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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Aug 22. 2021

각자의 선에서

똑똑 -  남자가 주차권을 챙기려는 사이, 창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였다. 차창을 내리자 그녀가 말했다. “가는 길까지만 부탁할게요. 선배.” 여자는 굳이 말끝에 선배라는 호칭을 붙였다. 술기운이 오른 그녀의 얼굴은 거절할 테면 하라는 표정이었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머릿속을 헤집는 어지럼증에 여자는 고개를 시트 위에 붙였다. 그렇게 잠시 그녀는 술기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남자로부터 아무런 대꾸가 없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제 부탁이 무례한 건가요?” 당돌한 여자의 눈빛 위로 금방 남자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벨트 매세요.”


출발하고도 꽤 오랫동안 차 안은 조용했다. 순환도로 진입구간에 이르면서 점점 대기기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나직한 자동차 엔진 소리와 빨간 미등의 행렬 너머로 흔들리는 도시의 불빛들만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었다.


가만히 정면만 응시하던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술을 못 마신다고 하더니, 정말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더군요. 의외로 거짓말도 하시네요.” 회식 동안, 남자는 줄곧 음료수만 손에 붙잡고 있었을 뿐, 안주도 거의 손대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몇 번 주점에서 본 적 있어요.” 여자가 말했다.


“못 마신다고 하진 않았어요. 안 마신다고 했지.”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남자의 대답이 말장난인가 싶었지만,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녀뿐 아니라 아마 그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술을 못 마신다는 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대표가 술을 권했을 때,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거절하는 모습에 더 이상 아무도 그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2차 이야기가 나올 때쯤 남자는 자연스럽게 열외가 되었고, 그녀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자리를 빠져나왔던 것이다.


“왜요?” 여자가 물었다.


“그냥 마시고 싶지 않아서요.” 남자가 말했다.


“왜요? 아주 잘 마시는 걸로 아는데?” 여자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새벽에 대학 주점 거리에서 남자가 친구를 메다시피 끌고 가는 걸 본 적도 있었다. “오해는 말아요. 학교 후문에 있는 주점에서 몇 번 봤어요. 갈 때마다 보이던데요. 그 체구가 눈에 안 띌 수가 없잖아요.”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그땐 그랬죠. 어릴 때니까.” 남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왜요?” 여자는 좀 더 힘을 주어 물었다.


“변하는 것도 있는 법이죠.” 남자는 짧게 대답하곤 다시 말이 없었다.


저 덤덤한 목소리. 마치 꼬치꼬치 캐묻는 아이에게 답하는 듯한 남자의 말투가 여자는 답답했다. 기분 나쁜 두통에다 매스꺼움까지 뒤섞이고 있었다. 바싹 말라가는 입안에 혓바늘이 돋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어냈다. “지금 제가 주정 부린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자는 속으로 자신이 주정을 부리고 있는 게 분명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남자는 빠르게 여자를 한번 살펴보고는 다시 차선을 주시했다. 여자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과 선을 긋나요? 어차피 오래 볼 사이가 아니라서요?”


직원들 모두가 잔을 부딪치며 이번 성과를 자축하는 동안, 남자는 적당히 호응하지만 휩쓸리지 않았다. 여자의 눈에 남자는 그 무리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경계선의 테두리에 걸쳐 선 채로 의도적으로 관망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그때 여자는 회사 사람들과 선을 그은 듯한 남자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그녀 자신을 대입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냥 흔한 회식의 모습으로 넘길 수도 있을 광경에 갑작스런 짜증이 섞여버린 건, 약간은 그날따라 계속 그녀의 옆자리에 붙어 농담을 걸어오던 김대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남자를 의식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있느라 회식 내내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전방과 백미러를 살피던 중에 곁눈질로 여자의 표정을 살피다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여긴 우리 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사 중 하나인걸요. 실적도 좋고, 성장성도 커서 특별히 신경 쓰는 곳이에요. 다만.” 아까부터 마른침을 삼키는 여자의 모습을 본 남자가 말을 멈추고 한 손으로 글러브박스를 가리켰다. “앞에 물 있어요. 필요하면 꺼내 드세요.”


