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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Oct 05. 2021

무서운 사람

남자의 차 앞에 선 여자는 잠깐 망설이다 뒷좌석 문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지네요.” 그녀는 자리에 앉아 벨트를 채웠다.


“신세를 지는 건 제 쪽이죠. 가이드를 받아야 하니.” 남자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여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둥글게 이어진 통로를 따라 그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출구를 지나 곧 흐릿한 하늘이 드러났다. 뿌연 하늘은 그림자의 흔적을 겨우 남길 만큼의 햇살만 남겨놓았다.


그날 여자의 출장은 미리 예정되어 있었다. 생산업체에서 다음 시즌을 위한 시제품을 확인하는 업무였다. 샘플을 통해 최종 확정된 모델의 형태와 마감상태, 생산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불량사항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제품 디자인의 최종 책임자로서 업무를 개발팀으로 이관하기 전 마지막 과정이었다. 원래 개발팀 담당자와 함께 가기로 되어있었지만, 담당자는 갑작스런 회의 준비에 일정이 변경되었다. 개발팀장은 마침 남자가 현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요청을 해둔 상태라고 말해 주었다. 남자도 동행할 직원이 필요하니 함께 출장을 가라며 그에게 연락을 했다. 지난번 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하는 수 없었다. 업무용 차량을 사용할 수 있지만, 몇 년 전 큰 사고를 겪은 이후로 그녀는 운전을 그만두었다.


여자의 불편한 마음과 달리 평일 오전의 시내는 여유로웠다. 적당한 차량, 지루하지 않을 속도, 평온해 보이는 사람과 건물들을 여자는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남자는 음악을 틀었다. 제목을 알 수 없는 피아노 소나타는 과하지도 덜하지 않은 음조와 멜로디로 창밖의 배경들에 입혀졌다. 풍경과 함께 침묵이 익숙해지자 여자는 조금씩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불편함이 사라지자 조금씩 졸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난밤 여자는 오늘 출장 때문에 미리 처리해야 할 일들로 야근을 했었다. 백미러를 살피던 남자는 볼륨을 줄이고 차선을 바꿨다.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여자가 눈을 떴다. 라디오 소리였다. 둘러보니 어느새 공장 부근이었다. 그새 또 지난번처럼 잠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자는 스스로 웃긴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게 뭐 어때서라는 반발심도 들었다. 여자는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마지막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가 물었다. “잠깐 내려서 쉬었다 갈까요, 바로 갈까요?” “바로 가요.” 여자가 말했다.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새치가 덤성덤성한 중년의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과장님.” “네, 사장님도 별일 없으시죠?” 여자도 다가서며 악수를 했다. “우린 별일이 없으면 안 됩니다. 먹고살려면 별일이 자꾸 생겨야 해요. 하하. 근데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신지....” 기대감이 서린 표정으로 사장이 손을 내밀 듯 한 자세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쪽은 강준한 씨. 저희 업무협약으로 파견 나온 분이세요. 미리 연락은 받으셨죠?” 여자가 말했다.


“아... 파견 직원.” 금방 손을 거두며 사장이 실망스런 표정이 되었다. “자료 다 보냈으면 됐지 뭘 실사까지 나오고 그러나. 아무리 작은 업체지만 속 까발리는 건 불편하다고.” 사장은 남자를 보지도 않고 투덜거렸다.


영문도 모르고 당황했던 건 여자 쪽이었다. “사전에 협의된 일 아니었나요?”


“협의야 했지만 본사에서 직접 할 거라 생각했지요. 외주 쪽 일이라면 문제가 달라요.” 사장이 말했다.


“저도 모르는 일이라 뭐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 회사에 다시 연락해볼까요?” 여자가 말했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두세요. 서 과장이랑 상관도 없는 일인 걸.” 사장은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끌어당기며 남자에게 말했다. “라인 담당이랑 재고 담당 불러주면 되지?”


