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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oting the Pulitzer

그저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by 글쟁이

저널리스트라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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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성적표의 장래희망 칸은 항상 이 단어로 채워져있었다.


1학년 장래희망 : 기자

2학년 장래희망 : 기자

3학년 장래희망 : 기자


내가 기자의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 바로 2014년, 중학교 3학년 때 큰 충격을 안겨줬던 한 사건이다. 전 국민이 함께 슬퍼하고 기도했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이다.


당시 많은 언론사에서 사고 이후 상황에 대해 많은 보도를 이어갔다. 그들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사고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전달했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제대로 된 팩트 체크 없이 신속하게 모든 정보를 전달하면서 유가족들과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렸고, 상처를 안겨주었다. 결국 많은 국민들이 언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 역시 언론의 책임감에 대해 큰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실망감은 곧 다른 의미로 바뀌었다. 단순히 실망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 내가 생각하는, 국민들이 생각하는 정직한 언론, 책임감 있는 언론의 중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대학에 진학한 나는 미디어에 대한 많은 강의를 들었다. 사회 속에서 미디어가 가져야 하는 책임감과 자세, 팩트체크의 중요성, 언론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오보와 가짜 뉴스(Fake News)의 차이'에 대한 글을 쓰며 언론의 모습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만들어갔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

사익이 아닌 공익을 추구하는 것

항상 물음표를 가지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언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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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Pulitzer prize)은 미국의 신문 언론, 문학적 업적과 명예, 음악적 구성에서 가장 높은 기여자로 꼽히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언론인들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퓰리처상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주저함 없이 카메라를 들었던 이들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훈장들을 만나러 이곳에 왔다.


이곳에 있는 많은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가장 크게 중심을 둔 부분은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는가?'였다.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이 사진을 찍은 이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발짝, 한 발짝 옆으로 이동하며 사진을 소중하게 감상했다. 일부러 사진을 처음 만났을 때 옆에 쓰여있는 설명을 보지 않고 온전히 사진에 담긴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베트남 전쟁, 시리아 내전 등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의 사진, 누군가의 욕심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누군가의 사진, 하나의 생명이 시작되는 사진 등 많은 사진들이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모든 사진들을 마주한 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어른들의 욕심으로 인해 상처받는 이들은 힘없는 아이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연 지금의 순간까지 어른들은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속죄하며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세상은 권력, 돈, 명예라는 마치 사람의 전부인 것 같아 보이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전쟁', '약탈', '혐오', '폭력'이라는 시커먼 도구를 이용한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여전히 많은 아이들은 상처받고 주저앉으며 무너져 간다. 아무런 힘도 없는 이들은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아파해야만 한다. 이들의 목소리를 찾아 듣는 것, 이들의 삶을 작은 검은 상자 안에 새겨 넣는 것, 진정한 저널리스트로써 해야 하는 사명이자 의무다.




그저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과 함께 퓰리처상 수상자들이 남긴 말들도 마음을 울렸다. 특히 대부분의 수상자들이 공통적으로 남긴 말이 있다.


'그저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저널리스트에게 '카메라'라는 조그만 검은 상자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저 기록을 남기고 추억을 회상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그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기록하고 보여주는 사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로 인해 누군가는 바닥을 차고 일어날 수 있고, 누군가는 '정의'를 향해 마음을 돌리며, 또 누군가는 소중한 무언가를 지킬 수 있다. 조금이나마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저널리스트들은 오늘도 세계 각지에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들의 렌즈가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바로 누군가의 죽음을 담는 순간이다. 이에 대해 한 수상자는 이렇게 말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소통하는 기자가 되려 하지만

때로는 카메라 렌즈에 그저 눈물이 가득 찹니다.'


'존중은 죽어가는 이에게 세상이 줄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방치된 채 홀로 누워있는 한 여성을 어떻게 존엄성 있게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나는 세상이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없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특히 누군가의 마지막을 수없이 볼 것이다. 그것도 다수의 마지막을 말이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본다는 것. 그리고 기록한다는 것.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또 다른 고통이고 트라우마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셔터를 누른다. 렌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떨리는 손을 붙잡으며 그들은 숭고한 '찰칵'을 만든다.




그들은 떠났지만 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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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들 중 다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이제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그들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셔터를 눌러 세상을 향해 소리쳤던 그 한 장은 여전히 우리 앞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나는 전시회 관람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떠나간 이들이 과연 끝내 남기고 싶었던 사진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전쟁 중 총에 맞고 쓰러져 있는 청년의 사진? 아니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의 사진? 아니다. 내가 고민한 결과는 '행복'이다.


배고픔으로 쓰러져갔던 마을의 아이들이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음식을 먹고 웃으며 학교에 가는 모습


전쟁 중 누군가를 향해 총을 겨누던 청년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하는 모습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누군가의 행복을 담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남겨 함께 추억하고 미소 짓게 만드는 일 역시 사진을 찍는 사람의 사명이자 의무일 것이다. 많은 이들의 아픔보다 많은 이들의 웃음을 남기는 저널리스트가 많아지는 그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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