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지마 Dec 24. 2019

입장료

노들서가 10월 글세




입장료

Written by 글지마          




2019년 11월 4일     

체코에서 환전 사기를 당했다. 상대는 푸근한 인상의 노인네였다.


멍청한 놈. 스스로를 자책해봐야 이미 늦었다. 망할 영감탱이. 그 흰 머리털을 죄다 뽑아줄 기세로 길거리를 둘러보아도 트램을 기다리는 관광객들뿐이다. 


속았다. 노인은 딱 보기에 부유해 보였다. 고작 체코 돈 1천 코루나에 하루를 살고 이틀을 버틸 것처럼 조급해하지 않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닐 테지.


10분 전, 나는 은행 앞 ATM 기계에서 현금을 뽑았다. 한화로 약 6만 원에 달하는 지폐 한 장이었다. 뒤돌아 걷는데 누군가 시야에 걸렸다. 백발을 곱게 넘긴 노인이었다. 그는 어쩐지 비싸 보이는 머플러를 두꺼운 목에 두른 채 나를 온화하게 바라보았다.


“익스큐즈 미.”


걸걸하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중후하게 부탁을 했다, 당신이 가진 두 장의 5백 코루나와 내 1천 코루나를 바꾸는 건 어떻겠냐며. 그는 어눌한 영어 실력으로 이유를 덧붙였지만 그 변명을 채 다 듣기도 전에 나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망설임 없이 돈을 내밀자 노인이 허허 웃었다.


“웨어 아유 프롬?”

“암 프롬 코리아.”


좋다고 애국심을 자랑했다. 빌어먹을 노인 공경. 한국인을 얼마나 우습게 알까. 심지어 나는 별 거 아니라며 미간을 찡긋, 해보였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길거리 푸드 트럭으로 향했다. 메뉴 4번, 핫도그 앤 칩스를 시킨 후 돈을 내밀었다. 칼집을 낸 핫도그는 이미 팬 위에 올라갔고 앞치마를 허리에 크게 두른 아주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쥔 지폐를 콕 찌르며 “노 체코 머니.”라고 신경질을 냈다.


그때 깨달았다. 나 환전 사기 당했구나. 소중한 육만 원을 고작 삼백 원짜리 두 장과 맞바꾸었다. 질펀하게 욕을 내뱉었다. 거칠고 처참하게, 그 노인네가 저주 받도록.


그래도 일단 가게로 돌아갔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동전을 내밀자, 짜증을 부리던 그녀도 내가 불쌍한지 친절하게 음식을 내주었다. 


나이테가 넓은 나무 아래 주저앉았다. 따가운 햇살에 인상을 찌푸리며 다리를 활짝 벌렸다.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으로 고기를 뜯고 눈으로는 도둑을 뜯었다. 배 나온 남자의 그림자만 주변을 스쳐도 눈을 희번뜩였다. 남은 빵은 뜯어 비둘기에게 적선했다. 손톱으로 속살을 파내 땅바닥에 패대기치니 기분이 조금 풀린, 줄 알았는데 분풀이 못 한 분노는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스타벅스로 자리를 옮겼다. 창가 쪽 소파에 걸친 내 자세는 점점 반항적으로 변했다. 척추가 구부러지고 엉덩이가 쿠션에서 밀려났다. 딴에는 변장한다고 두른 외투의 지퍼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턱을 숨기고 눈을 치켜떴다. 


‘걸리기만 해.’


가슴은 부글거리고 머릿속은 열감으로 뜨겁게 차올랐다.          


저녁이 왔다. 여기는 7시 거기는 새벽 4시. 이 시간까지 깨어있는 친구 덕분에 응어리진 감정은 가끔 울컥, 치밀 뿐 참을 만했다. 하하 웃어보이자 친구는 그제야 “멍청한 놈”이라며 쓴소리를 했다. 나도 헛웃음을 치며 어깨를 들썩였다. 창가를 바라보며 친구에게 말했다.


“야 끊어봐.”


