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개다가 발견한 남편한 취향
그 남자와 연애하던 시절, 헤어질 결심을 했던 몇 번의 순간이 있었다. 그날도 그 중 하나였다.
여느때처럼 늘 만나던 동네가 아닌 종로, 그러니까 유동인구가 꽤 많은 시내 한 복판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 멀리서 뚜벅 뚜벅 걸어 오는 그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조금 긴장했는지 완전히 입꼬리를 올리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먹구름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종로가 어떤 곳인가. 이 골목 저 골목마다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 아니던가. 시커먼 츄리닝 차림을 하고 나온 저 사람과 팔짱을 끼며 걸어다닐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츄리닝을 비하하는 게 아니다. 데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된 이십대 남성의 데이트룩치곤 너무 허술했다. 깔끔하고 댄디하게 입는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면바지에 티 정도로 무난하게 입고 왔으면 좋았을텐데.
'이사람 나를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야' 하는 생각에 불편하게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문자를 보냈다.
"종로에 날 만나러 나오면서 츄리닝은 좀 아니지 않아?"
"그래? 이상해?"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아니 성당에서 처음 봤던 그 때 진즉 알아봤어야 했다. 긴 머리에, 빗살무늬 머리띠로 이마를 쓸어올린 머리스타일의 청년과 마주쳤던 충격적인 그 날 눈치챘어야 했다. 이 남자 보통이 아니라는 걸.
어느날부턴가 빨래 개는 건 내 담당이 되었다. 원래 빨래 담당은 남편인데 자꾸 빨래를 기계에 돌리기만 하고 뒤처리를 하지 않았다. 누굴 탓하랴. 건조기에서 뽀송하게 나온 빨랫감들이 쇼파에 뒹굴고 있는 걸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내탓이지.
빨래를 갤 때는 처음부터 정확히 분류를 해놔야지 제자리에 넣기가 편하다. 내옷과 속옷, 남편 옷과 속옷, 그리고 첫째와 둘째 아이 옷과 속옷 총 네 구역으로 구분해서 빨래를 갠다. 빨래를 개면서 비로소 알았다. 한 구역이 유독 시커멓다는 것을.
남편은 바지도, 티셔츠도, 후드티도, 런닝도, 팬티도, 심지어 양말까지도 모두 검정색이었다. 간혹 빨강색과 회색, 녹색이 간간히 섞여 있었지만 멀리서보면 그냥 커다란 검정 더미일 뿐이었다. 그래도 젊었을 땐 줄무늬나 체크 남방도 입고, 밝은 색 티나 바지도 입더니 언제부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보다 못한 내가 "자기가 스티브 잡스야?"라고 일침을 가해도 '이사람 패션을 모르네'라고 반응하니 점입가경이다.
남편은 몸집이 큰 편이라 해외 직구로 옷을 자주 구입한다. 배송 된 택배 박스를 개봉할 때면 이번엔 뭘샀나 궁금하기도 하고, 또 얼마나 샀나 싶어 구경하곤하는데 매번 황당하기 그지없다. 커다란 봉투 속에서는 검정색 면티만 연달아 한 10장이 나오고, 뒤이어 검정색 바지가 몇 장 나오고, 끝으로 검정 양말이 한묶음 나온다.
"이 옷 진짜 괜찮지 않아?"
좋은 말을 해주고 싶지만 매번 드는 생각.
'이 옷은 지난번 옷과 뭐가 다를까.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이 옷들과 다른 점은 뭘까.'
그래서 역시나 같은 대답을 하고 만다.
"응? 다 똑같은 거 아니야? 좀 다른 걸 사보는게 어때?"
그럼 그 사람은 '이건 얇고, 이건 두껍고, 이건 엄청 부드럽고, 이건 시원한 재질이고......' 내 눈에는 그저 검정1, 검정2로 보이는 옷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조목조목 차이점을 짚어준다. 열에 아홉번은 '그게 그거지' 싶다가도 한번 정도는 그 시커먼 무리 속에서 어떤 것들이 유독 선명하게 보일때가 있는데 그게 신기했다.
처음에는 덩치가 있다 보니 검정색 옷을 사기 시작했을 거다. 그런데 입어 보니 잘 어울리기도 하고, 다른 소품들을 매치하기에도 좋았을 테지. 가령 좋아하는 노랑색이나 빨강색 운동화를 신어도 어울리고, 검정색 뿔테와도 어울리고. 빨강색 가방이나 보석이 박힌 백팩과도 어울리는. 그러고보면 검정색 옷만 입는데 참 평범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내 옷장에 화이트 셔츠와 흰색 가디건이 줄줄이 걸려있는 것과는 참 반대다. 흰색이야말로 어떤 옷과도 매치해서 입기 좋고, 화사하고, 깔끔해서 누구에게나 신뢰감을 주지 않나. 흰색 애찬론자인 나는 남편의 까만 옷들을 갤때마다 역시나 칙칙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에게 흰색을 입히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다. 가족 사이라도 취향은 존중해줘야 한다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도 까만옷에 정착하기까지 나름의 과정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옷을 하나 고르는 것도 취향의 영역이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취향의 영역이다.
옷을 고를 때 내 마음을 의식하는 것처럼, 나머지 모든 일에 있어서도
내 마음의 방향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방향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리하여 남의 시선을 배제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나의 마음을 꼼꼼히 파악하여,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김민철 <<하루의 취향>>
와인 마개를 따서 향을 맡고, 맛을 음미하고, 여운을 느껴보는 수많은 테이스팅 과정을 거쳐 마침내 내게 맞는 와인을 고를 수 있듯이 취향을 발견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남편 역시 그런 숙성의 시간을 거치고 비로소 자기만의 스타일에 정착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일은 하루치의 소소한 선택과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마음과도 같은 것이다. 깊게 파고들고 끝까지 해보겠다는 태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는 마음, 내 생각을 남에게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 그런 것들이 모여서 이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한다니까 나도 한번 해보고, 조금 해보다가 이건 아닌 거 같아서 그만두고, 결국 가장 평범하고 별표가 많은 것만 그때그때 쫒아가다가는 내게 어울리는 옷을 평생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데이트할 때는 본인의 취향을 고집하기 이전에 상대방의 취향도 좀 고려해주면 좋겠다. 지금도 바스락거리는 재질의 검정 츄리닝만 보면 아주 아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