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인용문들을 제외한 모두는 뇌피셜이다.
이 글은 아주 흔하게 사용되는 다음 단어에서 출발한다.
알
알
1. 조류, 파충류, 어류, 곤충 따위의 암컷이 낳는, 둥근 모양의 물질.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새끼나 애벌레로 부화한다.
2. 작고 둥근 열매나 곡식의 낱개.
3. 1이나 2처럼 생긴 사물.
4. 겉을 덮어 싼 것이나 딸린 것을 다 제거한.
/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참고
가장 흔한 뜻은 1번이다. 생물학적인 의미로 이 단어는 새끼를 생산하는 한 가지 형태로서 유전자를 담은 매개물을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둥근 모양이며 자연 상태에서는 보통 수정란이지만, 대량 생산되는 달걀처럼 무정란일 수도 있다. 곡식이나 열매를 지칭하거나 셀 때도 흔히 사용되고, 유리구슬 같이 둥글게 생긴 사물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근육이 뭉쳤을 때 사용하는 '알이 박혔다'라는 표현처럼, 동물의 알을 연상하게 하는 작고 동그란 모양과 관련이 있지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쓰인다. 큰 생선을 잡았을 때 '알이 굵다'라고 말한다거나, 대게의 길쭉한 다리 살을 보고 '알이 꽉 찼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알몸'이라는 단어로 아무것도 입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아예 모양과는 상관없이 '알거지', '알부자'처럼 추상적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열거한 예들 중에는 비슷하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기원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실제 동음이의어일 수도 있지만, 아래와 같이 공통적인 의미로 정리하고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표현 1. 알 : 어떤 상황에서 중심이 되는 내용물이나 상태.
번식의 관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매개체는 알이다. 이와 비슷하게 농작물을 재배하는 주요 목적은 곡물이나 열매이고, 낚시를 할 때는 생선, 게를 먹을 때는 살이 주요 관심사이다. ('살'이라는 단어는 좀 더 생각해볼 만 한데, 살는 동물의 털가죽 안, 생선의 껍질 안, 사람의 피부 안의 내용물을 뜻한다. 어쩌면 '살'이란 단어 자체도 '속+알', 즉 속에 있는 알이란 뜻에서 기원했을 수 있다. '소갈머리[속+알+머리]'라는 단어에서도 알은 명백히 속에 든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인다.) 또한 옷을 걸친 정도가 문제일 때, 돈의 많고 적음이 문제일 때에 관심사의 중심은 걸친 정도, 가난의 정도 그 상태 자체가 된다. 이 모든 것이 '알'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알'은 구체적인 사물이건 추상적인 상태건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핵심적인 무언가다. 이런 의미를 강조할 때 '알맹이'나 '알짜'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알'과 같은 형태를 어간으로 하는 동사 '알다'가 있다. 일반적으로 '알다'는 '알'과 전혀 관련 없는, 단지 같은 글자를 공유한 단어로 여겨진다.
알다
알다
1. 교육이나 경험, 사고 행위를 통하여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갖추다.
2.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에 대해 의식이나 감각으로 깨닫거나 느끼다.
3. 심리적 상태를 마음속으로 느끼거나 깨닫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안다는 건 어떤 상황을 인지한다는 뜻이다. 어떤 상황을 인지한다는 건 그것의 요점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요점을 파악한다는 관점에서 뭔가 앞서 살펴본 알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앞서 정리한 표현1을 가지고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볼 수 있다. 안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중심이 되는 내용물이나 상태에 대해 인지한 것이다.
이를 잠시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다뤄보면, 'A를 알다'는 명제는 두 가지 명제로 분리할 수 있다. A라는 대상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누군가 인지하고 있다는 것, 즉 사실과 그것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실제 언어 사용에서 그 사람에게 지적장애가 있다거나 사기꾼이라는 것 등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인식 자체를 다루지는 않는다. 때문에 이 명제에서 중심은 보통 A에 있다.
이렇게 일상 언어에서 인식 자체보다는 A에 관심이 쏠려있기 때문에 간과되기 쉬운 사실이 있는데, 인식되지 않으면 A자체는 애초에 아무런 중요도를 지닐 수 없다는 점이다. 중요도라는 것은 인식하는 사람의 관심사에 달린 것이지 A에 포함되는 특성이 아니다. 보통 중요한 것을 인지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인지했기 때문에 중요해진 것이다. 게다가 인지된 내용은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지하는 사람의 관점이다. 내가 안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란 보장은 없고, 안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도를 결정한다.
