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침대는 벌써 햇살로 가득했다. 눈부심 때문에 여자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파묻었다. 두통과 속쓰림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그 아래로부터 어렴풋한 장면들이 뒤섞인 채 떠올랐다. “설마!” 짧은 비명과 함께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서는 여동생이 소파에 기대 TV를 보고 있었다. 방을 뛰쳐나온 여자가 급하게 물었다. “나, 어젯밤에....” 하지만 까만 뿔테 안경 너머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생의 호기심 어린 눈빛은 이미 충분히 답을 짐작하게 했다. “아....” 여자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잠깐 잊었던 두통이 미간을 파고들었다.
“완전 가관이었지.” 동생은 리모컨으로 소리를 줄이고는 비스듬하게 몸을 고쳐 세웠다. “별꼴이네, 갑자기 웬 술 이래? 엄마 아빠도 봤어야 했는데... 정말 아까운 장면을 놓쳤어.” 동생은 손에 든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젤리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아... 속 쓰려.” 여자는 손끝으로 명치를 누르고는 힘없이 식탁으로 걸어갔다. 물병을 보고 물을 한가득 들이키고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그녀는 이마를 식탁에 대고 엎드렸다. 그렇게 가만히 여자는 지난밤의 기억을 되돌려 보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차 안에서 정신줄을 놓아버린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 편의점이 보였던 갓길에서 자신을 깨우던 남자의 얼굴. 그가 시킨 대로 전화를 걸었던 기억. 그리고 전화기 너머 뭐라 소리치던 동생의 목소리. 어느 순간 다시 도로 위였다가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나타난 동생의 얼굴. 잠깐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가, 그때부터 허우적거리던 느낌과 머리 주변에서 윙윙거리던 잔소리. 또 갑자기 어느 순간 위로 올려다보이던 남자의 얼굴. 그 단단해 보이던 턱 선과 주변으로 흔들리던 익숙한 계단의 모습들.... 그 뒤로는 그냥 느낌만 있을 뿐 뚜렷하지 않았다. 뭔가 신나는 기분이었다가 갑자기 울컥거렸던 기분... 그 기분이 아직도 명치 어디쯤에 걸려있는 것만 같았다.
“근데, 그 남자는 누군데?” 동생이 식탁으로 다가와 턱을 괴고 앉았다. “한 밤 중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그 사람이 차 안에서 쓱 나와서 두리번거리는데, 처음엔 무슨 조폭인 줄 알았다니까. 이건 뭐지, 사채라도 쓰고 붙잡혀 있는 건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구.”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다.” 여자는 여전히 식탁에 얼굴을 붙인 채로 말했다.
“뭘 그렇게 퍼마신 거야?” 동생이 물었다.
“퍼마시긴 뭘 퍼마셔? 너무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차를 타고나서 나도 모르게 취기가 올랐나 봐. 아아... ” 여자가 신음소리를 내며 식탁에 이마를 굴렸다.
“쯧쯧.... 나이는 못 속여. 그렇게 늙어가는 거지.” 동생이 키득거렸다.
“저게 그냥.” 여자는 주먹을 들어 보였지만 이내 힘없이 무너졌다.
“혹시 그 남자, 언니 따라다니는 사람이야? 한동안 조용하더니 이거 또 시작인가... 홍홍...” 동생이 그 특유의 괴상한 추임새를 넣더니 금방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흠... 근데 또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단 말이지.... 정말 사채업자 같은 거 아냐?” 동생이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젤리를 또 하나 꺼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여자가 갑자기 획 고개를 들더니, 동생을 노려보며 짜증을 냈다. “야! 네가 데리고 왔어야지! 넌 대체....”
“뭐했냐고? 거참... 우리 언니 분께서 아주 기억을 대충 하시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동생이 대꾸했다. “나야 당연히 그러려고 했지. 근데, 축 늘어져서는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가 어떡하냐. 하는 수 없이 부탁한 거지... 정확하게는 내가 부탁했다기보다 그 사람이 보다 못해서 데려다 준거야. 안 그랬음 자매가 길바닥에서 완전 코미디를 찍었을걸. 아니, 고군분투 어드벤처라고 해야하나...” 여전히 인상을 쓰고 노려보는 여자에게 동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 언니가 뭘 잘했다고 그렇게 봐?” 동생은 오물거리던 입에 좀 더 힘을 줬다. 금방 풀이 죽어버린 여자는 뭐라 대꾸도 못하고 길게 한 숨을 내 쉬었다.
