와 속옷을 갈아입기 어려울 때를 대비한 위생용품, 겨울철에도 조심해야 한다는 베드버그 퇴치제까지 야무지게 쌌다.(이것만 해도 꽤 묵직했는데, 떠나기 직전 우리의 무릎을 걱정한 언니가 120정이 든 관절영양제를 두 통이나 안겼다! 도저히 두 통을 다 가져갈 수는 없어 한 통은 두고 갔다.)
이리저리 욱여넣고 쑤셔박으니 가방은 솔기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빼자고 생각하니 뺄 만한 게 없었다. 무겁다고 빼놓았다가는 여행 중에 딱 그 물건을 사용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가방에 넣은 물건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내 생에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되었다. 남편의 배낭은 이 순례여행을 전체적으로 기획했다는 '책임의 무게'로 무거워졌고, 내 배낭은 경험해 보지 않은 시간에 대한 '불안의 무게'로 채워졌다.
어깨가 빠질 듯 지고 걷던 어느 날, 우리는 잠시 짐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 텀블러를 가져올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아."
"그래, 없어도 됐겠다. 내가 만약에 순례를 다시 하게 된다면, 난 드라이어도 넣지 않을 거야."
텀블러나 드라이어 말고도 가방 속에 넣은 여러 가지 것들이 내 머리를 스쳐갔다. 하나씩 보자면 깃털처럼 가벼운 것들이지만 하나하나가 모이니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되어 있던 하찮은 물건들. 내 삶을 주관하시는 분을 믿고 내려놓으면 눈 녹듯 사라져 버릴 테지만,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 여행 내내 따라다니는 '불안'도 그 물건들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