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등 간소화 서비스

저승타그램에 올릴 인생 네 컷

by 글쟁휘

급제동하는 타이어가 아스팔트 노면을 긁으며 갈리는 소리, 브레이크가 휠에 긁히는 끼이익 소리, 빠앙 하는 큰 경적소리가 불협화음처럼 시끄럽게 귓전을 때린다. 예상하지 못한 사고였다면 공포가 몰려왔겠지만, 오히려 나는 목적을 완수한 것처럼 편안히 눈을 감고 다가올 다음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차에 치일 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으레 "쾅" 따위의 소리가 나지 않나? 하지만 자동차 보닛이 구겨지며 내 뼈와 장기를 뒤틀어 부술 때 나는 소리는 "빠각"에 가까웠다. 또 "털썩"하는 예쁜(?)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서 쓰러질 줄 알았으나, 사지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십여 미터를 날아간 몸이 바닥에 부딪힐 때 나는 소리는 "뻑"에 가까웠다. 소설은 유려한 거친 소리였지만, 현실은 보정 하나 없는 된소리였다. 원했던 바긴 하지만, 너무 아프잖아 이건?


일톤이 넘는 쇳덩이와 부딪힌 순간 현실감각은 사라졌다. 공중에 떠서 날아가 땅에 부딪혔다는 느낌보다는 땅이 강하게 날아와 부딪힌 기분이었다. 다만 땅은 매우 느리게 날아와서 부딪혔다. 마치 <영원같이 느껴지는 찰나>라고 표현할만한 모순의 순간이었다. 현실감각이 사라진 대신, 육감 정도로 일컬어지는 상상의 감각이 극대화되었다. 땅에 가까워지면서 자그마한 사탕 조각을 먹이로 물고 가는 개미와 눈이 마주쳤다고 하면 누가 믿어줄까? 개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극대화된 감각들은 이건 죽음이 아니라고 댕그랑거리는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나는 죽음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살아버렸다는 것에 묘한 패배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 순간, 시공간이 찌그러지고 주변이 빙빙 소용돌이쳤다.


소용돌이치던 시공간은 쌕쌕거리며 바람을 가르는 파열음을 내는 그네가 되었다. 보기만 해도 뜨끈뜨끈해 보이는 은빛 미끄럼틀,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아이들. 묘하게 익숙한 분위기가 풍겨오는 느낌에, 이리저리 둘러보니 흙바닥에 바짝 엎드려 배를 깔고 뭔가에 집중하는 아이가 보였다. 저건 분명, 집에 있던 낡은 앨범에서 본 내 모습이었다. 과거에 와있는 건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놀이터, 여기는 1998년 한여름의 주공아파트 놀이터였다.


저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아니, 지금 저건 뭘 하고 있는 거였더라?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저 사건은 <빨래바구니에 내가 들어가서 누나와 함께 무릎 꿇고 손을 드는 벌을 받는 사진>의 원인이었다. 누나가 볼록렌즈로 햇빛을 모아 종이를 태울 수 있다며 유치원에서 배운 지식을 뽐내며 놀이터로 가서 실험해 보려고 내 손을 붙잡고 나간 날이었을 것이다. 저러다가 일회용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러 나오던 엄마한테 들켜, 불이 났으면 어떻게 할 뻔했느냐며 등짝 스매싱(?)을 당하고 그 고무대야에서 벌을 받으며 사진을 찍은 날이었다.


그것보다, 이건 주마등인가? 보통 주마등은 죽음 직전에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중요한 기억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나?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정확한 상태는 잘 모르겠지만, 살아있다면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고, 죽음 직전의 주마등이라기에는 딱히 충격적이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기억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계속 지켜보다가 공연히 '어린 나한테 말을 한번 걸어볼까' 따위의 생각이 났을 때였다. 누군가가 내 마음속을 읽었는지 뒤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걸진 말게나."

