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6일 월 / 허황되다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한
[우리 동네 꾸러기 신문]을 재창간하고 어느새 다섯 번째 신문을 낸다. 네 번째까지 낼 때, 1면에는 아이들이 찍어온 우리 동네 풍경 사진을 실었더랬다. 그런데 봄, 여름, 가을을 반복하다 보니 편집이 식상하기도 하고, 겨울 들어 찍은 사진들이라 왠지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어쩌지?'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우리가 꿈꾸는 마을'을 한번 그려보기로 했다.
'맨날 글만 쓰는 것도 힘들 테니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재미있어 하겠지'라고 나름 기대하면서.
"자, 오늘은 너희가 원하는 우리 마을을 그려볼 거야.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아도 괜찮아."
"글은 안 써요?"
"일단 그림을 그리고, 그림 설명 정도는 써줘야겠지?"
"아싸! 얘들아~ 오늘 글 안 쓴대."
그럴 줄 알았다. 글을 쓰자고 모인 모임인데 글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것보다 또래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게 더 좋고, 맛있는 간식을 먹는 게 더 좋으니까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오는 거다. 개중에는 엄마가 가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오는 아이도 있겠지만.
'다같이 그리는 거니까 큰 종이가 필요하겠지?' 딸내미가 쓰는 2절짜리 도화지를 챙겨갔다. 그런데 큰 종이에 그리는 아이들의 그림은 그야말로 코딱지만 하다. 넓은 곳은 다 비워놓고, 귀퉁이에 잘 보이지도 않게 그린다. 이 종이를 다 채워야 한다고, 신문 일 면에 얼굴처럼 들어갈 거라고, 거듭 재촉을 하니 그제야 살금살금 영역을 넓혀 그려간다.
아이들이 처음에 그려놓은 것들은 이런 거였다.
드래곤과 공룡, 구미호처럼 실재하지 않는 동물들이 있는 '환상 동물원'
전기 대신 요술을 쓰는 '요술 연구소'
마음껏 낚시할 수 있는 연못,
여러 가지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장소,
비행기 대신 타고 다니는 드래곤,
사탕이 달리는 나무, 하루종일 날 수 있는 열기구, 실제 뽀로로가 광고하는 인형가게.
그러고는 가성비가 좋은 회전초밥 집, 양을 많이 주는 떡볶이 집, 빅사이즈를 주는 햄버거 가게.
자동차 대신 유니콘을 타고 다니는 그림이나 다람쥐 가족을 그려놓은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그렸는데도 도화지는 빈 곳이 많았다.
'어쩌지?'
그 다음주는 코로나로 격리해야 하는 아이가 있어서 줌으로 만났다. 전에 썼던 글을 읽어주고 고쳐주는 작업을 한 다음에, 다시 '우리가 꿈꾸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기로 했다. 이번엔 실제로 있는 기관이나 건물들이 어떤 곳이었으면 좋겠는지를 꿈꿔 보기로 했다. 글을 쓰지도 않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고, 이번엔 말로만 하는 거다. 받아적기 바쁠 정도로 아이들의 생각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도서관이요? 책을 빌리면 아예 가져도 되는 곳!"
"소포를 무료로 배달해 주는 우체국!"
"빚을 져도 갚지 않아도 되는 은행!"
"어머나, 얘들아. 이건 너무 사기꾼 심보 아니니?"
"그래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화면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이 밝고, 의견을 말하고 싶다고 손을 번쩍번쩍 든다.
학교, 경찰서, 법원, 교회, 병원, 소방서에 대해서도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어떤 위험한 상황도 안전하게 해결해 주는 경찰서,
착한 아이한테는 주사를 아프지 않게 놔주는 병원,
가볍지만 튼튼한 옷을 입고 구조하는 소방관,
길에서 교회 다니라고 붙잡지 않는 교회.
학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 많다. 자신의 특기를 살려 수업을 해주는 학교, 쉬는 시간은 30분 공부시간은 20분인 학교, 매일 노는 학교, 3,4교시까지만 하는 학교, 발이 달려서 평소에는 없다가 체육시간에만 나타나는 학교, 학생들이 규칙을 정하고 정한 것은 무조건 허락해 주는 학교, 마법을 가르쳐주는 학교, 굳이 우리 마을에는 없어도 괜찮은 학교.
얼추 짐작대로 말한 것들도 있으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의견도 많았다. 내친 김에 저학년 수업에서도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려보게 했다. 저학년 아이들은 너나할것 없이 놀이동산을 원했다. 더 짜릿하고, 더 무서운!
신문 편집을 하면서 아이들이 꿈꾸는 마을을 차근차근 다시 읽어 본다.
그런데 읽을수록 '이게 아이들에게 꿈꾸게 해야 할 일인가?' 하는 마음이 든다. 어른들이 당연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들을 해주지 못한 건 아닌가? 경찰들은 어떤 위험한 상황도 안전하게 해결해 주어야 하고, 소방관들에게는 가볍지만 튼튼한 옷을 주어야 하는데? 교회에서 선교를 하려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할 일이 아니지. 그건 아이들도 귀찮아한다. 은행에서는 이자 독촉을 하지 말아야 하고, 청소년 아이들을 위해 마을에서 가끔 연예인을 불러 콘서트도 열어줘야 하지 않나?
쑥쑥 자라느라 돌아서면 배가 고파하는 아이들이 가면 떡볶이 사장님은 어른들보다 양을 조금 더 많이 주고, 작은 사이즈를 시켜도 실수처럼 큰 사이즈의 햄버거를 내주는 어른들이 있는 마을은 어떤가? 과자로 만든 집이나 사탕이 달리는 나무는 없어도, 가끔은 아이들이 이뻐서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주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마을은?
무엇보다 우리마을의 학교는 그런 곳이었어야 한다. 노는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해 주고, 아이들이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지킬 수 있도록 자치권을 더 보장해 주고, 몸을 움직이는 체육시간을 더 늘려주고, 앉아서 하는 수업 시간은 줄여주는 곳. 마법처럼 신기한 일이 날마다 일어나는 곳이라면, '없어도 되는' 학교가 아니라, 절대로 없어져서는 안 되는 곳이 되지 않을까?
아, 그런데! 아이들이 꿈꾸는 마을에 학원은 없더라. 어른들은 뭔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아이들을 위한다고 학원을 만들고, 보낸다. 정말 가르치기 위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부모가 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풀기 위해, 혹은, 돈 벌러 나가는 동안 봐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학원 셔틀을 시키는 건 아닌지.
아이들이 자라는 데는 그리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 나도 사교육 선생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리다. 아이들에게는 놀 시간과 놀 장소, 놀 친구만 충분히 주면 된다. 배 곯지 않게 먹여야 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글쎄 거기에 꼭 뭘 챙겨주고 싶다면, 만화책 몇 권쯤 주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