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0일 일요일 / 성지 흔들던 손으로 십자가를 외치겠지
주님 수난 성지주일이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는 앞으로 40일 동안 주님 수난을 묵상하면서 잘 살아야지, 하고 결심하지만 해마다 작심삼일이다. 그러다 늘 마지막 한 주간을 맞는다. 성지가지를 축성하고, 호산나를 부르며 행렬을 하는 마지막 주간이 되면, 또 다시 '성주간만이라도 잘 지내야지.' 하고 결심한다. 그러고 삼일 후에는 '성삼일만이라도.' 그러다 '성금요일만이라도' 그렇게 하루하루 줄어든다.
내 고통이든 주님 고통이든, 고통은 직접 겪고 싶지 않거니와, 생각으로라도 피하고 싶다.
신부님들이 미사 강론 시간에 정치 이야기를 하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보수보다는 진보, 사회정의를 이야기하는 분들이 주로 강론 시간에 정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정의구현사제단을 아예 '빨갱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그러나 복음서, 특히 주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부분은, 아무리 영성적으로만 읽어보려 해도 정치적인 면을 빼놓고 읽히지 않는다. 내 눈엔 예수님이 매우 정치적인 분으로 보이고, 정치권력에 희생된 분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복음 말씀이 더 잘 이해된다. 나도 정치적인 사람, 정치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어서일까?
성지주일에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와 그후 예수님을 처형하도록 탄원하는 태도를 보면, 오늘날의 정치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보이기도 한다. 예수님을 왕으로 받들며 성지가지를 흔드는 군중들의 목소리는 곧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로 바뀐다. 찬양이 컸던 만큼 증오도 더 커진다. 한 편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따라 적이 되는 건 일순간이다. '저들이 나중에 다시 얼굴이나 볼 수 있을까?' 생각될 만큼 날선 비판을 날리던 자들이 다시 없는 동지처럼 손을 맞잡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 그를 찍으면 손가락을 자를 사람이 많을 거라던 자도 자기 손가락으로 그를 찍지 않았던가. 호산나를 부르던 입으로 십자가에 죽이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잠깐 방문했던 시골 성당에는 납작하고 소박한 제대 꽃꽂이가 되어 있었다. 뾰족하고 날카롭게 남을 찔렀을 말들을 성찰하게 하는 탱자나무 가시들, 화살촉처럼 날아갔을 나의 죄들을 돌아보게 하는 화살나무 줄기들. 그것들 위에 꽂힌 초록빛 희망과 예수님의 붉은 피 같은 장미 몇 송이. 호산나, 호산나. 손에 들고 흔들 성지가지들은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 담겨 사제의 축복을 기다린다.
한 주간 동안, 큰 회개도 하지 못하고 큰 변화도 겪지 못한 나는, 피하고 싶은 고통을 계속 피하고 싶어하면서 보낼 것이다.
아니, 이번 주간은 그러면 안 된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고통을 생각해야 한다.
피하고 싶지만 마주대해야 한다.
잊고 싶지만 기억해야 한다.
아파해야 한다. 견디어야 한다. 그렇게 사는 일주일이어야 한다.
어디에서 그런 건지, 온몸의 반이 날아가 버린 동네 고양이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상처를 갖고서도 그 고통을 이기고 있는데. 햇볕이 가장 잘 내리쬐는 구석에 누워, 자기 고통을 견디어 내고 있는데. 저 어린 짐승도 저렇게 잘 견디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