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엘리엇이 살던 곳에서는 학기를 3월에 시작하지 않아서 그런 거였을까? 그는 그랬을지 몰라도, 내가 살아온 이 나라에서 일 년 중 가장 잔인한 달은 당연히 3월이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모두 3월에 입학을 하고 진급을 하니, 기저귀를 찬 아이들도 주로 3월에 첫 등원을 한다.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두고 사라지는 엄청난 슬픔을 겪는 아가들의 울음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우는 달. 이미 적응하여 잘 다니던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의 슬픔에 동화되어 신입친구와 함께 목놓아 우는 달. '울음 총량의 법칙'대로 울만큼 우는 데 필요한 시간이 대략 한 달이다.
3월은, 엄마 잃은 아이에게 잔인한 만큼 보육교사에게도 잔인하다. 내 속으로 낳지도 않은 수많은 아이들을 처음 만나 그 아이들의 엄마보다 더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아직 동지애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은 예민하기 이를 데 없어 서로 싸우고 할퀴고 물어뜯는 육탄전도 자주 발생한다. 사람과 환경에 다치지 않게 보호하면서,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함께 놀려면 몸이 백 개여도 부족하다. 반모반사(半母半師/반은 엄마, 반은 교사)가 되어 3월을 지내고 나면 그제야 놓았던 정신줄을 하나씩 챙기게 된다. 보통 정신줄을 잡다 보면 위염이나 방광염 따위의 잔병들도 전리품처럼 따라온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밥 한 수저를 편안히 못 먹고, 소변이 마려워도 참기 일쑤인 보육교사들의 뼈를 갈아 마시며 이 땅의 아이들이 자라는 거다.
아이 맡긴 부모라고 편할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금쪽같은 아이를 떼놓고 종종거리며 출근을 하지만, 아이가 헤어질 때 울던 모습으로 하루종일 울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이다. 우리 아이를 미워하는 것은 아닌가, 뉴스에 나온 그런 못돼 처먹은 교사는 아닌가, 친구들한테 얻어맞고 오는 것은 아닌가, 놀이터에 나가서 다치는 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에 부모는 아이보다 더 긴 적응기간을 거친다.
그렇게 3월이 지나간다. 봄꽃 흐드러진 4월이 오면 아이들은 손 흔들고 웃으며 엄마와 헤어지고, 교사들은 하나하나 빛나는 아이의 싱그러움이 눈에 들어오고, 출근하는 엄마들의 발걸음은 옷차림만큼이나 가벼워진다. 3월 말쯤 되면 아이들은 엄마가 와도 더 놀다가 가고 싶어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처럼 하루하루 고달팠던 적응의 시간을 보낸 교사와 부모에게는 함께 전투를 치른 전우애가 싹터 있다. 그래서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고,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한다.
발버둥 치며 우는 건 아니지만 새 학년을 맞은 우리 글동무들이라고 달랐으랴. 3월 한 달 동안 새로운 선생님에게 적응하고, 한 학년 더 올라간 부담감에 긴장도 했을 테다. 이 아이들도 쓰담쓰담해 주고 싶었다.
"너희들 한 달 동안 학교도 잘 다니고, 글쓰기도 열심히 잘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놀아요!"
아이들은, '기승전, 놀아요'다.
"그래, 3월 마지막 주에는 나가서 놀자. 뭐 하고 싶니?"
하루는 글 쓰지 말고 나가서 놀자고 했더니, 자기들끼리 계획을 정하느라 시끌시끌하다.
"우리는 졸업여행 안 가요? 제주도로 여행 가요, 아니, 놀이공원 가요."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달랑 두 시간 삼십 분인데, 마치 2박 3일 휴가라도 가는 줄. 말도 안 되는 희망사항들을 마구 던진다. 작년에는 놀자고 하면 피구로 대동단결하더니, 올해는 'X-게임장'으로 정했다. 'X-게임장'은 스케이트 보드나 인라인을 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공원으로, 우리들끼리는 일명 '우다다 공원'이라고 통하는 곳이다. 인라인과 보드, 자전거, 킥보드 등 자기가 타고 싶은 것을 취향대로 타다가 밖에서 간식도 먹고 가까운 놀이터에서 놀고 오기로 했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나는 버들피리를 만들고 싶었다. 낚시를 드리우고 물고기가 입질을 하는 손맛을 본 낚싯꾼처럼, 버드나무 가지의 심지를 비틀어 돌리는 손맛을 보고 난 뒤로 봄이면 버들피리를 만들곤 했다. 버들피리는 길이에 따라 높낮이와 음색이 달랐고, 숨을 잘 불어넣으면 노래까지 가능했다. 버들피리가 가능해지자 원추리잎으로도, 아까시 나뭇잎으로도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아이들과 나들이를 다니면서 피리를 불면 아이들도 잎을 따다 쪽쪽거리며 아기새소리를 내곤 했다.
그런데 버드나무가 없다. '친환경 생태공원'을 만든다고 다 밀어버렸다. 없어진 게 버드나무뿐이랴, '오이 냄새나라' 하고 두드리면 상큼한 오이 냄새를 풍기던 오이풀도 없고, 쐐기에 쏘여가면서 오디를 따먹었던 뽕나무도 잘려나갔다. 물고기를 잡겠다고 드리우던 억새 낚시도, 핫도그라면서 놀던 부들도, 오글오글 모여 있던 올챙이들도 살 곳이 없어졌다. 자연스럽게 와서 살던 것들을 다 밀어내고 만드는 공원이 얼마나 친환경적이고 친생태적일지 모르겠다. 섭섭하다 못해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공원 안에 뿌리내린 바람에 살아남은 버드나무가 있어서 가지를 잘라왔다.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어 본다.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하나씩 손에 쥐어준다.
"그 심지는 먹는 거예요?"라며 버드나무 심지를 잘근잘근 씹어보거나, 보드를 타면서도 신나게 불고 다니는 아이도 있지만, 어릴 때 잘 불었는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이도 있고, 한두 번 불어보고는 휙 던져버리는 아이도 있다.
'그래, 지금 소리가 안 나면 어떠냐. 나뭇가지로도 피리소리가 나더라, 하는 정도만 기억해 줘도 우리는 마음에 보물 하나를 채워 넣은 거란다.'
황량해진 공원. 그러나 우리가 전에 여기에서 만났던 연꽃, 올챙이, 쇠뜨기, 부들 같은 것들이 눈에 보이는 광경 너머, 깊은 기억 속에 아로새겨져 있기를.
돗자리를 펴고 싸가지고 간 김밥과 과일을 먹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놀고, "이제 가자!"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상어 잡기 딱 한 번만요!"라며 다시 놀이터로 달려간다. 가방을 메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이 떠오른다. 친구들이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동안 햇살을 모으고 색깔과 아름다운 낱말을 모으던 들쥐 프레드릭. 춥고 배고픈 겨울이 오자 친구들은 프레드릭이 모아 놓은 햇살과 이야기를 들으며 힘듦을 이겨낸다.
오늘의 봄나들이가 우리 글동무들에게 그런 시간이었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야무진 꿈일까. 이 공원이 시멘트로 덮여버리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가 모아 놓은 버들피리 소리가 따뜻한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해 주기를 기대한다면. 비록 놀이로 글쓰기 시간을 날려버린 날이었지만, 인생이라는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 글감을 모으던 찬란한 어느 봄날이었다고 기억하기를 바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