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터 콜 사울 시즌5 시청 시작 기념으로 적어보는 오늘의 브런치.
'베터 콜 사울 Better call Saul' 시즌5를 보기 시작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보길 원했기 때문에 한주에 한편씩 공개되던 기간엔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모든 회차가 올라오고 난 뒤로도 충분히 여유로운 상태에서 즐기기를 원했기 때문에 지금껏 미뤄두었다. 약간은 아껴두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시즌 마지막 회의 여운이 여전히 남겨져있다. 마치 전 시즌은 그 한 장면을 위한 서막으로 느껴졌을 만큼 강렬한 장면이 있었다. 신난 표정의 지미를 바라보던 킴의 벙찐 얼굴은 마치 제작진이 '니들 심정이 딱 이럴 껄'이라며 낄낄대는 듯했다. 살짝 악취미로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순순히 인정했을 만큼 인상적인 마무리였다. 이전 시즌까지가 기존 시스템에 적응하려는 풋내기 변호사 '지미 맥길'의 좌충우돌 이야기였다면, 이번 시즌부터는 본격적인 변칙 플레이어 '사울 굿맨'의 행적이 그려질 것이다. 드라마의 제목에 붙은 이름이 공식적인 주인공의 이름이 되는데 무려 네 개의 시즌이 필요했다. 그 순간의 짜릿함이란! '사울 굿맨이란 이름은 '바울 Paul'의 히브리식 발음인 '사울 Saul'이 아니라 'It's all good, man!'란 문장을 딴 일종의 언어유희다. 브레이킹 배드에서 지미 스스로 이 유태계 이름이 주는 인상을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사가 있어서,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했다가 피식 했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로도 영미권에서 말장난으로 활용되는 단어 같다. 돈 되는 것이라면 범죄자라도 마다않는 변호사인 주인공의 정체성에 여러모로 잘 어울린다.
1화부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꽤 시간의 갭이 있었음에도 마치 어제에 이어서 본 것 마냥 분위기와 영상의 질감이 착 감겨온다. 이 드라마의 장점이라면 여러 인물들 사이의 파편적인 이야기들이 섞여있으면서도 각 인물들에 대한 포커스가 세밀하고 대충 전개되는 장면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들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주인공이 지닌 세계관이 섬세하고 일관되게 묘사되고 있다. 원래 이 드라마는 엄청난 히트작이었던 미드 '브레이킹 배드 Breaking Bad'에 등장하는 단역 변호사에 관한, 말하자면 일종의 스핀오프 격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완성도의 측면에서는 이미 첫 시즌부터 본편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생각이다. 성향에 따라선 대단히 지루할 수도 있어서 '브레이킹 배드'만큼 인기를 누리진 못했지만, 꽤 많은 팬들이 최고의 미드로 꼽는 작품이다. 영화나 단편 드라마의 완성도가 훌륭한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지만, 시즌제의 드라마가 이처럼 한결같은 짜임새와 만듦새를 유지한다는 것은 놀랍다.
1화 마지막쯤에서 사울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작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여기부턴 약간 스포일러.) 킴이 재판 없는 유리한 협상을 이끌었음에도 재판까지 가보자는 의뢰인이 나온다. 약간 사리분별력이 없는, 자신의 희망과 객관적인 사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범죄를 저지르고 살지만 그렇다고 막 나쁜 거 같지는 않은, 오히려 순박해 보이는 그런 부류인데, 이미 전과기록이 있어서 재판까지 가면 불리한 결과가 뻔한 상황인데도 막연한 기대감으로 재판을 받자고 주장한다. 답답해하는 킴을 본 지미가 자신이 검찰 행세를 할 테니 그녀가 함께 맞장구쳐서 겁을 주면 바로 단념할 거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킴은 그건 사기라며 의뢰인의 뜻을 따를거라며 거절하고 돌아선다. 다시 의뢰인의 철없는 이야기를 듣던 킴은 갈등한다. 재판을 받으면 징역 몇 개월이 몇 년으로 늘어날 것이 뻔한 상황, 옆에선 임신한 그의 아내도 철없이 맞장구 쳐주고 있다. 아마 그녀의 머릿속에는 방금 말한 지미의 제안이 계속 맴돌았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은근슬쩍 검찰 이야기를 지어내게 되고, 당황한 의뢰인은 협상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다. 장면은 어두운 비상구 계단에서 킴이 고뇌에 빠지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유능한 변호사인 그녀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도 있고 올바름이라는 가치에 대한 확신도 있다. 종종 이성적 올바름이 무력한 상황이 놓일 때 그녀는 어찌할 줄을 모른다.
과연 어떤 게 옳은 일일까. 어리석어도 본인 뜻에 따르는 걸까, 사기를 치더라도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걸까. 이런 질문을 하면 서로 입장을 두고서 갑론을박을 벌이기 쉽지만, 사실 옳다라는 것에는 정답의 영역이 없다. 이런 류의 문제일수록 확신에 차서 말하기는 쉽지만 그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여기엔 단지 어떤 태도를 정할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그 진행과정과 결과는 달라질 것이고, 같은 사람, 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어떤 타이밍이었냐에 따라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사정들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심지어 당사자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전부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조차 어떤 사람인지에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어떤 가치 판단을 할 때 종종 사람들이 빠지는 오류는 모든 사람에게 올바른 방식이 존재할 거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이를테면 누군가는 자존심과 상관없이 금전적 이익만 생긴다면 기뻐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단지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로 비관에 빠져 자살해버릴지도 모른다. 인간은 통계적으론 일반화시킬 수 있지만 개별적으로 정의 내릴 수 없다. 극단적인 관점에서 한 시간 전의 나와 지금의 나조차도 동일하다는 근거는 없다.
