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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Jul 20. 2019

죄수의 딜레마, 그리고 불매운동

죄수의 딜레마


어떤 범죄에 연루된 두 사람이 잡혔다. 정황상 확실하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다. 형사는 둘을 격리하고 심문을 한다. 두 용의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모두 부인하면 가벼운 경범죄로 징역 1년, 모두 자백하면 범행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징역 5년을 받는다. 한 사람만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무죄, 다른 한 사람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징역 10년을 받는다. 상대방이 자백을 할지, 침묵을 할지 알 수 없다. 둘은 어떤 선택을 할까.

먼저 상대방이 자백을 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내가 자백을 하면 나는 징역 5년, 침묵하면 징역 10년을 받는다. 따라서 나는 자백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번엔 상대방이 침묵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내가 자백하면 나는 무죄, 침묵하면 나는 1년을 받는다. 따라서 이때도 자백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결과적으로 두 용의자는 모두 자백을 하고 징역 5년형을 받는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는 둘 다 침묵하는 것이었다.  


흔히 죄수의 딜레마라고 알려진 이 전략적 상황에서 두 용의자는 각자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함으로써 최선의 결과를 얻지 못한다. 서로 배반하는 것이 항상 우월한 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경제학이 생겨난 이래로 그때까지 가졌던 금과옥조,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일종의 맹점을 발견했다. 개인의 이익의 추구가 반드시 최적의 균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경제를 전략적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존 내쉬는 노벨상을 받았다.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여기서 두 사람이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득실을 고려한 지극히 이기적인 합리성? 각자의 전략과 그에 따른 보상의 상관관계? 물론 이것들이 가리키는 선택의 방향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논리적 판단에만 집중하면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바로 용의자를 심문하는 형사의 존재다.

형사는 자백을 받기 위해 두 사람을 따로 격리하고 서로를 이간질한다. “저쪽은 이미 다 불었어, 혼자 다 뒤집어쓸 거야?” 각자의 상황을 공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용의자는 각자 살길을 찾아 자백하게 된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이기심을 증폭하고 협력을 방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이 딜레마에 빠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신뢰의 상실이다.


만약 위의 상황에서 두 사람을 한 방에 함께 두었다면 어떻게 될까. 약간의 지적능력만 있어도 어떤 선택이 유리한지는 금방 파악된다. 혼자만 배신하려 해도 함께 있는 동안 누구도 자백할 수 없다. 자백하는 순간 상대방도 바로 자백할 것이기 때문이다. 뉴스에 흔히 보이는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 노력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구속된 상태에서 혐의자는 범죄 관련자들과 쉽게 소통을 하지 못하고, 서로 유리하게 말을 맞추지 못하면 검찰은 심문하기가 쉬워진다.


그럼 딜레마의 상황과 똑같지만 같은 일이 수없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될까. 몇 번 저런 식으로 감옥을 다녀온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배신을 하면 결국 그 피해는 나에게 돌아온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관계의 지속성은 협력을 유도하는 강력한 유인이다.


협력과 배반에 대한 전략적인 관점


협력과 배반에 대한 전략적인 관점은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보통 서로 협력을 하면 이익을 얻기 쉬워지지만 그것을 나눠야 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상대를 배신하면 당장 이익을 독차지할 수 있지만 응징을 당할 위험이 커진다. 처음부터 배신하려다 이익 대신 다치거나 하는 비용만 지불할 수도 있다. 이처럼 개체는 각자의 이익을 고려해 협력과 배신 사이를 줄타기한다. 협력이 유리하다면 협력이 배신이 유리하다면 배신하는 습성을 지닌 개체가 번성할 것이다.


동일한 능력이라면 협력하는 쪽이 유리한 경우가 많다. 사냥하기 쉽고 적들로부터 쉽게 방어할 수 있고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고 분업으로 능률을 올릴 수도 있다. 즉, 조직을 통해 개체의 한계를 넘어선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조직의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다는 건 그것에 접근하지 못한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권위가 생긴다. 이를테면 금수저라는 표현 속에는 보통사람은 쉽게 활용할 수 없는 관계망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협력이 주는 효율 때문에 많은 종들은 자원이 허용하는 선에서 함께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성을 진화시켜왔다. 이점이 많을수록 그 협력관계는 정교해지고 그것은 강한 본성으로 자리 잡는다. 이 과정에서 다툼을 줄이고 협력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서열적 본능을 차용하기도 한다. 현재 인간이 이뤄놓은 문명도 이런 본성들을 토대로 번성한 것이다.


