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희끗한 새치가 드문드문 보이는 남자는 의혹에 찬 내 시선은 무시하고 목소리를 계속 높였다. “이봐 젊은이. 내 말 듣고 있나?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한옥마을에서 예정된 친구와의 만남까지 시간이 남아 근처 탑골공원에서 시간이나 때울 겸 점을 봐준다는 노점으로 들어온 것이 화근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자신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사주나 신점 따위에 의존하게 되는 것처럼, 나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취업이 되지 않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리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 '사주팔자, 궁합, 신점' 따위가 적힌 플래카드가 달려있는 노점으로 들어왔다.
노점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말을 걸어왔다. “흠. 3년 내로 AI의 특이점이 오겠구먼. 또... 미국과 중국이 유인화성탐사를 5년 안에 성공할 것이야.”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나는 표정을 구기며 "네?"라고 했다. 내 당혹감을 눈치챈 그는 자신이 아주 먼 미래밖에 보지 못한다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자신이 그런 미래들을 예언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가 2079년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아 조금 무섭긴 했지만 듣다 보니 나름 재미있어서 몇 가지를 더 물어봤다. 그는 미국과 중국의 우주탐사경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뻔했지만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간 누군가가 이를 막아내었고, 본인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역사대로 여기도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했다. 존 코너인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점점 재밌어진 나는 미래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결국 이 노점에 취업이 언제쯤 될지 듣고자 들어온 소기의 목적은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십 여 분정도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불쑥 노점의 가리개를 열며 젖히며 들어왔다.
“아이, 아버지.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계셨어. 여긴 김영감님 사주 공부하시는 노점이잖아요. 남의 노점에 마음대로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아들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오자 아버지라고 불린 미래에서 온 사람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곤 나한테 속삭이기 시작했다. “저 놈은 과거의 역사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는 조직인 ‘타임패트롤’ 소속이야. 나를 잡으러 따라왔지.” 아들은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네네. 연행합니다. 당신은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라며 미란다의 원칙을 고지하며 익숙하게 아버지를 끌고 나가려 하는 순간, 여태까지 공허하던 노인의 눈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아들아, 잠시만 놓아보렴.”
갑자기 바뀌어버린 호칭에 아들과 나는 놀랐고, 노인은 말을 이어나갔다.
“미안하네. 종종 정신이 흐려져선 아무 말이나 하곤 해. 그런데 말이야. 여기 김영감네 노점에 앉아 있다 보면 세상 풀 죽은 표정을 한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많이 보이더군."
노인은 반짝이는 눈빛을 하곤 말을 이어 나갔다.
"취업이 힘들다, 결혼은 어떻게 해야 하나, 집은 언제 살까.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뭔가 힘이 되어주고 싶어 가끔 정신이 멀쩡한데도 2079년에서 왔다는 둥, 타임패트롤이라는 둥 미친 소리를 하곤 해. 근데 그런 젊은이들을 많이 보다 보니 공통점이 하나 있더라고."
멀쩡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노인의 말은 점차 빨라졌다.
"모두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한다네. 그런데 말이야. 자네의 인생은 자네 것이 아닌가? 왜 남보다 돈을 못 벌고, 내 애인이 다른 사람의 애인보다 못하다고, 친구의 연봉은 얼만데 나는 얼마라고 굳이 비교하며 힘들어하는 걸까.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네 스스로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게.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네.”
장황한 말을 마지막으로 노인은 또다시 공허한 눈빛이 되어 아들에게 연행되어 노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여기가 생판 모르는 김영감님의 노점인 것도 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미래에서 온 친구가 아니라 내 미래를 밝혀주기 위해 온 친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