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성장하는 어른
옛날 옛적, 고대 그리스에 아버지를 본 적 없이 자란 스무 살 청년이 있었다. 청년의 아버지는 그 지역의 왕이었지만, 아주 먼 곳의 전쟁에 참여하면서 무려 이 십 년째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은 끝났고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청년의 아버지만 소식이 없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아버지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 말했다. 문제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자 지역의 많은 남자가 어머니에게 구혼을 하겠다며, 청년의 집으로 찾아온 것. 왕이 자리를 비우니 권력과 재물의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가 모여든 것이다. 수많은 구혼자는 아예 청년의 집에 자리를 잡고 눌러앉아 연일 파티를 즐겼다. 뻔뻔한 구혼자 무리는 그렇게 몇 년 동안 청년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며, 자기네 중에서 한 명과 결혼을 하라고 청년의 어머니를 압박했다.
스무 살의 앳된 청년은 두려웠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들을 집에서 쫓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제발 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파렴치한 구혼자 무리를 물리쳐 주기만 꿈꾸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의 친구는 청년에게 다가가 크게 두 가지를 조언해주었다.
구혼자들에게 돌아가라고 공개적으로 말해라.
그리고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러 떠나라.
당시는 나이가 많다는 사실만으로 권위를 가지던 시대였다. 겨우 스무 살의 청년이 뱉는 말에 힘이 실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 시대에 고향을 떠나는 여행은 목숨을 건 모험과도 같았다. 충분히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생사의 여부조차 알지 못하는 아버지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아버지의 소식을 확인하고 돌아와야 직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이 분명하다면 장례를 치르고 현실의 문제를 뒷수습할 것이며, 살아 있다면 반드시 찾아서 함께 돌아와 고향 땅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청년은 "더 이상 아버지를 기다리지 말고, 네 인생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라"는 아버지 친구의 조언을 듣고 어떤 선택을 했을까.
풋풋한 스무 살의 남자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버지 친구의 조언을 착실히 수행했다. 더 이상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고, 모든 구혼자 앞에 당당히 서서 자기주장을 하고 모험을 떠났다.
앞의 이야기는 기원전 8세기경에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의 앞부분 내용이다. 청년의 이름은 텔레마코스, 청년의 아버지 이름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 마지막으로 청년에게 조언해준 아버지의 친구 이름은 멘토르다. 지금 우리가 흔히 쓰는 말, 멘토의 어원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사실 멘토르는 아테나 여신이 변신한 것이었다.
마흔을 앞두고 읽은 <오디세이아>의 텔레마코스 이야기는 어렸을 때 알고 있던 내용과 성장과 멘토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다른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유약한 청년 텔레마코스가 신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단순한 이야기로 보였다면, 지금은 자기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두렵지만 기꺼이 현실과 마주하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읽힌다. 그리고 청년이 진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좋은 스승, 즉 멘토가 있었다는 사실에도 시선이 머문다.
인간의 성장은 대개 고통을 감내해야 일어난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성장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육체는 성장통을 겪고, 정신은 아픔과 방황을 겪는다. 마치 근육이 상처를 입고 회복하면서 커지듯이, 어린아이도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해나가면서 어른이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마주하려는 용기가 아닐까.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라 할 수는 없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끌고 갈 수 있을 때 진짜 어른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용기가 없어서 자기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다가 진정한 어른이 될 시기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 문제 해결의 길을 알려주고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멘토의 존재는 정말 큰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멘토르도 텔레마코스에게 단순히 문제를 해결할 방법만 알려주지 않았다. 친구의 아들에게 문제를 마주할 용기를 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어린애 같은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럴 나이는 지났다.
용기를 내라.
멘토르는 텔레마코스에게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고, 용기를 내라고, 너는 어른이라고 말한다. 용기. 이것이 멘토가 멘티에게 줘야 할 진정한 메시지가 아닐까.
내게도 멘토가 간절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나는 항상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입시나 취업과 같은 진로 문제에서 실패할 때마다, 핑계를 대며 내가 안 되는 이유만 찾았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십 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준 고마운 연인을 옆에 두고도, 경제적 현실이란 문턱 앞에서 고개를 떨군 채 묵묵부답으로 결혼 이야기를 외면하기만 했다. 누가 나에게 어디로 가라고 길을 알려주고, 지속할 수 있게 용기를 주었다면 인생이 조금 달라졌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그런 멘토를 만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결국 내가 찾은 것은 인문학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인문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철학과 문학, 주로 고전을 읽어나갔다. 현실의 스승 대신, 책에서 역사 속의 어른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인문학은 정말 멘토가 되어줄 수 있을까.
인문학의 정의는 다양해서 뭐라고 특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나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와 인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를 좋아한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직접 판단하려면 나만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의 기초를 탄탄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보다 먼저 삶을 고민한 역사 속 어른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다. 철학자, 소설가, 시인, 정치가가 쌓아 올린 이야기를 이해하며 나의 가치관을 다듬는 일은 삶의 기로에서 가야 할 길을 직접 골라낼 힘을 만들어 준다. 게다가 먼저 고민한 선배들의 삶은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도 준다. 예를 들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살 충동에 평생을 시달렸지만, 철학에 매달리며 그것을 극복해냈다. 그의 이야기는 허무주의에 빠질 것 같은 순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마흔을 눈앞에 두고 인문학을 나의 멘토로 삼겠다는 결심을 다시 확인해본다. 멘토에게 배운 판단력과 용기를 바탕으로 사십 대에는 내 삶의 문제로부터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 어른, 직접 책임지고 해결하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