사람은 보통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본다. 마치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을 보면 끌리듯이 자신의 이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호의적이다. 이것은 협력도 일정 부분 본성에 속한다는 하나의 징표다. 이유 없이 선호된다면 그것은 대개 본능이다. 그리고 본능은 충족되지 않으면 불안을 유발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의 위치가 곧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여기는 것도,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는 관계를 만들려고 애를 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제대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개인은 불안해진다. 이를테면 우리는 어디서나 쉽게 교회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사회관계망이 해체되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녔던 소속감에 대한 갈증의 징표들이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협력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위 딜레마에 대한 가정에서처럼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협력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배신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 된다. 장기간 관계가 지속되지 않으면, 배신해서 독차지는 쪽이 훨씬 이득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직이 국가단위로 확장되고 불특정 다수가 접촉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이런 문제도 함께 늘어나게 된다. 법적 계약은 바로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누군가 나를 배신하고 도망가더라도 그 관계에 대한 지속성을 법이 보장한다. 그러니까 누군가 내게 사기를 치거나 위해를 가하면, 그는 곧 공인된 법적 기구로부터 쫓기게 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불특정 다수는 적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협력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수천만, 수억 명의 이기적인 개인들이 모여 살면서도 대부분은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하며 살 수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연맹 왕국 단계에서 고대국가로 이행되었다는 중요한 지표로 법령 제정 유무를 본다.


혹 누군가, 신뢰는 이익과 무관하게 윤리적 가치에서 비롯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익과 상관없이, 심지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올바른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초월한 도덕성을 실현하는 사람은 정규분포표의 한쪽 극단에나 겨우 흔적을 남길 만큼 미미하다. 이들은 일반적 인간의 특징에서 예외적인 존재들이다. 여기에 올바름, 정의의 기준이 뭐냐는 문제까지 이르면 도덕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판단까지 복잡해진다.


인간이 도덕적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애초에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이다. 인간이 지닌 대부분의 특징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기 때문이다. 모든 개체는 서로 제각각의 전략으로 협력을 하고 배신을 하고 그 결과로 선택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특징이 생겨나고 그것이 누적되면 종이 분화한다. 다양성은 현재 지구 상에 수많은 생물이 분화한 메커니즘 그 자체다. 제각각의 얼굴, 제각각의 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덕성도 각자에게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고, 그것에 대해 또 다른 각자는 자신의 성향과 환경, 조건에 따라 그것을 판단하고 관계를 맺을 것이다.


여기서의 관점은 본능으로서의 협력이나 신뢰가 아니라 그러한 본능을 왜 인간이 지녔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유는 아주 단순하며 지극히 명확하다. 그것이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식을 사랑하는 쪽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자식을 잘 키워낼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조상이 가졌던 자식을 사랑하는 특징이 유전되고 현재 대다수의 사람은 보통 부모가 되면 자식을 아낀다. 상대적으로 자식을 방치하는 습성은 유전되기 힘들다. 이와 마찬가지로 협력을 잘하는 쪽도 그렇지 않은 쪽에 비해 번성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도덕적 감각은 협력이 주는 그 유효함만큼 본능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배신자에 대한 응징


도덕심을 가졌다는 것은 반칙에 민감해서 잘 구별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배신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을 잘 경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도덕적 감각은 배신적 행위에 대해 분노를 일으킨다. 이 분노가 커지면 응징으로 이어질 것이다. 앞서 관계의 지속성이 협력을 강하게 유인한다고 했지만 지속성은 협력의 조건일 뿐이다. 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배신자에 대한 응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응징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자신이 저지르는 반칙이 잘못이라는 인식 자체를 하기 힘들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영화의 대사처럼 특권은 당연하게 되고 반칙은 관행이 된다.


게다가 도덕적 자질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그의 응징에 대해 동조하게 만든다. 서로 연대해 사기꾼을 찾아내 대항할 수 있게 한다. 근대의 평등 개념이 확산된 이유도 이런 맥락 속에 있다. 차별을 받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참지 않고 그것에 대항해 조직을 만들고, 그동안 갈취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대립 속에서는 차라리 합의를 하는 것이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들이 겪었던 수많은 좌절과 승리가 누적된 결과가 오늘날 시민들이 형식적으로나마 보편적 평등을 누리게 된 이유다.




무역제재를 둘러싼 한일 양국 간의 게임


현재 무역제재를 두고 한일 양국 간에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국가 간의 관계도 지금까지의 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국가 간에는 법적 장치가 느슨하기 때문에 훨씬 힘의 논리에 지배받는다. 또한 엄청난 규모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서로 간의 행동에 따른 영향력이 단시간에 일목요연하게 파악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양국의 경제적 규모나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적대적인 공세가 양국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질 것이다. 국가는 자리를 옮겨갈 수 없으니 관계의 지속성은 고정 값이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결국 서로 타협하고 협력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관건은 그 기간 동안 어느 쪽이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느냐에 있다. 이것은 다시 그때까지 국가 구성원들이 얼마나 잘 협력하느냐의 문제다. 결국 잘 견뎌내는 쪽이 유리한 타협안을 이끌 것이다.


