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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 바꿔!

2022년 10월 13일 목 / 나는 호모 글씨써쿠스

by 글방구리

나도 남들한테 없는 재주가 하나 있다. 글쎄 그걸 재주라고 해야 하나, 신기(神氣)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지만 가끔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때가 있으니 신기(新奇)한 재주임엔 틀림없다.

나는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됨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짐작할 수 있다. 명필이냐 악필이냐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서체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따로 연구한 적도 없으니 이런 주장에 '근거'는 없다. '얼마나 정확하고 객관적이냐'고 묻는다면,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내 재주가 신기(神氣)도, 신기(新奇)도 아닌, 사기(詐欺)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한테 이런 초능력(?)이 있음을 진작에 알았던 나는 대학교 시절 미팅을 나가면 가장 먼저 상대방에게 글씨를 써보게 했다. 그리고 뭔가 찝찝함이 느껴지면 그 사람에게 거리를 두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면 그 사람의 글씨를 흉내내고 따라써 보기도 했다. 글씨를 비슷하게 쓰면 성격이나 취향도 닮아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글씨가 그 사람의 성격을 보이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런 선입견을 갖고 바라보는 걸까를 두고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은 글씨를 먼저 보지 않으려고도 했다. 어느 날엔가는, 사람은 알되 그 사람의 글씨를 전혀 본 적이 없었던 분이 내 예상과 꼭 맞는 글씨를 쓰는 걸 보고는, 스스로 소름이 끼쳤던 적도 있다.(이쯤 되면,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필적 감정하는 국과수(?) 같은 데 취업하든지, 아니면 미아리 고개에 돗자리 깔고 작명소를 차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이들의 글씨에도 특징이 보인다. 어른들만큼은 아니지만 글씨를 보면 그 아이가 어느 정도 보인다. 규칙이 있는 놀이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민재는 글씨도 바람처럼, 그 아이의 영혼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숙제라고 한 적이 없는데도 꼬박꼬박 글쓰기 공책을 열심히 채워오는 시현이는 글씨에도 '나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에요.'라고 씌어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도권을 잡고 노는 나연이의 글씨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친다.

글씨 때문에 아들내미와 한 번 크게 다툰 적도 있다. 아들내미의 글씨는 돋보기를 써야 보일 정도로 작다. 작을 뿐 아니라 흐릿하기도 하다. 아이의 글씨를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몸에 개미가 스물스물 기어가는 것처럼 간질거리기도 한다. 어릴 적에는 어떻게든 글씨를 크게 써보라고 압박도 해보았으나 아이의 필체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대입을 앞두고 논술시험을 보러 가는 아이에게 "너 글씨 좀 자신있고 크게 써라. 채점자 눈에 네 글씨 보이지도 않겠다."라고 한마디 했는데,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차에 엄마에게 한소리 들은 아이는 "남 글씨 쓰는 것 갖고도 참견이냐"며 화를 내고 나갔다. 그 학교는 떨어졌다. 글씨 때문이었는지, 아이의 잡친 기분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나 역시 합격 여부보다도 아이의 성격이 글씨를 닮아 소심하고 자신감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나이 육십에 깍두기 공책을?'

유튜브 채널을 돌려보다가 인쇄한 듯 글씨를 단정하게 쓰는 어느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공들여 쓰는 영상을 보면서, '나는 글씨를 얼마나 단정히 쓰는가, 아니 얼마나 정성껏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좋아하는 사람의 글씨를 흉내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글씨를 흉보고 살 줄 알았지, 주체적인 나로서, 내 글씨를 쓰면서 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손글씨 교본을 샀다. 초등학교 처음 들어간 아이처럼 한 획 한 획 다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동그라미를 동그랗지 않게 썼구나, 가로 세로로 긋는 이 짧은 선조차도 반듯하게 쓰지 않았구나, 언제나 마음만 급했지 순간순간 정성을 들이는 데는 미흡했구나. 펜촉에 마음을 기울이니 성서 필사 공책도 조금 더 단정하게 보인다.


물론 나는 아마추어 캘리 작가로도 글씨를 계속 쓸 거다. 붓을 들었을 때는 붓 가는 대로. 생각의 속도가 빠를 때는 가장 속도가 빠른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테다. 그러나 내게 남은 인생은 휘갈기듯 살지 않고, 조금 더 단정하고 깔끔하고 깨끗하게 살고 싶기에 글씨부터 꼭꼭 눌러 쓰려고 한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자 글씨 쓰는 사람, '호모 글씨써쿠스'니까. 글씨만 바꿔 성격이 바뀔지는 잘 모르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나. 다만 바라는 것은, 내 성격이 좋게 바뀌기 전에 나처럼 글씨로 성격을 읽는 누군가는 만나지는 않으면 좋겠다는 거고.

정성을 들이며 쓰니 성서 필사 속도가 더 늦어졌다. 남편 환갑 때까지 다 쓸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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