“전산 담당자도 필요합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하여간 더 이상 일 번거롭게 하지 말자고.” 사장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사장은 통화를 한 다음 금방 표정을 바꿨다. “아하하.. 이거 잠깐 분위기가 무거워졌네요. 과장님은 오늘 시제품을 보신다고요? 이번에 우리가 최신 성형기를 도입해서 제품 때깔이 달라요. 물건은 확실하게 뽑아내 줄 겁니다. 이번 시즌엔 기대가 아주 커요. 좀 있으면 곽 부장 올 테니까, 그때 같이 확인하기로 하고.” 사장은 고개를 돌려 창가 구석에 있는 여직원을 불렀다. “저기 김사원, 여기 커피 맛있게 두 잔만 내와라.” 그리곤 업무용 책상 맞은편에 있는 소파 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사장의 뒷모습을 보며 여자는 난처한 감정으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늘 그랬듯 아무 일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이 길어지자, 남자는 그녀에게 사장에게 가보라는 눈짓을 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까지 가만히 서있는 여자를 보며 사장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과장님. 걱정 마세요. 담당자는 금방 옵니다.” 사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앳된 얼굴의 남자 직원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직원 얼굴이 보이자마자 사장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 직원한테 말하면 되니까 일 보라고.” 그리곤 직원에게도 말했다. “박군아. 오늘은 그분 따라다니면서 안내해주면 된다.” 남자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직원을 따라 나섰다.


특별히 큰 문제 될 일들은 없었다. 시제품은 받아본 사진보다 훨씬 만족스러웠고 예상되는 불량에 대해서는 공장 측에서 미리 해결책을 설명해 주었다. 부장은 미처 예상치 못한 공정상의 문제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설명했다. 논의의 핵심은 결국 생산단가로 이어졌다. 사장은 추가된 비용을 보존해 주기를 희망했다. 이 문제는 원래 개발팀 김대리 몫이었지만 그들로서는 누구든 자신의 입장을 회사에 전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사실 여자의 업무는 시안 책임자로서 시제품을 확인하고 점검 목록을 제출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녀는 목록에 추가 의견서를 첨부하겠다는 말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회의를 마치고 문제의 부품이 체결되는 방식을 보러 간 자리에서 여자는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파란 작업복의 직원들에 둘러싸여 뭔가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재킷도 넥타이도 없는 모습은 마치 잔잔한 물 위에 뜬 돛단배처럼 평온해 보였다. 그곳에서의 용무를 마치고 일행과 돌아서는 길에 여자는 남자에게 슬쩍 다가가 말을 건넸다. “식사하셔야죠. 입구 쪽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소립니까, 식사는 저와 함께 하셔야지.” 몇 걸음 앞서던 사장이 걸음을 멈추고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전 같이 온 분이랑...”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이고. 걱정 마세요. 우리 직원들이 다 챙겨줍니다. 우리 구내식당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곁에서 곽 부장도 거들었다. “벌써 예약되어서 지금쯤 준비 중일 겁니다.” 여자가 다시 말을 꺼내려는 데 이번엔 남자가 말했다. “그렇게 하시죠. 전 여기 직원 분들에게 더 들을 것도 많아서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면 어색한 상황이 되어버려서 여자는 일행을 따라 식사를 하러 갔다.


식사 뒤 일은 오전보다 여유로웠다. 여자는 다시 몇 가지 공정들의 과정을 확인한 뒤 목록을 작성하고 공장 측에도 확인을 받았다. 오전에 논의했었던 추가 공정에 대한 일도 증빙자료를 어떻게 작성할지를 논의해서 다음날 오전까지 제출받기로 했다.


일을 마무리하고 나왔을 때, 남자는 주차장 끝 담장을 따라 심어진 나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남자는 미리 차에서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남겨두었었다.


“뭘 그렇게 보세요.” 여자가 주차된 차로 걸어가며 말했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냥 어떤 모양으로 자라나 궁금해서요.” 남자는 아까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넥타이 없는 편한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가 다가오며 말했다. “문은 열려있어요.” 여자가 먼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 곧 운전석에 오른 남자가 말했다. “그럼, 출발할까요.”


도로로 진입해 첫 신호등에서 대기하는 동안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일은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무슨 사과요?” 남자가 물었다.


“박 사장님 태도도 그렇고 식사 문제도 그렇고.” 여자는 슬쩍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남자도 여자의 눈을 맞추었다. “왜 이진 씨가 사과를 해요. 일도 잘 진행되었구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여자가 물었다. 별거 아닌 일에는 단호한 사람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에는 무심한 저 태도를 알 수 없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방향지시등이 점멸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왔다.


“전 별로. 내가 실제로 부당한 일을 해야 했거나, 해야 할 일을 못했다면 모르지만 그런 게 없다면 상관없어요. 단지 말일뿐인걸요.” 남자가 말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아요. 전 정말 사장님이 그럴 줄은 몰랐어요. 그 나이 때 분들이 아무리 그런 경향이 있다고 해도 잘못은 잘못이죠.” 여자가 말하는 동안 신호등이 바뀌었다.