이 생경한 광경에서 누가 말을 건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본 뒤쪽에는 검은색 슈트를 입고 검은 중절모를 들고 있는 중년의 아저씨가 있었다. 저건 분명 저승사자다. 저렇게 검은색 투성이인 사람이 저승사자가 아니라면, 모종의 배신감마저 들것만 같이 너무나도 저승사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미안하네. 주마등 간소화 서비스를 시행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오류가 많아. 이해해 주게나."

무슨 간소화 서비스? 연말정산도 아니고,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년의 사내를 쳐다봤다. 그 사내는 설명을 이어갔다.

"아, 자네는 죽었다네. 그리고 지금은 주마등이야. 주마등이 뭔지는 알지? 하여튼 그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간 지나쳐간 망자들이 주마등이 하도 길다며 불평을 많이 해서... 개선하는 중이라네."

'너 죽었어.'라는 말을 어쩜 이리도 담담하게 할 수 있을까? 그 담담함 덕분에 나는 최초에 설정한 죽음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희열보다는 처음 듣는 단어인 <주마등 간소화 서비스>가 뭔지 더 궁금해졌다.


"어디 보자... 이게 뭐야, 자네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게야? 주마등 간소화 서비스가 없더라도 겪어야 할 주마등이 10분밖에 되지 않는구먼?"

그럼에도 주마등 간소화 서비스가 뭔지 궁금하다는 내 물음에, 중년 사내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이어 말했다.

"요즘 이승에서 유행하는 '인생 네 컷'을 오마주 해온 저승의 새 시스템으로, 주마등을 빠르게 겪게 해 준다네. 자네가 살아생전 찍은 실제 사진들을 나열하고 거기서 네 개를 골라. 그럼 자네는 그 네 번의 장면만을 주마등으로 겪고, 그 주마등은 '저승타그램'에 업로드되고, 썸네일이 된 사진을 누르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지. 근데 자네는 아무리 쥐어짜도 네 컷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데?"

귀찮아하는 것치고는 굉장히 상세히 설명을 해주는데. 그러면 나처럼 네 컷을 채울 게 없는 망자는 어떻게 되느냐는 내 물음에 중년 사내는 얕은 한숨을 폭 쉬며 말을 이어갔다.

"보통 자네 같은 망자들이 대부분 비슷하다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 스스로 삶을 끝내려고 하는 건가. 아직 반도 채 살지 못한 삶을 끝내려는 정당한 이유 따위는 없어. 살아서 살아내다가 삶이 끝나면 다시 와."

망자를 인도하는 저승사자가 하는 말로는 너무 모순 가득한 말이 아니냐는 나의 반문에, 중년 사내는 그 옛날의 엄마처럼 등짝 스매싱(?)을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이놈. 어차피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 주제에 뭐가 그리 급하다고 삶을 벌써 포기하냔 말이야. 네놈의 유일한 저 주마등을 잘 보라고."

중년 사내는 주마등 사진을 확대했다. 1998년의 일회용 카메라의 성능으로는 절대 볼 수 없었을 테지만, 사진에 담긴 나의 눈동자를 클로즈업하자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전체가 보이게끔 사진을 축소하니 누나와 나도 벌을 받으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기억나는가? 자네는 저 순간에 엄청나게 행복했다네. 여기에 오는 건 이렇게 죽음 직전에도 떠오를 만한 행복한 순간을 적어도 세 컷은 더 만들고 와도 늦지 않다네. 얼른 썩 꺼지시게나."

중년 사내의 일갈을 기점으로, 또다시 시공간이 뒤틀리고 빙빙 돌면서 여러 색의 빛들이 번쩍이며 점멸했다.


희뿌연 시야, 규칙적인지 불규칙적인지 모를 삑삑거리는 기계음, 내 흉부를 압박하며 구슬땀을 흘리는 구급대원의 숨 냄새,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그리고 목구멍에서 울컥거리며 넘어오는 비릿한 피 맛. 사라진 여섯 번째 감각 대신 선명하게 느껴지는 오감은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죽음과 가장 가까운 이 시점에서, 나는 스스로 선택했던 죽음을 후회하고 다시 한번 간절히 살고자 희망하고 있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만약 한 번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저승타그램에 올라갈 나머지 인생 세 컷을 제대로 채우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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