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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Jan 13. 2021

넷플릭스 / 황혼의 사무라이

주의! 스포난무!


제목이 영화의 감성을 담지 못한다. 일본인이라면 다를 수 있겠지만 보통 사무라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고전 활극을 기대하게 만든다. 게다가 황혼이라니. 뭔가 촌스런 비장미를 풍기는 B급 액션 영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이 영화는 굉장히 사실적이고 차분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요즘 영화는 아니고 2002년 작.


배경은 에도시대 말. 주인공 '세이베이'는 하급 사무라이로 일과가 마치면 언제나 집을 향한다. 사무라이라고 하면 일단 무사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조선시대로 따지자면 실무를 담당하는 중인과 유사한 계층이다. 워낙 전쟁이 빈번했고 막부시대는 기본적으로 군사정부이고 무예는 기본 소양이자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기 때문에 칼잡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진 것이다. 요즘 군대로 따지자면 전투뿐 아니라 각종 행정과 기술을 담당하는 하사관급 장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전투병과 보직이 아니라면 평소에는 군인이라기보다는 관료에 가깝지만 언제든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이베이의 일도 영지 내의 식량과 자원의 출납을 관리하고 장부를 작성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간단히 재무와 회계를 담당하는 말단 관리라고 보면 된다. 일을 마치면 동료들이 술 한잔이라도 하면서 즐기자고 권하지만 그는 매번 거절한다. 아내를 사별하고 병든 노모와 어린 두 딸을 보살펴야 하는 처지로서는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내의 병을 치료하느라 을 져야 했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사무라이의 징표인 칼도 팔아야 했기 때문에 박봉의 일부도 제해야 하는 처지이다. 그래서 항상 먼저 퇴근해버리는 그에게 약간 놀림조 붙은 별명이 '황혼'. 요즘 느낌을 살려 옮기자면 '칼퇴 세이베이 씨' 쯤이 된다. 하지만 이것도 극의 분위기와 달리 경박하게 들리고 극 중에서도 황혼이란 별명은 일종의 호처럼 꽤나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냥 원제대로 '황혼의 세이베이'로 두는 게 가장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래도 극장가에 걸릴 제목으로는 너무 밋밋해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다소 우스꽝스런 번역으로 확정된 듯. 극 중에서도 그를 찾아온 사무라이가 "당신이 황혼의 사무라이인가?"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볼품없는 사무라이가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할복을 거부하는 또 다른 사무라이를 죽이라는 명을 받고 임무를 마친다는 간결한 구조이다. 여기에 가족이 있고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고 사랑이 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에 주인공의 성품과 태도가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적당한 판타지가 녹아있다. 척박한 듯 따뜻하고 현실적인 듯 동화 같은 이야기다.


화질과 색감 조명이 요즘 영상들에 비해 칙칙해 처음엔 약간 몰입하기 힘들었으나(일단 넷플릭스 영상으로는 그랬다. 좀 더 고화질의 버전이 있다면 다시 보고 싶기도.) 카메라 워킹이나 구도, 편집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전개가 깔끔해서 금방 몰입할 수 있었다. 몰입한 뒤에는 빛바랜 색감이 오히려 사실감을 더해주었다.

고전적 형식미를 느끼게 한다. 난 확실히 이렇게 기승전결이 매끄러운 이야기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감정이 쌓일 충분한 시간과 이유들이 있어야 설득당한다. 아마 그렇지 않았더라면 임무를 떠나기 전 세이베이가 토모에에게 고백하는 일본인 특유의 오버톤이 굉장히 오글거렸을 것이다.


주인공인 세이베이 역은 남자 배우는 미드 '웨스트 월드'에서 쇼군 월드에 등장하는 꽤 비중 있었던 사무라이. 헐리우드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일본인이기도 해서 친숙한 얼굴이었지만 별다른 인상을 가지진 못했는데, 이 영화는 보지 못했던 충분한 매력을 전해준다. 해외에서 이미지 소비용으로 등장할 때와 자국에서 그 배우만의 매력을 충분히 살릴 때의 갭은 꽤나 차이가 난다. '토모에' 역의 여주인공도 이미 독특한 분위기로 기억하는 배우였던지라 젊은 날의 모습이 인상 깊다. 두 배우 모두 중년의 모습이 첫 기억인지라 마치 아는 사람의 옛 사진을 보는 느낌이랄까. 어린 배우가 자라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아련함을 덧씌운다.


중심 서사는 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던 두 사람은 아마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지만, 가난한 사무라이는 감히 다가서질 못하고 그 시대에 여자로서는 집안이 맺어준 사람과 혼인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러니하게 아내의 사별과 남편의 폭력으로 인한 이혼이라는 두 사람의 불운이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가능케 한 배경이 된다.