“어머!” 여자가 무심코 박스를 당겼다가 소리쳤다. 생수병과 함께 안에 든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알록달록한 색깔들. 유아틱한 포장의 주스, 미니 소시지, 초콜릿, 젤리, 사탕, 내용물을 알기 힘든 과자 등등. 여자는 다리 위에 떨어진 곰돌이 모양의 주스병을 들고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여자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하나씩 집어넣으며 말했다. “취향 독특하시네요....”


남자가 경쾌하게 코웃음 소리를 냈다. “조카 거예요. 일종의 비밀상자랄까. 형수님이 못 먹게 하는 것들.” 운전에 집중한 채로 남자가 대답했다.


물건들을 다시 채워 넣고 나서야, 여자는 옆에 남겨두었던 생수병을 열어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셨다. “아주 나쁜 삼촌이군요.”


“누구에게나 약간의 이탈은 필요한 법이죠. 현실과 욕구가 타협할 완충지대 같은.” 피식, 남자가 다시 웃었다.


갑작스런 작은 상황 뒤에 조금 전까지의 무거운 분위기가 생뚱맞게 느껴졌다. 여자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가득 생수를 들이켰다. 자동차는 어느새 확 트인 도로 위를 시원하게 달리고 있었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로 도시를 감아 도는 빛들의 행렬이 마치 우주공간을 여행하는 별들처럼 느껴졌다.


“술기운에 오가는 말들은 언제나 어색해요.”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창 술을 마실 때는 항상 끝까지 남아 있었어요. 친구 간의 의리일 수도 있고, 선후배 간의 도리일 수도 있고. 근데 평소엔 꺼내지 못하던 그런 말들은,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술기운에 과장되기 쉽잖아요. 전 술을 먹어도 멀쩡한 타입이라서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게 좀 어색했어요. 흠... 게다가, 술 취한 사람들 뒤처리란 것도 보통일이 아니고.”


깜빡이를 넣고 도로를 살피던 남자가 차선을 바꾸고 다시 말을 이었다. 자동차가 좀 더 속도를 내며 불빛들 사이를 미끄러져갔다. “어쨌든, 그게 사적인 관계에서는 그닥 상관없는데, 사회생활에서는 뭔가 난처한 상황들이 생기더군요. 분위기에 쓸려 비공식적인, 불쾌하면서 암묵적인 동의 같은 것들이 생겨날 수도 있고, 본의 아니게 착각이나 오해를 만드는 경우도 흔하고.”


사실, 남자의 말은 여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문제들, 스스로에게도 불만이었던 많은 인간관계들은 원치 않는 각자의 선을 지켜주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들이었다. 그래 놓고는 지금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그런 암묵적인 룰을 가지고서 남자에게 따져 드는 우스꽝스런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런 건 정말이지 그녀가 원했던 모양새가 아니었다. 잠시 가벼워졌던 기분이 금방 가라앉았다. 남자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또, 제가 그 분위기에 동조하지 못했을 때, 상대방이 나에 대해 느낄 난처함, 어색함. 전 그게 불편해요. 제 감정이야 제가 감당하는 거지만 상대방의 것은 제 것이 아니니까요. 그건 저나 상대방에게나 좋지 않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중요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가능하면 사적이거나 감정적인 선을 유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이게 누구에게나 옳다거나 통용될 수 있는 방식이란 생각은 안 해요. 그냥 제 스타일인 거죠. 그리고, 여기 직원들과 사귀러 온 것도 아니잖아요. 일은 일이어야 하고, 제 나름대로 그것에 가장 좋은 방식을 유지하려는 거라고 이해해 주세요.”


여자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남자의 말을 부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약간은 그녀 자신을 염두에 둔 이야기일 거라고 여자는 짐작했다.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감정이, 그러니까 그에 대한 일종의 반감이 지극히 사적이라는 사실로 분명하게 다가왔고, 그때 그런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행동은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꽤나 선을 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이는 여자가 자신의 술기운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도 지금과 똑같은 생각과 감정일지, 지금과 똑같이 말을 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묻고 있었다. 갑갑하고 불만족스런 그때의 상태에 대해, 여자는 술이 깬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자고 일단 판단을 미뤄두었다.


이런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자, 여자는 어쩐지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말소리가 자꾸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다시금 어지럼증과 함께 매스꺼움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했다. 마음을 진정시킬수록 불현듯 밀려오는 야속함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 고요한 - 옥상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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