알다의 의미를 표현1에 이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현 2. 알다 : 알을 인지하고 있다. 혹은 알로 간주하고 있다.
'알다'의 명사형은 '앎'이다. 문어체로는 흔히 사용되지만 발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구어체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보통 대화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게 뭐냐'는 식으로 의존명사와 결합된 형식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인 용언의 명사형은 어간에 접사 음[ㅁ]을 결합한 형태인데, 어간의 모음과 자연스런 발음이 되도록 옴/움/음 등으로 조화를 이룬다. '앎' 역시 '알+음'으로 결합된 형태이며 중세국어에는 '아롬'으로 사용되었다. '앎'과 같은 발음하기 어려운 축약은 문자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한글 창제 직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많은 단어들이 발음에 용이한 형태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테면, 용언에 명사형 어미가 결합된 문자들은 '비르소미오'와 '마초미니라' 처럼 길게 풀어쓴 형태가 많다. 이는 발음하기엔 편하지만 문서화의 관점에선 지면 공간과 가독성의 효율이 떨어진다.
사회가 고도화되면 대화보다는 문서화된 기록이 사회적으로 훨씬 공적인 위치를 가진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한자가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창제 이후에는 한글이 문자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문서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알+음'의 형태가 여전히 풀어진 형태로 사용되는 단어도 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 전해 들어서 알았을 경우에 사용되는 '알음알음'과 어떤 사실에 대해 알기 전의 상태와 비교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깨달음[깨+알음]'이 있다. '깨달음'의 경우, 그 기본형인 '깨닫다'를 국립국어원에서는 '깨다+달리다'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를 '깨다+알다'로 대신한다. 이 편이 훨씬 의미에 부합하고 이러한 점은 '깨달았다', '깨달은', '깨달음'처럼 활용되었을 때에 훨씬 명확해진다. 이를 ㄷ불규칙 활용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오히려 기본형인 '깨닫다'가 원형의 변형처럼 보인다.
아름
지금은 잘 사용되지는 않는 단어 중에 아래와 같은 단어가 있다.
아람
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 또는 그런 열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열매'가 익은 상태와 상관없이 사용되는 단어라면 '아람'은 익은 열매만을 지칭한다. 그것도 대충 익은 것이 아니라 충분히 잘 익은 상태를 강조하는 말이다. 이 단어의 다른 발음이 '아름'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아름'을 강원, 경상, 전라, 평안 방언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의심스런 설명이다. 이건 방언이라기 보단 '퐁당'이나 '풍덩' 같은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이 주는 어감의 차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남자아이에게는 '아람', 여자아이에게는 '아름'을 붙이는 경향이 있을 뿐 지역적 특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이름들을 붙이는 경우에 대개 정확한 뜻을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발음이 주는 어감과 막연히 떠올리는 이미지 때문일 텐데, 이 부드럽고 따뜻한 발음은 아마도 잘 익은 열매처럼 뭔가 꽉 차고 내실 있는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명사화된 동사의 두 가지 뜻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동사에 명사형 어미를 붙인 명사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아래 예를 살펴보자.
그림을 그림.
앞의 '그림'과 뒤의 '그림'은 모두 '그리다'의 명사형이지만 두 단어는 서로 다른 뜻이다. 뒤의 '그림'은 단순히 '그리다'의 명사형이지만, 앞의 '그림'은 그리는 행위로 나타난 결과물이거나, 나아가 그리는 행위가 목적하는 추상화된 대상을 뜻한다. '삶을 삶'이나 '앎을 앎'이란 문장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추상화된 대상이고 후자는 동사의 의미를 그대로 가진 명사형일 뿐이다. '알'에서 출발한 '알다'의 명사형 아름도 이처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름을 아름'이라 쓴다면 전자의 아름은 단순히 '알다'의 명사형도 아닌 그것이 추상화된 대상일 것이다. 이때의 '아름'은 '알'을 알로써 바라보게 된 상태, 즉, 중심이 되는 뭔가를 제대로 깨우친 상태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이런 추측대로라면 앞서 인용한 잘 익은 열매를 가리키는 '아람'이라는 단어도 위에서 이어온 표현의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열매에서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고 그 내용물이 잘 익었다는 건, 그 열매에 대해 목적하는 상태가 잘 구현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즉 '알'이 잘 구현된 상태를 뜻한다. 유독 이 단어가 밤이나 상수리 열매에 사용된 이유는 아마도 그 모양 때문일 것이다. 잘 여문 밤은 밤송이가 벌어지면서 속 알이 드러나고 상수리열매도 자라면서 점점 껍질 뭉치를 벌이고 나온다.
