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릭 Sep 12. 2021

마음에 담아둘 일

남자가 복도를 지나는 것을 본 여자는 미리 마무리해두었던 파일을 살펴본 뒤 개발팀에 전송했다. 담당자에게 검토 후 의견을 첨부해달라는 통화를 한 다음, 여자도 사무실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업무를 마무리하기 전, 남자가 그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다는 걸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네 시 반쯤을 지나는 옥상정원은 고즈넉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여자는 한쪽 모퉁이에 놓인 벤치에 앉은 남자를 발견했다. 서류를 집은 팔을 등받이에 걸치고서 그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한결 풀이 죽은 오후의 태양 아래로 남자의 셔츠와 서류와 종이컵이 뽀얗게 빛났다. 여자는 바닥에 쌓인 햇살을 걷어내듯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런 출현에 놀랄 법도 하지만, 그는 여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무덤덤하게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다가온 여자가 남자 손에 들린 서류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방해된 건가요?”


“아뇨.” 남자가 등받이에 걸쳤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또 뵙는군요.”


“한창 바쁠 때인데 느긋하시네요.” 여자는 벤치를 지나 난관 앞으로 다가섰다. 아래로부터 차오르는 웅성거리는 도시의 숨소리가 고즈넉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죠.” 남자가 말했다.


“지난주 일은 정말 미안해요.” 난간 너머를 바라본 채로 여자가 말했다. 오전에도 남자에게 사과를 했지만, 갑자기 끼어든 직원들 때문에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지 못했던 것이 그녀는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럴 수도 있죠.” 남자가 말했다.


“아... 왜 그렇게 취했던 건지... 그날은 주량을 가늠하질 못했나 봐요. 원래 잘 취하는 편은 아닌데... 제가 실수가 많았죠?” 여자가 물었다.


“실수 같은 건 없었어요.” 남자가 답했다.


남자의 짧은 답에 여자가 획 몸을 돌려세웠다. “그런 식으로 대충 말하지 말아요. 완전히 술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도 못했잖아요. 게다가 절 집까지...” 말끝에 민망함을 느낀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남자가 말했다. “많이 취했던 건 맞아요. 하지만 그냥 얌전히 잠만 잔걸요. 미안해할 일은 없었어요.”


남자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보던 여자가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 조카 거는....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두 손을 내려 보며 여자가 말했다. “또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건지 좀 걱정돼요.”


“중간에 잠깐 깨서 먹어도 되냐고 물어서 제가 그래도 된다고 말했고 그래서 몇 개 꺼낸 거예요. 그리곤 조용히 주무셨어요. 그게 전부예요.” 남자가 말했다.


한없이 태연한 남자의 표정이 왠지 여자를 더 긴장하게 했다. “정말 죄송해요....”


“사과는 이미 오전에 받았잖아요. 그렇게 자꾸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대화를 끝맺으려는 듯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의 체구에 본능적으로 여자의 몸이 움찔했다. 그 위압감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제 동생이 다 뜯어버려서... 음료랑 과자는 제가 다시 사 드릴게요.”


“아니에요.” 남자는 펼쳐 잡았던 서류 페이지들을 되돌려 가지런하게 했다.


“아니에요. 제가 오늘 사드릴게요. 조카가 좋아할 만한 걸 골라줘도 좋을까요? 아무래도 똑같은 게 좋겠죠? 혹시 몰라서 사진도 찍어 뒀어요.” 여자가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아뇨, 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가 자리를 떠나는 걸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여자를 다급하게 했다. “어떻게 그래요. 사드릴게요. 아니, 꼭 사드려야 해요. 퇴근하고 시간 있으세요?” 뭔가 쫓기는 듯한 자신의 태도가 그녀는 마음에 걸렸다. 또 지난번처럼 이렇게 대화가 부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불안했다.


“정말 괜찮아요.” 남자가 짧게 답했다.


“아님, 제가 내일 가져다 드릴게요.” 자신이 좀 억지를 부린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녀는 애써 명랑한 어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남자의 대답은 금방 그녀의 그런 노력마저 허무하게 했다. “아니요.” 남자가 말하는 그 순간, 그의 차분한 음성이 온 공간을 가득 메우는 듯했다. 말투는 다를 바 없었으나 남자의 단호한 표정이 그 목소리를 한층 깊게 울리도록 했다.


“.....” 대답을 하려는 입이 반사적으로 열렸지만 여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렸다. 우두커니 남자를 바라보는 동안, 그의 짧은 대답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마음에 담아둘 일이 아니에요. 전 그만 내려가 봐야겠어요. 그럼.” 남자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에요?” 여자가 소리쳤다. 걸음을 멈췄다가 몸을 되돌리는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며 그녀가 항변하듯이 물었다. “미안해하는 사람에게 꼭 이렇게 하셔야겠어요?”