그리곤 곧장 달려 나갔다. 쏜살같이 달렸다.


‘틀림없어.’


그 노인네였다. 감색 머플러에 하얀 셔츠. 어깨 뒤로 두른 카디건에 회색 정장 바지. 사기꾼은 오전과 똑같은 차림새로 범행 장소에 등장했다. 아마추어가 따로 없군. 그 안일함에 나는 웃었다. 승리의 여신이 내게 영웅담만 남겨준 채 목돈을 돌려주려 한다.


노인이 골목에 들어선다. 나도 어슴푸레 노을이 진 길목에 재빠르게 멈춰 섰다. 걸음이 느린 그의 등을 바라보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헤이.”


낼 수 있는 가장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럴까. 매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이토록 짜릿하다면 아드레날린 과다 복용으로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노인은 말이 없다. 꿈적도 안 하는 어깨를 붙잡고 힘으로 돌렸다. 돈을 내놓으라고 할 참이었다. “김미 백 마이 머니.”라는 문법이 완벽한 문자도 준비해뒀는데 사기꾼의 얼굴이 수상쩍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쿨럭였다. 하얀 피부에 뭉툭한 코끝을 빨갛게 물들이며 씩 웃었다. 턱이 덜덜 떨더니 시뻘건 피를 퍽 토해냈다. 검붉은 덩어리가 내 명치로 떨어졌다.


“뭐야 이게.”


소스라치며 몸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마치 벽에 손이라도 낀 듯 상체가 꿈쩍을 안 했다. 허리가 반동에 튕겨 다시 앞으로 되돌아왔다. 노인의 셔츠를 붙잡았다. 비틀거리는 허벅지를 간신이 지탱했다.


“아까 한국인이라고 했던가.”


노인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네?” 나는 이마에 주름이 생기도록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 모로 보아도 외국인 외관을 한 그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몸통을 뚫은 내 손목을 어찌할지 몰라 울먹였다. 손날을 슬금 움직이자 무언가 출렁거린다.


“방금 그건 창자였다네.”


토기가 올라왔다. 손끝의 감각이 첨예하다. 손톱이 박동하듯 쿵쿵거렸다. 노인이 상체를 움직이려 해서 다급하게 붙잡았다. 셔츠를 움켜쥔 주먹이 절박함에 부들부들 떨렸다. 


“움직이지 마요.”


무서웠다. 그가 과다출혈로 죽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식은땀이 흘렀다. 뜨거운 혈액은 계속해서 허벅지를 축축하게 적셨다.


“우, 웃지 마요.”


노인에게 경고했다. 손목에 닿은 장기가 덜덜 울렸다. 땅바닥에 생명을 질질 흘리면서 뭐가 그리도 유쾌한지 껄껄댔다. 그는 흉기가 된 내 팔꿈치를 움켜쥐며 눈을 맞췄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 악력이 대단했다.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 팔을 뽑아냈다.


“입장료 잘 받았네.”


그 모습이 마치 교통사고를 당한 피해자의 시선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내 팔이 이상한데.’


나는 거대한 칼처럼 변한 신체를 멍하니 바라봤다. 첨예한 손톱은 어제 스테이크를 잘라먹던 나이프처럼 날카로웠다. 피로 물든 1천 코루나가 관통당한 채 살랑거렸다.


‘빌어먹을 노인네.’


까무룩 시야가 뒤집어졌다. 노인은 끝까지 나를 온화하게 바라보았다.         

 

내 금쪽같은 1천 코루나를 뺏어간 노인네의 별명은 ‘삼구할배’였다. 매년 삼십구 명의 참가자를 찾고 삼십구 번, 그들에게 죽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게 나는 정부 비밀 기관 NSCINational Spatial Creator Investigation의 직원 채용 면접에 강제 발탁되었다.






이 글은 노들서가 10월 글세로 제출한, 자전적 소설입니다. 노들서가에 방문하시면 더 많은 글을 읽어보실 수 있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들서가 오리엔테이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