'아름'이 지닌 두 가지 의미를 살펴보았다. 하나는 동사의 의미를 담은 명사형이고 하나는 추상화된 대상으로서의 명사였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현3. 아름 : a. 알을 잘 인지한 상태. b. 알이 잘 구현된 상태.
아름드리
'아름'과 똑같은 형태가 사용되는 형용사가 있다. 역시 공식적으로는 앞서 다룬 '아름'과 관계가 없다.
아름드리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것을 나타내는 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사전적 의미로는 크기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정의되어있다. 하지만 과연 사람들은 이 단어를 크기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일까. 이 역시 의심스럽다. '아름드리 소나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아주 크지만 가지는 앙상하고 잎이 모두 말라버린 소나무를 떠올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로부터 충분히 큰 것은 물론 풍성한 솔잎을 지닌 가지들이 보기 좋게 뻗어있는 나무를 상상한다. 즉, '아름드리'는 아주 잘 자라서 소나무의 특징들이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아름드리 치과', '아름드리 펜션' 같은 상호명도 마찬가지다. '아름드리'가 단지 한 아름이라는 둘레의 표현이라면 굉장히 이상한 작명이 될 것이다. 내실 있게 잘 자라 본연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소나무처럼, 이런 상호명들도 자신의 기능이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그것으로 번성하고 있거나 할 거라는 광고나 희망을 담은 명칭이다.
'아름드리'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정의는 수량을 나타내는 동음이의어인 '아름'과의 혼동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꽃다발 한 아름', '장작 두 아름' 할 때의 '아름'은 '알다'의 현재형인 '안다'가 아니라 두 팔로 껴안을 때의 '안다'의 명사형이다. 이때의 '아름'은 '안+음'의 결합으로 중세국어에서는 '아놈'으로 표기되었다. 아마도 감탄할 만큼 잘 자란 나무는 둘레도 한 아름쯤 크기 마련일 테고, 여기에 우연히 같은 모양의 글자라는 사실이 합쳐져 의미가 뒤섞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근대국가에 이르기 전까지 발음, 표기법, 의미 등은 수많은 분화와 결합, 제각각의 용법이 혼재했었다. 현재 표준으로 정하고 있는 각종 규범들 역시 단지 경향성일 뿐이고 느리지만 계속 변화하고 있다.
아름답다
이제 비로소 이글의 제목에 달아둔 단어에 도착했다.
아름답다
1.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2.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아주 흔히 보고 듣는 단어지만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생각처럼 쉽게 사용되지 않는다. 단어만 듣고 떠올리는 일차적인 의미는 '예쁘다'에 가깝다. 이 단어에 가장 쉽게 연상되는 대상이라면 남자는 여자, 여자는 꽃이나 장식, 풍경 같은 사물을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체감상 사적인 표현보다는 공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예쁘다', '멋지다'처럼 감정이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에 어떤 가치적 판단이 담긴다. 직관적인 감정이 정갈하게 순화되면서도 이성적으로 한층 고조된 느낌이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여자'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단지 예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적 특성이나 기품이 덧붙여진다. 어떤 풍경이나 꽃을 '아름답다'라고 했을 때에도 그것은 단순히 예쁘다는 시각적 쾌감을 넘어서 자신이 지닌 감정의 격을 높이고 그 속에 경의나 찬사를 담은 것이다. 외양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지독한 추남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보여준 고귀한 행적에 감동해 그 사람을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다.