잠깐 옥상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바람 한 점 없는 하늘 위, 구름을 비켜가는 비행기와 교회 첨탑을 지나는 새들과 멀어지는 빌딩 사이로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이 늦오후 햇살의 빛바랜 색감 속에서 고요를 강조하고 있었다. 원망을 담은 여자의 눈빛과 차분하게 고정된 남자의 눈빛은 각자가 만들어 낸 긴장감에 잠긴 채로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남자가 좀 더 단단해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왜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호의를 바란 적 없어요. 전 사과를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왜 남자가 저런 말을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이런 대답을 하는지 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진씨가 기대한 만큼 제가 호의적이지 않아서 마음이 불편한 거라고 전 느껴져요. 난 좋은 사람인데 왜 좀 더 살가운 태도를 취하지 않느냐고 말이죠. 그동안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진씨의 그런 기대를 충족시켰겠지만, 그랬다는 사실이 저도 그래야 한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어요.” 남자가 말했다.


듣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가 기대한다구요? 대체 제가 뭘 기대한다는 말씀이세요?” 여자는 남자의 말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그의 말들이 자신을 엉뚱한 곳으로 내몰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가진 기대치가 있다는 뜻이에요. 제 생각에 이진 씨는 매사에 좀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그래서 좀 더 친밀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관계들이 풀려나가길 바라시는 것 같은데, 그건 단지 이진씨의 바램일 뿐이에요. 전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셨으면 해요. 자신이 선호하는 걸 누구나 선호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역시도 바램일 뿐이죠.” 말하는 동안 남자는 바위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씀처럼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저라고 생각하신다면, 제 의견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괜찮고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걸 왜 이기적이라고 하시는 거죠?”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자와 처음 커피를 마셨던 카페에서 들었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평균이라는 함정. 자신이 가진 그 기준점이 얼마나 자신을 구속하고 있을지에 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왜 남자가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어디선가 보았던 문구를 떠올린 것이라던가, 대화 중에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라, 마치 남자 자신의 삶 입구에 커다랗게 써놓은 경고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치 안개가 걷히면서 그의 말 뒤에 우뚝 서있던 견고한 성벽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반발심이 솟아올랐다.


그래,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이죠. 누구에게나 기준점은 존재하고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란 말이에요. 그에 따른 행동이 왜 잘못이란 말이죠. 왜 좀 더 부드럽게 대하는 걸 기대하는 게, 그 약간의 호의가 뭐 어때서요. 왜 그렇게 팍팍하게 따지냐고요. 내가 뭘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잖아요. 여자는 남자의 말이 굉장히 편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은 정당할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초점을 피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스스로를 납득시키지도 남자에게 항변하지도 못했다. 자신의 사과를 받아주길 강요하는 것이 되어버린 이런 상황이 한없이 구차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거의 울상이 되어버렸다.


남자는 남자대로 선의로 사과하려는 여자를 다그치는 모습이 되어버린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전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이진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세를 졌다고도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과도한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아요. 전 심플한 사람이에요. 예의상 괜찮다고 말하지도 사실을 과장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녀의 표정을 보던 남자는 잠시 답답한 듯 하늘을 올려보았다. “조금이라도 이진씨를 무시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했다면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지금 제 말이 불편할 수 있겠지만 솔직하게 말씀을 드려야 또 오해가 없을 거 같아서요. 말씀드렸지만 애매한 상황을 만드는 걸 싫어요. 이해하시겠죠?”


남자가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고 있다는 걸 여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런 예의 바른 말투와 태도는 반대로 여자에게는 자신의 태도를 더욱 억지스럽게 느끼도록 했다. 힘이 빠져버린 여자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만 가보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도 단호함이 배어들었다.


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대로 뒤돌아 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 여자는 남자가 앉았던 벤치에 앉아 멍하게 앞을 바라봤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억울함과 분함, 부끄럼과 자책이 차례로 일었다가 서로 뒤섞이며 한껏 고조되었다. 그리곤 다시 천천히 내려앉았다. 감정들이 사라지고 난 뒤, 여자는 이런 불편한 상황이 왜 만들어졌을까 자문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왜 이토록 감정을 소모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는 대학시절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을 떠올렸고, 아마도 그 인상이 다시 회사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녀에게 막연한 기대감을 심어 놓았을 거란 생각도 했다. 남자의 말처럼 그렇게 그녀 자신도 모르는 기대치가 숨어 그녀를 어딘가로 이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여자는 갑자기 상황이 명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띠링- 그때쯤 이메일 알람이 울렸다. 옥상에 올라오기 전 보내 두었던 의 답신이었다. “치... 나쁜 놈, 다신 말 걸지 않을 거야.”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핸드폰으로 얼굴과 머리모양을 확인한 다음, 사무실로 향했다.




# Plastic Plants - Mahalia

매거진의 이전글 색깔별로 나란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