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번째 어린이날 선물은

2023년 5월 1일 월 / 날마다 주기로 하자, 102번째 될 때까지

by 글방구리

어린이날 하루 전인 목요일 글쓰기 수업은 휴강을 하기로 했다. 어린이날에 이어 다음 주 월요일은 어버이날. 비록 어버이날은 공휴일이 아니어도 사나흘 이어지는 연휴에 가족행사가 많을 것 같아서였다. 휴강을 한다고 해도 수업이 날아가는 게 아니고 나중에 보강을 할 테지만, 아이들에게는 휴강이 어린이날 선물처럼 느껴질 게다. 일단은 노는 거니까.


작년은 어린이날이 제정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꾸러기 마을신문]을 만들던 아이들과 방정환 선생님이 작성하신 '어린이날 선언문'을 함께 읽었다. 또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에서 2012년에 만들었던 '어린이 행복선언'을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어린이 행복선언은 이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일곱 살 때, 어린이집에서 아침마다 읊고 암기하던 선언문이기도 하다.

동그랗게 손을 잡고 서서 눈을 감은 채 교사가 한 구절을 말하면 아이들이 따라 했다. 마음껏 신나게 놀고 나면 행복하다고, 포근하게 안아주면 행복하다고, 하늘을 보고 꽃을 보면 행복하다고. 열 가지의 행복을 하나하나 말하면서 아이들의 얼굴에도 행복감이 차올랐더랬다. 교사인 나도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책을 읽어주고, 기다려주고, 아이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려고 노력했더랬다. 행복선언문대로라면 아이들은 아주 작은 것들로 행복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어떤 때 행복할까 궁금했다.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기사로 '우리들의 행복선언'을 써서 실었다. 전쟁이 없어지고, 코로나가 사라지고, 지구가 깨끗해지고, 통일이 되면 행복할 거라는 바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아이들의 행복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놀 때, 숙제가 없을 때, 학원에 가지 않을 때, 여행 갈 때 아이들은 행복해했다. 더욱더 소박하게는, 아이스크림을 두 개 먹는 것을 허락할 때, 엄마가 잔소리를 적게 할 때 행복해하기도 했다.

"친구와 놀 때 행복해요. 친구와 많이 놀게 해 주세요. 책을 읽을 때 행복해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 때 말 걸지 말아 주세요."(재우)
"나는 맛있는 밥을 먹을 때 좋아요. 나는 가족, 친구와 이야기할 때 즐거워요. 나는 숙제가 조금 있을 때 행복해요."(율민)
"지구가 깨끗해지면 행복해요. 지구 온난화 없어지고 바이러스가 없어질 때 행복해요.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해요. 부모님이 안아주면 행복해요."(연우)
"만화책을 볼 때 행복해요.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두 개 먹게 해 줄 때 행복해요. 아이스크림을 많이 사주세요. 놀 때 행복해요. 자유를 많이 주세요. 빨리 잘 때 행복해요. 빨리 자게 해 주세요."(영범)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시간이 좀 남아 행복해요. 아침 일찍 깨워주세요. 내가 할 일을 다 했을 때 행복해요."(지호)
"숙제와 학원을 안 갈 때 행복해요. 숙제와 학원을 빼주세요. 동생이 말을 잘 듣고 그냥 가만히 있어야 행복해요. 말 좀 잘 들으라고 해주세요."(서현)
"나는 강아지를 볼 때 행복해요. 나는 나의 사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을 때 행복해요. 나는 자전거를 탈 때 행복해요. 나는 내가 원하는 답을 들었을 때 행복해요."(주하)
"가족 모두 즐거울 때 나는 행복해요. 목표를 달성하거나 1등이었을 때 즐겁고 신이 나요. 내가 못 가져온 준비물을 친구가 빌려주었을 때 행복해요."(은희)
"나는 선물을 뜯을 때 마음이 두근두근거려요. 동생이랑 장난감으로 놀 때 행복해요."(하준)

작년 가을, 핼러윈 참사사고 이후에는 아이들과 토론을 한 적도 있었다. '일 년 중에 꼭 있어야 하는 축제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였다. 생일, 크리스마스, 설날 등 아이들에 따라서 마지막까지 꼭 남아야 하는 날들은 달랐지만, 생일보다도 어린이날이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을 만큼 이 날은 아이들에게 중요했다.