어떤 행위에서 중요한 건 옳고 그름 따위가 아니라,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와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느냐에 있다. 확신에 찬 사람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을 지려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뭐, 이건 어쩔 수 없다. 본능이니까. 개나 사람이나 뭔가 잘못을 저지르면 일단 부정하려는 것이 속성이다. 겁나서 부정하는 사람, 알면서도 부정하는 사람, 몰라서 부정하는 사람, 애매한 태도로 모른 척하는 사람, 아예 처음부터 잘못은 없었다고 스스로를 속여 버리는 사람, 등등. 그 모습도 천차만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확률적으로 순순히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쪽보다 일단은 부정하는 쪽이 훨씬 이득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례를 찾을 것도 없다. 인터넷을 보라. 뭔가 잘못이 알려지면 그 자세한 내막을 알기도 전에 그 사람은 가루가 되어버린다. 사실관계가 제대로 드러나더라도 이미 당사자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놓인 경우가 허다하다. 거짓말이나 뻔뻔함으로 무장되지 못한 사람은 아주 쉽게 망가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실이 드러나게 되지만, 그 당시 비난했던 대부분은 모른 척 이거나 무관심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다. 이것이 속임수를 쓴다거나 수치심을 모르거나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 사라질 수 없는 없는 생물학적인 이유다.
인터넷이 탄생하기도 훨씬 전부터 인간은, 아니 모든 생물은 유리함을 얻기 위해 상대방을 속이고 감추는 능력을 발달시켜왔다. 인간의 언어를 포함한 모든 동물의 신호는 타인의 심리를 조종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려는 메커니즘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직관적인 통찰을 준다. 그런데 자연계의 균형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속임수를 쓰지 않는 쪽이 얻게 될 이익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모든 관계는 속임수와 속임수를 구별하는 능력이 동일한 이익을 주는 지점에서 균형을 이룬다. 속임수를 구별할 수 있는 인지력이 발달한 동물일수록 속임수에 대한 반대급부에 민감해지기 때문에 신뢰할만한 징표를 가진 사람은 그만큼 호의를 받기 쉬운 것이다. 물론 사기꾼은 또 그런 호의를 이용해 사기를 치겠지만 이 역시도 자연계의 균형에 속한다. 모든 특징들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경쟁하며 서로를 보완한다. 이처럼 우리의 본성이 단순하지 않은 까닭은 다양성을 지닌 사회의 경쟁력이 커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서로 대립하는 본성과 싸워야 하는 다소 자기모순적인 존재들이다. 더욱이 인간은 더불어 사는 삶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런 모순적인 본성들을 어느 정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다양성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강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완벽한 인간이란 없고 보편적인 가치란 시지프스가 밀어 올리는 바위 같은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태도야 말로 그런 과정에 가장 확실한 피드백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래도 지미는 솔직한 편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자신의 역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자신이 정한 선까지는 책임도 질 줄 안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릴 뿐이지 의뢰인에게 대단히 성실한 변호사이다. 비록 엘리트 변호사에게 삼류 취급이나 당하지만 그가 보기에 그 잘나신 변호사들은 더 거대한 범죄자들의 하수인에 다름없다. 부와 명예, 학위나 직책으로 그럴싸하게 포장지를 두르고 있느냐, 범죄가 직접적이냐 간접적이냐에 따라 구별될 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통신강의를 들으며 거의 독학으로 변호가가 된 지미 맥길이 변호사 사회를 겪으면서 느낀 이질감의 원인은 어쩌면 여기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자신에게 익숙한 밑바닥 인생들의 변호사 노릇이 훨씬 마음 편하고 잘할 자신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미 맥길이 타락해가는 과정은 슬픔을 느끼게 한다. 물론 그의 심경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존재는 그의 형이었다. 사실 지난 시즌까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앞으로도 남은 이야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둘 사이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얽혀 있다. 형제로서의 애증, 부모와의 관계에 따른 각자의 입장, 시기와 질투, 존경과 원망, 반칙과 규칙, 신뢰와 불신, 공익과 사익, 이상과 실제. 형을 존경해서 그 자신도 변호사까지 되었으나, 형의 내면을 들여다본 지미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도 들여다보게 되고, 그 깨달음의 끝에 척의 ‘찌질한 동생’으로서의 삶과 결별을 선언하며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 ‘사울 굿맨’이었던 것이다. ‘사울 굿맨’으로서의 삶이 결국 막장이 될 것임은 이미 브레이킹 배드에서 나타난 결말이지만 그 구체적인 과정을 따라가는 일은 대단히 흥미로울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1화를 마쳤고 아직 9화가 남았다는 것이 작은 행복을 준다. 설마 이번 시즌에서 종결되는 건 아닐 테지. 암, 난 좀 더 오래 지미를 보고 싶다고!
인간 본성에 대한 깊숙한 통찰, 세밀한 심리 묘사를 좋아하는 분, 블랙유머와 밀도 있는 구성을 즐기는 분이라면 강추. 여성이라면 웬만하면 비추.(이를테면 영화'대부'를 명작으로 꼽는 여성은 거의 없다는 관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