'아름' 뒤에 붙은 '답'은 그 특성이 잘 드러남을 뜻하는 접사다. 이때의 특성은 대개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일종의 상징을 가리킨다. 누군가를 보고 '학생답다'라고 했을 때 사실 여기에 언급되는 '학생'이란 단어는 명확한 실체가 없다. 이때의 '학생'은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공통으로 가지고 있을 거라고 막연히 가정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대충 말해서, 외모가 단정하고 결석하지 않고 선생님 말을 잘 듣는 성실한 모습을 얼버무린 가상의 존재 같은 것이다. 이런 가정을 하나의 실체처럼 간주하고 그것에 잘 부합된 특징이 그 사람에게 잘 나타났을 때 '학생답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아름답다'도 이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아름'도 동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추상화된 대상으로서의 명사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표현3의 b에 해당한다. 이를 토대로 '아름답다'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현4. 아름답다: 알이 구현된 상태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잠시 '아름답다'의 어원을 살펴보고 넘어가겠다. (아래 폰트 문제로 표기되지 않은 글자는 %로 대신하였다. %는 'ㄹ+아래아+ㅁ'로 구성된 한 글자이다.)
현대 국어 '아름답다'의 옛말인 '아%답다'는 15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난다. '아%답다'는 어근 '아%'과 형용사 파생 접미사 '-답-'이 결합한 것이다. 어근 '아%'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중세국어에 '개인적인 것, 사사로운 것'을 의미하는 '아%'은 '아%답다'의 '아%'과 형태는 동일하나 의미상으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공식적으로 '아름[아%]'의 어원에 관한 정설은 없다. 몇 가지 추측 중 '개인적인 것, 사사로운 것'이라는 해석을 가장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본다. 이를테면 '월인석보'에 있는 '아@ 쳔랴', '아@ 庫藏'(@는 'ㄹ+아래아+ㅁㅅ'로 구성된 한 글자이다. ㅅ은 관형격 조사.)라는 문장의 '아름'을 '사사로운 것(私有)'으로 해석하여 '사사로운 천량(재물)', '사사로운 고장(창고)'로 보는 것인데, 문제는 위의 국립국어원의 설명에도 보이듯이 다른 중세 문헌들과 비교하면 의미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름'을 사사로운 것이라는 해석 대신 표현3의 a '알을 잘 인지한 상태', 즉 중요하게 여기는 뭔가를 잘 알고 있는 상태라는 뜻으로 대체해 보자. 이러한 상태를 관형격 조사를 붙여 의역하면 위의 예는 '나의 소중한 재물', 혹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창고'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이 절대반지를 보며 말하는 "My precious!"란 대사와 비슷한 느낌이다. 이런 해석은 원문의 맥락과도 잘 어울린다. 이 단어들은 보시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도 보시를 하면서 굳이 그것을 사사롭다거나 개인적이라는 것을 내세울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중히 여기는 물건을 내놓는다는 쪽이 훨씬 자연스럽다.
지금까지 정리한 표현들은 다음과 같다.
표현1. 알 : 어떤 상황에서 중심이 되는 내용물이나 상태.
표현2. 알다 : 알을 인지하고 있다. 혹은 알로 간주하고 있다.
표현3. 아름 : a. 알을 잘 인지한 상태. b. 알이 잘 구현된 상태.
표현4. 아름답다: 알이 구현된 상태가 잘 드러난다.
간단히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알'은 어떤 것이나 어떤 상황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뭔가 이고, '알다'는 그것을 인지한다는 표현이다. '알다'의 명사형이 '아름'이고 추상화된 대상으로서의 '아름'은 중요하다고 인지한 그것이 잘 구현된 상태이다. '아름답다'는 그 상태가 잘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최종적으로 도달한 '아름답다'의 표현을 좀 더 살펴보자.
