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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멋지기 Oct 17. 2023

상실의 의미: 건너편의 타인

소설 『바깥의 여름』 中 「건너편」 서평 혹은 감상평



1.타인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형성한다.’ 쉽게 입에 올리는 명제이면서 동시에 깊은 고찰이 수반되지 않으면 구체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사고 과정의 경향에 비추어 보면 ‘자아 형성’에 무게가 실린다고 해야겠지만 오히려 더 중요한 부분은 전제가 되는 ‘타인과의 관계’이다. 사실상, 타인과의 관계의 부재 위에 온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내면의 발달과 성숙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점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은 ‘타인’인가 ‘관계’인가에 대한 질문이 뒤를 이어야 하고, 관계란 타인이 존재함으로써 시작되고 타인이 사라짐으로써 없어지는 현상이자 기억에 불과하므로 핵심은 ‘타인’이라는 답을 얻게 된다.


2.타인의 위치


관계에 있어 타인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이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타인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다. 프로시믹스Proxemics 혹은 공간학에서 타인의 위치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타인의 위치란 타인과의 물리적 공간 설정으로 표출하는 감정적 거리를 의미할 수도 있고 타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심리 현상의 결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 맺은 관계 속에서 개인은 타인이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있는지 명확히 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 혹은 여러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관계 대상자는 그 위치가 정해져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들의 위치를 통해 또한 개인은 자신을 인식하고 스스로의 모습을 확고히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위치 설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당 관계는 본래의 경로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끝은 결국 타인과 관계의 상실로 귀결된다.


3.건너편


공간학에서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지는 공간을 각각 서로 다른 지름을 가진 원으로 표현한다. 이 그림을 사각형으로 바꿔도 되고 원을 해체해 무한히 긴 직선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이 맺는 관계 속에서 물리적 감정적 거리에 따른 비가시적 경계선이 존재하고 결국 타인의 위치란 어느 경계선에 상대방이 서 있는지를 나타내며 동시에 그것을 인지하는 우리의 인식이기도 하다.


「건너편」의 주인공인 도화와 남자친구인 이수가 처음 마주하게 되는 교회 식당에서 “식탁 맨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던 도화의 건너편에 앉게 되는 이수가 보인다. 소설 첫 장면에서 그려지는 도화와 이수가 함께 하고 있는 도화의 집에서도 도화는 “부엌이라 해봐야 거실에서 몇 발자국 거리이지만 건너편 상대에게 말할 땐 목소리를 조금 높여야” 하는 공간에 있다. 다시 말하면 첫 만남과는 다르게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이수의 위치를 도화가 어떻게 설정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집에서도 둘 사이에는 반투명 미닫이문이 달린 문지방이 경계선으로 존재한다. 이수를 안방에 둔 채 도화는 문지방을 넘어 출근하고 새벽 다섯시가 넘어서야 이수는 문지방 너머에서 기다리는 도화에게 돌아오지만 그조차도 “반은 현관에 나머지는 부엌에 걸친”채로 돌아와 정신을 잃은 채 도화에 의해 그 경계를 넘게 된다. 그리고 맞이한 12월 25일. “누군가 찾아온대도 안개에 가려 결코 못 알아볼 것 같은 밤. 수백 명이 왕왕거리는 횟집에서” 도화는 테이블 건너편의 이수를 마주한 채 그녀의 관계를 끝맺게 된다.


4.건너편의 타인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은 작중 화자 레드Red의 타인에 대한 관찰일지라고 할 수 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전직 은행가 앤디 듀프레인Andy Dufresne과의 첫 만남부터 앤디의 탈옥 이후 가석방으로 출소한 레드가 다시 앤디를 만나러 가기 위해 떠나는 그 순간까지를 화자 레드의 관점에서 풀어낸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핵심은 레드의 깨달음에 있다. 관계 맞은편에 있었던 앤디를 통해 어린 나이의 잘못으로 수십 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유와 희망의 위대함과 소중함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역시 앤디를 통해 다시 그것을 꿈꿀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탈옥이라는 변수로 앤디를 잃었지만 레드가 있어야 할 곳을 잊지 않은 앤디로 인해 레드 또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건너편」의 도화 또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밤 이수를 상실하게 된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느꼈을 때, 도화는 자신과의 관계 속 이수가 있어야 할 자리를 그에게서 뺏어낸 것이다.


5.타인의 상실


도화의 건너편에 서 있던 이수에게서 도화가 찾은 것은 무엇이고 그의 상실을 통해 도화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혹여 그것을 통해 도화가 새로 얻은 것이 있는 것일까. “잘 개어놓은 수건처럼 반듯하고 단정하”면서 “수사도, 과장도, 왜곡도 없는 사실의 문장을 신뢰”하는 도화에게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사라져 버렸고 되돌릴 방법을 찾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진 절망은 넓고 진득하게 침윤했을 것이다.


독일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2023년 영화 「어파이어Roter Himmel」속 주인공 레온은 두 번째 책 집필을 마무리하기 위해 친구 펠릭스의 아버지가 구입해 둔 별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아이스크림 판매원이지만 실상은 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나디야와 인명구조원 데비드. 이후 레온의 원고를 살펴보기 위해 출판사 사장 헬무트까지 별장으로 찾아오고, 영화는 레온과 나머지 네 명 간의 차이를 건조하면서도 극명하게 그린다.


즉, 레온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은 각자 관계 반대쪽의 타인을 인식하고 자리를 부여해 관계를 맺어 나가지만 유일하게 레온은 명확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주저하고 결국 하나의 큰 사건으로 인해 그들을 몇 가지 방식으로 잃게 된다.


「어파이어」의 레온의 주저함과 망설임을 보며 「건너편」의 도화에게 위로와 안타까움이 섞인 말을 건넨다. ‘그 두 달의 시간을 앞당길 수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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