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에서는 별로 보지 못했지만 옛날 드라마에서는 꽃꽂이는 재벌집 며느리가 하는 신부수업 코스에 꼭 등장했다. 그냥 하나의 취미로 보아줄 수도 있었겠으나, 한 번 할 때마다 재료비가 만만치 않게 든다는 것 때문이었을까, 아씨보다는 무수리급이라고 여겨온 내게 꽃꽂이는 귀족들이나 하는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금요일마다 전지가위를 들고 꽃을 꽂는다. 어느새 세 번째다.
"나같이 비판적인 사람은 오히려 성당 모임에 안 나가는 게 도와주는 거야."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한동안 '교회밥(?)'을 먹기도 했으나, 결혼한 뒤로 직장에 올인하며 살겠다고 성당 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이 키우느라 바쁜 것도 있었으나, 주일미사 외에 눈길도 두지 않으려고 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목에 칼이 들어오면 순교라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긴 세월을 성당 울타리 안에서 지냈건만, 가끔, 아니 종종 마음이 불편하고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일들이 그 성당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강론 시간 내내 돈 내라는 말만 하고 할머니들한테 반말을 찍찍 하는 신부님들이 없나, 돈 많고 시간 많은 주부들과 고급 식당을 어울려 다니는 수녀님들이 없나, 형제님 자매님 하면서 뒤에서는 뒷담화를 까거나 심지어 사기를 치고 도망가는 신자가 없나. 교회가 아무리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해도, 그래도 '신앙'이라는 기치 아래 모였으면 시정잡배들보다는 나아야겠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얽히지 않는 게 최선이다, 했다. 수백 명이 꽉 들어차 익명성이 보장되던 대형 성당에서는 미사만 참례하고 가는 신자들이 훨씬 더 많았기에, 그렇게 수십 년을 살면서도 불편함이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5년. 시골 분위기 물씬 나는 이 동네 성당은 좀 달랐다. 코로나 시기에 와서는 조금 분위기가 달라졌으나, 그 전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심히 가족적이었다. 본당에 파견된 수도자가 없으니, 모든 전례는 평신도가 준비한다. 미사 앞뒤로 시끌시끌 차 마시고 인사를 나누는 건 물론이고, 미사 시간에도 옆에 앉은 사람이 옆눈으로 빼꼼히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심지어 "몇 구역에 사세요?" 하면서 말도 걸더라.
이런 분위기에 조금씩 익숙해지다 보니,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본당 활동이라는 게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어, 퇴직을 했는데도 아무 일도 안 하면 진짜 하느님 앞에 미안할 거야'라는 마음이 들 만큼. 그래서 퇴직 후, 구역장 전화번호를 물어 문자를 남겼다. 한 달에 한 번, 일단 구역모임에는 나가보겠다고. 문자 수신 후 구역장은 바로 전화를 해왔다. '날 알고 있었나?' 싶을 만큼 격하게 반기는 목소리다.
"아유, 자매님~ 반가워요. 코로나 때문에 구역모임은 안 하고 있는데~ 혹시 전례꽃꽂이 안 하실라우?" 대략 난감.
꽃은 그냥 있는 그대로가 가장 예뻤다. 그래서인지, 화원에서 꽃다발용으로 파는 꽃들보다 그저 들에 저절로 피어나는 작은 꽃들이 훨씬 좋았다. 봄에 민들레, 봄맞이, 개불알풀, 광대풀, 제비꽃 등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야 겨우 보일까말까 한 야생화들이 피면 가슴이 뛰었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착해지는 것 같았다. 일부러 씨앗을 뿌려 키운 큰금계국이나 유채꽃, 저절로 풍성해진 개망초 등이 화사하게 피면 더워지는 날씨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니 굳이 그것들을 댕강댕강 잘라다가 구도를 맞추고 구색을 갖춰 꽂아놓을 필요가 없었다.
전례꽃꽂이는 일반 꽃꽂이와 살짝 다르긴 하다. 전례꽃꽂이는 주일마다 제단 앞을 장식하는 꽃꽂이다. 꽃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하는 뜻도 있겠으나, 전례력에 맞춘 색깔과 모양으로 꽃을 꽂아 신자들이 전례 분위기에 빠져들도록 도와준다. 젊을 적, 제단 앞에서 꽃을 꽂는 수녀님의 뒷모습을 보고 내 앞길을 결심하기도 했고, 어느 해 성토요일에는 언니 수녀님의 제단 꽃꽂이를 보면서 주님 부활을 가슴으로 느낀 적도 있었다.
반면 별로 좋지 않은 기억도 있다. 신문사 기자 시절, 전례꽃꽂이를 하는 어떤 분이 책을 출간했다고 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취재를 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책을 훑어보는데, 책 사이에 흰 봉투가 끼워져 있었다. 처음으로 받아 본 촌지에 손이 떨렸고, 기삿거리가 된다고 취재했던 의도를 모독당한(?) 느낌을 받았더랬다. 당시에는 그런 걸 받으면 '데스크'에 다 갖다 드린다는 선배의 조언이 있었다. 후원금 처리를 한다고 했다. 왠지 믿지 못하겠더라. 길거리에서 돈을 주우면 하릴없이 경찰서에 갖다주었던 어릴 적 기억과 맞물리면서 나는 그 찝찝한 돈을 '인 마이 포켓' 했다. 선배도, 데스크도 경찰만큼이나 믿지 못했던 시절의 찜찜한 기억이다.
어쨌든, 꽃꽂이라니. 취향도 아니고, 의도도 하지 않았던 일이 내 인생에서 시작되었다. 단순히 생각하자면,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자초한 결과다. 잘할 리 없다. 한숨이 절로 나지만 '뭘 배워도 쓸모가 생기겠지.' 하면서 열심히 흉내를 내며 작품을 만든다. 다 꽂아 놓아도 엉성하기 짝이없다. 게다가 딸내미조차, "엄마, 미안한데, 이렇게 꽂아오는 것보다 엄마가 그냥 대충대충 꽂아놓는 게 더 예뻐."라며 칭찬인지 디스인지 모를 평가를 한다. 그래도 기왕에 시작했으니, 당분간은 금요일마다 재벌집 며느리 코스프레를 하려 한다. 다음주에는 에이프런도 하나 챙겨갈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