세이베이는 다재다능하여 학문의 소양도 깊고 무예도 수준급이지만 드러내는 타입도 아니고 또 처세술로 출세를 욕망하는 타입도 아니다. 지독하게 가난으로 고생하지만 비관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박하게 가족들과 가진 만큼 누리며 사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이라고 여기고 최선을 다한다. 토모에가 자신과의 재혼을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난이 지치게 만들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할 만큼 냉철한 사람이기도 하다. 토모에는 단순한 소꿉친구가 아니라 그런 비루한 삶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꿈같은 존재였음에도 그는 현실의 무게감을 외면하지 못한다. 할복을 거부하는 사무라이를 죽이라는 임무를 부여받고서 자신에게 직면한 죽음 앞에서야 그는 토모에게 고백하지만, 이미 며칠 전 그녀는 혼담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현실세계에서 이런 타입의 인간은 충분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꽤나 고리타분해 보이기 쉽다. 그런 그를 그녀는 결국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다.


나이가 들면서 인간에 대한 관점이 개인보다는 집단 속에서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확장되는 것 같다.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인데 두 사람 사이의 열정과 그 깊이의 적합성이 주 관심사였다면 가족이라는 집합 개념에서 그 열정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이건 생물학이나 인류학적 관심사에 따른 개인적 취향일지도 모르겠는데 하나의 종이란 관점에서 인간 역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단위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남녀의 사랑의 과정에서 보통은 자식을 가지게 되고 그 자식이 다시 다음 사랑을 할 때까지 준비되는 과정이 양육이고 그 과정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형태로 묘사될 수 있다. 한없이 사소하면서 위대한,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특수한 구성체 '가족'.


이 영화에서 아내가 없는 세이베이는 볼품없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이도 집안도 꾀죄죄하고 심지어 임무를 받고 떠나기 전 복장을 갖추기 위해서도 토모에의 손을 빌려야 했다. 세이베이에게 마음이 있는 토모에가 집에 들러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장면들이 잠깐씩 나오는데 특히 아이들에게 글과 바느질을 가르치고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는 대목은 인상 깊다. 말그대로 현모양처의 전형처럼 그려지는데 당면한 상황에서 망설임없이 일처리를 하는 걸 보면 남다른 강단을 지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녀로 인해 팍팍한 집안에 생기가 돋아난다.


집안을 관리하고 아이를 보살피고 교육시키는 이런 여성상은 구시대의 가치로 전락한 시대에 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사와 육아라는 것이 지능과 체력, 인내와 타협이 필요한 고도의 관리능력이라서 잘하기도 힘들지만, 또 웬만하면 대충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는 일이어서 제대로 평가받기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빼어나게 잘한다고 해서 돋보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은 비용을 지불하면 질 좋은 서비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로서의 자질은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비할바 없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생활이 밀접한 사람을 제외하곤 무관심한 영역이다. 그 능력에 걸맞게 평가해주는 배우자가 있어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인정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인간은 남들의 시선에 유독 약하기 때문이다. 평가받지 못하는 일은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주부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의미를 두려는 태도 자체가 전근대적이거나 가부장적인 태도로 취급되기 딱 좋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가족들은 그런 전근대적인 삶의 형태를 여전히 유지한다. 단지 그 속에서 만족하느냐 만족하지 못하느냐, 가치를 두느냐 두지 못하느냐,  인정받는다고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설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사적인 삶의 형태가 반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현명한 배우자라면 주어진 환경과 조건 속에서 상대방과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배려하고 존중할지를 고민할 것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저절로 순리를 따르기 마련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제목대로 세이베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여성의 입장, 즉 토모에에 관한 서사가 빈약하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핵심적인 내용이라면 좀 더 토모에의 관점이 반영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다소 그녀의 존재가 세이베이에 들어붙은 장식품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특히 마지막 딸의 내레이션은 나태해 보인다. 너무 세이베이 중심의 감회가 오히려 토모에의 존재를 소외시키고 있다. 남편이 죽어버린 여자 홀몸으로 두 딸을 출가시킨 일이 훨씬 커 보여서 세이베이의 죽음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만남이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감을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엔 동의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마치 그 시대에 실제 두 사람이 존재했을 것만 같다. 소설이 원작이라는 데 좀 더 확인해보고 싶지만 번역된 거 같지는 않다.


/ 에도시대의 사실적인 묘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 차분하고 담백한 사랑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 고전적인 형식미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강추. 때깔 좋은 화면의 질감, 무사의 현란한 칼솜씨, 막대한 물량의 전쟁 씬을 기대한다면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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