경제규모나 기술 수준에서는 일본이 우위에 있으나 국제질서에 따른 명분이나 최종 생산자로서 시장지배력에 있어서는 한국이 우위에 있다. 내부적으로는 일본이 좀 더 복잡한 상황인데,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활용해 통화를 남발했지만 서민의 소득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에 따른 경제 활력의 감소로 국가경쟁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후쿠시마 사고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감추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일본은 사실상 일당독재를 유지함으로써 한때 유능했던 정치권이 점점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과거의 영광을 주장하거나 북한이나 한국에 대한 혐오를 조장해 불만을 잠재워 왔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일본은 가까운 한국을 침략함으로써 해결해왔지만 현대 국제정세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무역제제라는 무리수를 둔다는 건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제 한국은 오랫동안 일본이 알고 있던 예전의 한국이 아니다. 언론들이 경제위기라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지만 과거에도 그들이 말했던 위기는 없었고, 정작 위기가 닥쳤던 때에는 직전까지도 안전하다고 소리쳤던 그들이다. 해외언론이나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번 사태가 한국에게 기회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형사의 역할은 누구일까


여기서 꼭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이 상황에서 죄수의 딜레마에 등장하는 형사의 역할은 누구일까. 용의자들을 격리시키고 서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상대방이 자백을 했다는 거짓말로 자백을 유도하는 형사는 용의자의 관점에서는 공공의 적이다. 자백을 받아낸 형사는 표창이나 특진이라는 이익을 챙길 것이다.


국가를 하나의 단일체로만 보면 위에서 말한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국가에 살건 모두 비슷비슷한 사람일 뿐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여기엔 소통과 협력을 방해하는 세력이 뚜렷이 확인된다. 바로 일본 군국주의자의 후신과 한국 기회주의자의 후신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정보를 왜곡하고 선동하고 시민들의 판단을 교란한다. 제대로 된 정보가 공유되기만 하면 인간은 공공의 이익을 갈취하는 사기꾼을 찾아내 응징하게 된다. 사기꾼에 대항해 서로 협력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협력은 도덕이나 윤리처럼 실체가 모호한 개념에 근거한 것이 아닌 자연계의 메커니즘이고, 인간은 개인의 이기심을 유지하면서도 이점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해온 동물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발생한 언어는 경험을 단순히 직감으로 축적하는 것을 넘어 사실을 적시하고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협력을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어 왔다.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는 사회일수록 반칙의 여지는 줄어들고 공공의 이익은 강화된다. 이러한 공공성은 개인에게 이익일뿐더러 조직의 경쟁력도 강화한다는 것은 선진국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기득권자들이 흔히 끌어다 쓰는 애덤 스미스나 하이에크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를 주장했던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공공의 이익에 최선이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이익에 바탕을 둔 자발적인 참여


국가와 같은 거대 조직은 가늠할 수 없는 변수와 작용과 반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지해서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음으로 각자의 이익에 바탕을 둔 자발적인 참여에 두는 것이 효과적이다. 공정함만 보장된다면 각자는 특별히 고상한 가치나 이념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정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보의 투명성과 반칙에 대한 응징이 필요한 것이다. 자유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언론과 사법제도가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엔 생물학적인 약점도 있다. 우리의 뇌는 현재의 생각, 현재의 감정에 최우선으로 반응하게 구성되어있다. 강하게 반응한 만큼 이어지는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반응의 극단적인 예가 중독이다. 마약이나 도박에 중독된 사람은 멈추고 싶어도 좀처럼 멈추지 못한다. 뇌가 계속 원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극적이고 거짓된 선동에 흥분한 뇌는 그와 같은 내용에 점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에 더 부합하는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역사적인 홀로코스트들이 증명하듯이 선동에 집단적으로 빠져들어 제어되지 않으면 그 대상은 악마가 되고 청소해야 할 쓰레기가 된다.


이런 점에서 현재까지 한국의 불매운동은 대단히 이성적인 전략으로 움직이고 있다. 정확히 상대국의 힘을 파악하고 있으며, 개인이 할 수 있는 일과 응징해야 될 목표를 알고 있다. 자발적이고 일사불란하게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를 독려하는 모습은 게임을 즐기는 인상까지 준다. 사안의 규모를 감안할 때 일본인에 대한 감정적 분노나 혐오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오히려 그런 낌새라도 느끼면 서로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평소에도 공공연히 혐한이 표출되는 일본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이는 지난 촛불 혁명 시기에 무력충돌을 자제하며 서로를 독려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이런 공공의 행동방식이 집약된 표현이 있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깨어있는 시민만으론 소용이 없고 조직된 힘은 자칫 선동되기 쉽다. 보기 드문 진정한 교양인이었던 노무현은 이것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 했지만, 동시에 이것은 공공의 시민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최선인 전략이다. 공공의 이익에 무관심한 조직은 경쟁에서 뒤처지고 결과적으론 다른 우세한 조직에 종속될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기회주의자를 배출시킨다. 그들은 강자에게 들러붙어 그 힘으로 약자에게 군림한다. 그들도 똑같이 공공의 이익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공익이란 조직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다. 그리고 그 조직의 이익은 자신들이 챙겨갈 것이다. 이에 따른 부작용을 우리는 역사뿐 아니라 현재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 같이 걸을까 -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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