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결국 선배도 제가 맘에 있으니까 그랬던 거잖아요? ” 여자가 말했다.
그때 왜 불쑥 그런 말을 꺼냈던 건지, 여자는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왠지 모를 편안함, 아마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안전하다는 느낌이 자신도 모르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농담을 꺼낼 여유를 만들었던 것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그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에게 던져보는 물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사소한 질문은 그녀 삶의 일상적인 흐름에 작은 충격을 일으켰다. 작지만, 단순한 파도의 흔들림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지도 모를 방향타에 더해진 힘.
하지만, 그때 반짝이는 여자의 눈빛을 남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마치 개가 흔드는 꼬리의 움직임이 고양이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처럼, 그때 여자의 말투와 표정, 그 시큰둥하게 툭 던져지는 단어들과 생글거리는 눈빛이 남자에게는 은근한 경계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니까, 무심코 던진 그녀의 질문이 남자에게는 타인의 행동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는 인간의 고약한 습성을 떠올리게 했다. 사실, 그가 느낀 감정 역시 그런 습성의 범주에 속한 것이었지만, 남자는 그것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남자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뭐든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네?” 여자는 생각지 못한 남자의 물음이 당혹스러웠다. 그는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감정이 담겼다기보다는 깊은 생각 속으로 잠겨버린 듯한 눈동자. 그곳에서 남자가 자신을 끌어당긴다는 기분이 들자, 여자는 약간 소름이 돋아나는 걸 느꼈다. “그게 무슨....” 침묵을 견디다 못한 여자가 입을 열었지만 곧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현상은 평균적인 범위에 대부분 몰려있긴 하지만, 그 바깥에 있다고 해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남자가 말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여자의 머릿속은 이미 낯선 상황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들었던 편안한 기분은 오히려 평소의 침착함까지 함께 거둬 가버렸다. 그녀는 겨우 자신의 상태를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시골에서 장작이나 팰 것같이 생긴 사람에게선 전혀 짐작도 못한 말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스스로 이쁘다는 걸 잘 알 테고, 그런 자신에게 남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질지 충분히 경험했을 거란 것도 아주 잘 알겠어요. 하지만 그런 경험만으로 제 선의를 함부로 단정 짓는 건 불쾌하단 뜻이에요.”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자신이 던진 질문과 남자의 대답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려 애썼다. 아울러, 왜 자신이 평소와는 다르게 들떴던 것인지, 불쑥 던진 말속에 담긴 자신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여자의 표정을 살피던 남자가 다시 말했다. “그쪽에 딱히 관심도 없고 수작 부릴 생각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다시 저번 같은 상황이 생겨나도 똑같을 거예요. 누군가는 도와줘야 하고 그게 나밖에 없다면 말이죠.” 차분한 말투로 또박또박 말하던 남자는 이 부분에서 딱 한번 말을 머뭇거렸다. “이런 말 굉장히 뜬금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앞으로도 가끔씩 마주칠 텐데, 또 오해할까 봐 분명히 해두려는 거예요. 됐죠?”
여자는 가슴이 얼얼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때까지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말을 기다렸지만 여자가 가만히 자신의 잔만 바라보고 있자, 남자는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를 들이키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는 사는 거 맞죠?”
그의 등 뒤로 유리창을 넘어오던 오후의 늦은 햇살이 가려지자, 남자의 커다란 키와 덩치가 한층 두드러져 보였다. “네.” 여자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럼.” 남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남자가 떠나고도 여자는 한동안 몸을 움직이질 못했다.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가운데 뒤늦게 가슴이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한편으론 분하면서 또 한편으론 시원했다. 그 낯설고도 설레는 기분이 묘했다. 뭔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벽 한쪽이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그 기분의 정체가, 지금껏 전혀 기대치 않았던 어떤 감정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면했던 삶의 비밀이 오랫동안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남자에게 불쑥 던졌던 자신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어쩌면 무심코 던진 실언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뭔가를 확인하고 싶은 자신의 진심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여자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저 멀리 구름 끝에서부터 노랗게 물이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