종이배: 일 년 중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날에 대해 얘기해 보자. 왜 그런지도.
영범: 나는 크리스마스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것이 크리스마스여서.
종이배: 너는 생일보다 크리스마스가 더 있어야 해?
영범: 응.
주하: 나는 생일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생일이 없으면 태어나지 못하니까.
종이배: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태어나지 않았던 건 아닌데?
주하: 그렇지만 자기가 태어난 날을 모르면 몇 살인지 모를 수도 있고.
연우: 나는 어린이날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의 존재감을 찾아준 날이기 때문에.
율민: 나는 한글날. 왜냐하면 한글날이 없으면 우리가 한글이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한글의 중요함을 알려주는 날이기 때문에.
지호: 나는 추석. 가족들이 만나고 노는 날이어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종이배: 추석도 만나서 맛있는 음식 먹지만 설날에는 안 만나나?
아이: 설날 음식 맛없어. 왜 맛없어, 다 전통음식인데.
재우: 저는 설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설날에는 맛있는 기름떡을 먹을 수 있어서요.
시현: 저는 설날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설날이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가면서 징 울리고 그런 것도 하잖아요. 설날이 있어야 한 해를 시작하는 축하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어서요.
종이배: 그래. 이 많은 날들이 다 있으면 좋아. 다 중요한 날이야. 그런데 그중에서 이 날만큼은 없으면 안 돼, 하고 생각하는 날이 뭘까 궁금했거든.
서현: 생일이요. 왜냐하면 생일에 누가 축하를 안 해준다면 왠지 존재감이 없어진 기분일 거고, 소외되는 느낌일 것 같아서.
연우: 나도 생일.
지호: 나도.
율민: 저는 그래도 한글날. 생일이 아니어도 놀 수 있고. 생일 하루 안 논다고 죽진 않잖아요.
연우: 저는 생일 대신에 어린이날.
재우: 저는 설날하고 추석이요. 맛있는 것 많이 먹잖아요. 쉬는 날도 길고.
시현: 저도 설날. 공휴일도 길고, 맛있는 것도 먹고.
(이하 생략)

자기가 태어난 생일을 챙겨주지는 않아도 어린이날만큼은 축하를 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인데 그냥 넘겨도 되려나? 그렇다고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사서 주고 싶지도 않았고, 피자나 치킨 등 '파티 음식'처럼 여겨지는 간식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백 년 전에 만들어진 방정환 선생님의 선언문을 아마 누구보다도 잘 실천해 온 부모님들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사실 특별한 선물을 주지 않아도 충분히 존중받고 있기에,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의 폭이 더 적은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왠지 서운하여, 아이들에게 서로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 선물하는 글쓰기를 하기로 했다. 친구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주되, 그 안에는 그 친구의 장점 하나를 반드시 넣을 것이며, 그 친구에게 주는 축복의 메시지를 담으라는 것이 이번 글쓰기 미션이었다.

"아! 나 말고 친구들 이름 다 해야 해요? 너무 어려워요!"

"야, 너 장점 뭐냐?"

"최,라면 최로 안 하고 '채'로 하면 안 돼요?"

"율은 진짜 없는데. 열심히를 '율심히'로 하는 건 안 돼요?"

"호랑이를 범이라고도 하는 거 맞죠?"

"아, 변은 진짜 없어. 변기밖에 없다고~!"

와글와글, 시끌시끌. 너무 어렵다, 하기 힘든 이름이다 하면서도 머리를 짜낸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국어사전 찬스'를 써도 된다고 하니, 사전이 아이들 손에서 날아다닌다.

생각이 잘 나지 않는지 '지'라는 글자로 '지인짜아(진짜)'라고 만들어 내거나, '서'라는 글자에서 '서선비(선비)'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하고, '주'라는 글자에서는 '주식을 많이 해서 부자가 돼라'든지, '현'이라는 글자에서 '현금도 많이 벌길'이라는 우스운 축복을 해주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나름 친구들의 장점을 찾아내고 어울리는 축복을 해주었다.

양: 양재우야, 너는 책을 참 빨리 읽는 것 같아. 또 첼로에
재: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우: 우산처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시현)

이: 이 씨 집안 서현아
서: 서선비처럼 똑똑하고
현: 현명하게 살길 바라.(연우)

고: 고려, 조선시대의 역사를 잘 아는
연: 연속적으로 똑똑한 너는
우: 우리 모두의 축복을 받을 거야!(율민)

최: 최고의 지호야!
지: 지금부터 더 열심히 운동하고
호: (호)오래 살아!(영범)

박: 박수받을 만큼 끼가 많은 시현아,
시: 시시한 삶이 아닌 행복한 삶을 살아라.
현: 현타가 와도 꾹 참고 포기하지 마. 화이팅!(주하)

변: 변신처럼 재주가 많은 영범아, 너는 포켓몬에 대해 많이 알고
영: 영리해 나중에
범: 범처럼 용감하게 자라렴(재우)

박: 박을 깨면 보물이 나오는 것처럼 열심히 착하게 살아라!
주: 주식을 해봐! 너는 운이 좋으니!
하: 하지 마! 세상이 원래 이런 겨~!(지호)

김: 김율민은 뭐든지
율: 율심히 하고
민: 민들레처럼 예쁘게 살아라(서현)

아이들이 삼행시를 쓰는 동안 아이들을 하나하나 바라본다. 방정환 선생님의 명을 받잡아, 앞으로는 아이들을 내려다보지 않고 쳐다보기로 한다. 내 키가 아직은 아이들보다 크지만, 아이들을 쳐다보기 위해서는 나는 일부러라도 아이들보다 아래에 서 있어야 한다. 내려다보는 데 익숙해져 있으니,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다. 그러나 선언문의 첫 항목이니, 내가 아이들에게 주는 백한 번째 선물은 이걸로 정한다. 단, 어린이날 하루만 아니고, 백두 번째 어린이날이 올 때까지, 너희들을 볼 때마다 너희를 쳐다보며 축복해 주기로 한다.

아이들아, 내 눈이 밝아져 너희들 안에서 금강송을, 참나무를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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