꽃을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 꽃은 자신이 지닌 특성을 아주 잘 드러낸 모습이다. 병충해나 기후로 군데군데 반점이나 상처 자국이 있거나 비정상적인 발육으로 균형이 깨지지 않은 고유의 빛깔과 모양을 지녔을 것이다. 혹 그런 어려움의 흔적들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난관을 견뎌내고 자신의 특성을 발현시킨 생명력을 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풍경이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 풍경은 그 지역의 특성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자연은 일정한 질서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래 누적된 패턴 역시 어떤 질서를 지니게 되고, 그러한 질서가 잘 드러난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생명체인 인간은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에 훨씬 쉽게 끌린다. 그래서 황량한 사막보다는 꽃과 나무가 풍성한 곳을 아름답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막이라도 바람의 움직임이 잘 드러난 사구라던지, 대기의 순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설산이라던지, 강물의 오랜 흐름이 만들어 낸 깊은 계곡 같은 곳에서도 자연의 생명력이 포착되면 얼마든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어떤 건축물이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 건물은 건축가가 구상한 비례와 균형이 공간과 구조물과 장식들을 통해 잘 구현되었음을 뜻한다. 자연이 지닌 질서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과 감각이 만들어 내는 질서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비록 인공구조물이긴 하지만 인간이 창조하는 질서는 오랜 문명이 누적된 결과물이고, 문명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자연을 보고 연구한 것에서 비롯된 것임으로 자연의 질서와 무관하다 할 수는 없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오랜 세월 누적된 문명과 한 시대의 미적 감각과 특정한 개인의 솜씨가 만나 재해석된 자연이라 부를 수도 있다.
어느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그 가족들은 보는 이들에게 어떤 중요한 가치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가족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 이미지를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뭔가가 어느 가족의 자연스런 표정과 행동 속에서 발견되었을 때 인간은 아름다움의 감정을 느낀다. 비슷하게 어느 노부부의 사소한 행동에서 오랜 세월 지녀온 애정이 느껴질 때에도 우리는 그 모습을 두고 아름답다고 한다.
어떤 여자의 외모만 두고서 아름답다고 표현할 때도 지금까지의 맥락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는 단지 중요한 관심사가 여성의 외모에 한정된 것뿐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각자가 지니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누군가에게서 잘 발현되었다고 느껴졌을 때 남성은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낄 것이다. 특히 젊은 여성일수록 그런 특징들이 최고조에 달하기 때문에 가장 빈번히 사용된다. 아무래도 남성이 이성의 외모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단어는 여성에 관한 표현으로 많이 점유된 것이고, 상대적으로 남자의 외모에 대해서는 아름답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당신이 아름답다는 의미
누구나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누구나 자신이 아름답기를 원할 것이다. 이 글의 맥락에 따른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욕망이다. 각자가 지닌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은 완벽하게 세속적이면서도 윤리적이다. 그러나 타인의 아름다움과 자신의 아름다움은 다르다. 타인의 것은 간단히 감정이 느끼는 대로 반응하면 그만이지만, 자신의 것은 자신의 반응뿐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의 반응에 영향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인의 영향이 훨씬 크기 때문에 정작 자신의 반응에는 무관심하기 쉽다.
당신에게서 알이란 무엇일까. 당신을 규정하는 것, 당신의 본질을 이루는 뭔가, 당신이 피워내고 확인하고 싶은 그 무엇. 아마도 이것이 당신 자신의 욕망 밑바닥에 깔려있는 물음일 것이다. 아마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이유 도 이 때문일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듯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때,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내 안의 뭔가가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느낌, 그것이 잠시나마 당신이 지닌 불안들을 잠재운다. 위와 같은 자신에 대한 물음에 분명한 답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실망스럽겠지만 본질이란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 어느 순간 당신의 진정한 자아가 찾아와 모든 혼란과 불안을 잠재우는 일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을 제외한 남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에 가장 근접한 실례로 불가에서 말하는 득도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내용이란 것은 본질이 없음에 가만히 머무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기 위해 속세를 떠나 머리를 깎는다. 이런 결정은 어찌 보면 자신이 가진 것을 외면하는 일종의 비겁함 일 수도 있다. 그런 삶을 인간의 지닌 것을 제대로 구현하는 삶이라 부를 수는 없다.
당신에게 본질은 없지만 다행스러운 건 당신은 습관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매 순간 내리는 사소한 판단, 생각, 결정, 실행들이 만들어내는 방향성이 당신을 규정한다. 비록 당신의 생물학적 정보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 반응을 어떻게 이용할지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당신의 손에 달려있다.
당신은 경험을 통해 당신의 반응이 만들어내는 패턴을 읽고 그 패턴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 그 패턴이야말로 당신의 '알'이며, 당신만의 패턴을 그려내는 일 그것이 '아름'이다. 그리고 그 패턴이 잘 드러나 보일 때 당신은 '아름답다'. 당신은 누구에 비할 바 없이 당신스럽다. 아마 그때가 되면 당신은 당신 자신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당신 곁에는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사람이 머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또한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