남자는 차를 출발하고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그 정도는 신경 쓸만한 일도 아니고 괜히 마음에 뒀다간 일만 제대로 안돼요.”


“어쩜 그럴 수 있어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건 그 상황을 순순히 인정해버리는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차별하는 건 정말 치사한 일이에요.”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태연하기만 한 남자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오전의 상황이 떠올라 분한 마음이 들었던 건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흥분해 있었다.


“순진하시네요. 그런 사소한 일에 분노하는 건, 그 아래의 치열함이나 비참함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어설픈 분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요.” 남자가 말했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지만 여자에게는 훨씬 단호하게 전해졌다. “어설프다구요? 말씀이 지나치세요.” 여자는 가라앉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사소한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건 아니구요?” 평소의 단호한 태도와 달리 오늘 남자는 태도는 일관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사장이 아니라 왜 지금 그녀에게만 단호한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


남자가 슬쩍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가만히 앞만 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앞에서 무리하게 끼어들려는 차를 본 남자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말했다. “그 표현은 사과할게요.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괜히 저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진 것도 미안해요. 함께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지금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여자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렇죠.” 남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잠시 말이 없다가 남자가 다시 이야기했다. “좀 재수 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전 그냥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무의식 중에 누가 위인지 누가 아래인지를 가늠하고 어떻게 잘 보일지 억누를지를 정하는 본능 말이에요. 오늘 그 사장님의 경우처럼.” 다시 차 한 대가 끼어들기를 시도했다. 남자는 또 속도를 늦췄다. “제가 파견직원인 것을 확인한 순간, 그분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할 작은 기회가 되었던 것뿐이에요. 한 업체의 보스지만 하청 받는 입장에서 평소 쉽게 하지 못했던 것들, 자신의 직원들에겐 나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권위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거죠. 이진씨에겐 저에게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지만 어떤 결정을 두고 어느 정도 주도권을 잡을 필요성도 있었을 테고.” 자신을 향한 여자의 시선을 느끼고 남자는 잠깐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 모든 게 의도적이었다면 대단히 교활한 사람일 테지만 이진씨를 대하는 태도를 봐서 저는 그냥 본능적인 걸로 보였어요. 아주 평균적인 범위에 속한,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유능함으로 받아들여지는 전략적 본능 말이에요. 그건 지금껏 한 업체를 잘 꾸려왔던 이유 중 하나였을 테죠. 물론 그게 그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제 관점에서는 그리 신경 쓸만한 일이 아니었던 거에요. 그리고 거친 듯 보였지만 실제 제가 필요한 것들은 다 제공해 주었잖아요. 간단히 감정적으로 거부해서 자신에게도 득 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본인도 잘 안다는 뜻이죠. 그리고 식사란 건 준비하는 쪽 의견이 우선이 되는 게 맞구요.”


남자를 향했던 여자는 다시 앞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또 자신이 투정 부리는 어린애마냥 느껴졌다. 그를 대할 때마다 조급함과 성급함을 내보이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애써 감추려는 나약함이 아무렇지 않게 드러나는 것에 대한 후련함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억누르는 것들에 대한 어떤 단서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묘했다. 그동안 자신이 느껴왔던 삶의 흐름 아래에 도사린 알 수 없었던 힘들, 사람들 사이에 놓인 뭔가 끈끈하게 이어져 질퍽거리던 긴장감들, 어쩔 수 없이 자신도 휩쓸리곤 했던 그 기분 나쁜 힘의 정체에 대해 떠올렸다. 그래서 아마 그녀는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혹은 외면하거나 잊기 위해 그토록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약간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에게 그는 그런 흐름으로부터 비켜난 것처럼 보였고, 그것이 그녀에게는 일종의 편안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호의가 오히려 호의로 작용할 수 있었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 시간에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구요. 무서운 사람이에요, 선배는.” 힘이 빠졌지만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였다.


“잘 알죠. 제가 좀 무섭게 생겼죠.” 남자가 말했다.


뜻밖의 말에 여자가 획 고개를 돌렸다. “그거 지금 농담이라고 하신 거예요?”


“풋.” 두 눈이 마주치자 누구랄 것도 없이 웃음이 튀어나왔다.




# So Tender - 세이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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