“와... 근데 그 사람도 대단하더라.” 손등으로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동생은 감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업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떡 두 손으로 들고서 집에까지 단번에 왔다니까. 언니도 작은 편은 아니잖아. 무슨 아기도 아니고. 3층 계단을 이렇게.” 동생은 두 손을 나란히 하고는 드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누구냐고?” 동생 눈이 반짝였다.
“아... 몰라.” 여자는 또 한숨을 내 쉬며 힘없이 식탁 위로 엎드렸다. 다음 주 그 남자와 마주칠 생각만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글쎄 누구냐니까?” 동생이 여자의 어깨를 흔들며 재촉했다.
“지지난 달 파견 나온 직원.” 억양 없는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파견 직원? 근데?” 동생이 물었다. 그리곤 잠깐을 못 기다리고 다시 물었다. “근데 그 사람이 왜 언니를 집까지 데려다주는데?”
“그냥 회식 끝나고 가는 길에 얻어 탄 거야.” 여자가 대답했다.
“미쳤어? 그렇게 취해서 아무 차나 함부로 타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지? 응?” 엎드린 여자의 머리 위로 동생이 고개를 밀며 소리 높였다.
여자가 힘없이 대꾸했다. “아, 시끄러. 내가 바보니... 탈만하니까 탔지. 그리고 취해서 탄 게 아니라, 타고나서 취한 거라니까. 그 사람도 대학 때 봤던 사람이고. 같은 수업 들었던 적이 있어.”
“언니네 학교? 같은 과야?” 놀란 듯 동생이 물었다.
“아마 공대였을 걸. 더 묻지마! 그냥 얼굴만 알았던 사람이니까. 아... 속 쓰려. 뭐 없니?” 여자가 다시 명치를 눌렀다.
여자의 신음소리엔 아랑곳없이 동생이 신기하다는 투로 눈알을 굴렸다. “의외네. 딱 체대나 운동부, 이런 데서 완전 운동만 했을 거 같은데. 유도나 태권도 막 이런 거 말이야. 나름 반전 있는 캐릭터였네. 홍홍.” 동생은 다시 젤리를 하나 입에 넣었다.
“평균적인 범위 바깥에 있다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여자가 남자의 무덤덤한 어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생이 대꾸했다.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것아, 외모로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야. 그러다 언젠가 낭패 보는 수가 있어. 아침은 뭐야?”
“뭐래... 아는 게 외모밖에 없으니 일단 그걸로 판단하는 거지.” 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로 갔다. “대충 북엇국 끓여봤는데, 데워 줘?” 여동생을 손을 씻고 그릇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니. 그냥” 동생이 올려둔 식탁 위의 젤리 봉지가 뒤늦게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근데 이건 왠 거야....?”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그녀가 봉지를 집어 들었다.
동생이 식탁 위를 한번 쳐다보곤 냄비 뚜껑을 열며 말했다. “어젯밤 언니가 준거잖아.”
“뭐?” 여자가 짧게 소리쳤다.
“뭐랬더라...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서 특별히 무슨 비밀장소에서 가져왔댔나... 세상 유치한 그 멘트는 뭐냐.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저딴 게 다 뭐야.” 동생이 국자로 소파 근처를 가리켰다.
거실 바닥에 널 부러진 알록달록한 색상의 봉지들을 여자는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에....” 너무 놀라서 그녀는 자신의 입이 중얼거리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저런 애기들이나 먹는 걸 대체 왜 산거야? 갑자기 소꿉놀이 시절이라도 그리웠남? 그리고 기억은 나? 그때 그 사람을 보고 어찌나 깔깔거리던지... 그러면서 또 우는 건 뭔데? 언니 주사 있었어? ” 동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그 한밤의 민망함은 다 내 몫이었지. 그리고 언니 건 냉장고에 뒀다.”
동생의 이야기에 여자는 순간적으로 냉장고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곧,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내가 미쳐....” 두 번째 칸 제일 앞줄에 보란 듯이 곰돌이 모양의 주스병들이 나란히 색깔별로 서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투덜거리는 동생의 말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자기 거라고 어찌나 꼭 붙들고 있던지. 옷 벗기느라고 내가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아? 앞으로 나 술 마신다고 어디 구박만 해봐. 아주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