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후, 회의실에 혼자 남은 남자는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렇게 훌쩍 가버리는 건 실례 아닌가요?” 갑자스런 목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직원들과 함께 나갔던 여자가 어느샌가 돌아와 있었다.
남자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여자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지난주.”
살짝 깨문 여자의 아랫입술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말이 없어서요. 불편해 보여서.” 말하면서 여자의 눈이 동그래지는 게 보였다.
“뭐든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여자가 말했다.
“.....” 지난주 카페에서의 상황이 남자의 머리를 스쳤다. 여자는 지난번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그쵸? 대답하기 애매하죠?” 남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가 다시 말했다.
물음인 건지, 동의를 구하는 건지 모를 여자의 말을 잠깐 생각하는 동안 잠시, 느슨하게 풀린 남자의 넥타이 아래로 커다란 손에 붙잡힌 연필이 그의 허벅지 위에서 까딱거렸다.
남자가 말했다. “불편해 보이면 그건 불편한 거죠. 그건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눈에 보이는 거 아닌가요?” 그는 테이블에 흩어진 서류들을 챙겨 홀더에 끼워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사에 따지세요?” 반음쯤 높아진 여자의 목소리가 남자의 귀를 파고들었다.
남자가 들고 있던 연필까지 홀더에 끼워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지 말고 할 말을 하세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눈앞에서 훌쩍 솟아오른 남자의 키에 움찔했으나, 여자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턱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한테 화났어요?” 말하는 그녀의 미간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아뇨. 제가 왜 화를 내요.” 남자가 말했다.
한결같은 표정과 무덤덤한 말투가 여자는 답답했다. “그때 수작 거는 남자 취급했다고 불쾌해하셨잖아요?”
남자가 갸웃거리더니 답했다. “네, 그런 건 누구에게나 그렇죠. 근데 저 화 안 냈어요. 그냥 제 생각을 말한 거뿐이지.”
너무 담담한 남자의 태도에 여자는 말을 하면서도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농담 몰라요? 그냥 이야기하다가 그런 농담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놓인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작고 가느다란 여자의 손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농담이라고 생각이 안 담기는 건 아니죠. 오히려 무의식 중에 하는 말에 진심이 담길 가능성이 높으니까.” 남자가 말했다.
“그런 억지가 어딨어요?” 여자는 약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한쪽 겨드랑이에 서류 홀더를 끼고 선 남자와 마주한 상황이, 마치 자신이 길을 막고 서서 따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그녀가 생각했던 모양새가 아니었다.
“억지라뇨. 프로이트는 그 아이디어로부터 정신분석학이란 영역을 개척했는데요.” 남자의 대꾸에 곧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뭐라구요!” 가지런하게 넘겨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여자의 목 뒤에서 흔들렸다.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여자가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그렇다 쳐요. 아니 그 무의식의 가능성까지 제가 사과할게요. 됐어요?”
여자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남자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보기와 달리 어수룩한 그녀의 모습이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그 말이 실제가 되는 상황이 불쾌하다는 거고, 화가 난 것도 아니에요. 전 단지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남자가 말했다. 그때 여자는 알 수 없었겠지만 그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무덤덤한 건지 진지한 건지, 건성인 듯 성실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여자 입장에서도 괜히 상황이 우스워졌다. “매사에 그렇게 정확하세요?” 여자가 물었다.
“정확하다기 보단 그냥 애매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걸 싫어할 뿐이에요.” 남자는 여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걸 보고 있었다.
“제가 불편해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여자가 물었다.
“아뇨. 내가 왜 불편해요?” 남자는 여자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생각처럼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굳이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부드러운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정색요? 아닌데. 전 그냥 제 생각을 말한 거뿐인데요.” 남자가 느슨했던 넥타이를 조여 매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그 부분은 제가 사과하죠. 그럼 저도 된 거죠?” 순조로운 대화의 마무리에 만족했는지 남자의 입에 살짝 미소가 서렸다.
“네, 뭐....” 여자가 말꼬리를 흐렸다. 엉겁결에 대답은 했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남자에게 들으려 했던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을 여자는 생각해내려 했다.
남자가 헛기침소리를 냈다. 빤히 여자를 바라보던 그는 손가락으로 살짝 입구 쪽을 가리켰다. “아, 네... ” 여자는 남자가 자신이 길을 비켜주기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그럼.” 남자가 지난번처럼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를 지나쳤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자에게 지난번처럼 어딘가 분한 기분이 밀려왔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 그냥 자신의 생각을 말한 거뿐이라는 그 말이 겹쳐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느꼈던 석연치 않은 느낌, 그 분하고도 야속한 마음의 정체를 여자는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남자의 말들과 태도들이 진심임을 여자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난주 그냥 그가 했던 말에 혼자 얼어서 아무 말도 못 했던 자신,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그날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 채로 뭔가 억울한 심정으로 보낸 그녀 자신에 비해, 정작 남자는 불쾌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남자는 정말 그냥 자신의 생각을 말한 거뿐이라는 그 사실이 여자는 분했다.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소비는 순전히 허깨비를 향한 것이었고, 어쩌면 그녀 자신이 남자에게 허깨비와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그녀를 서럽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