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시간

일상기록

by 글멋지기



찬 겨울이었다. 주로 찬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색 입김이 뿌옇게 보일 정도의 기온이 세상을 껴안고 있는 그 시절의 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나는 흡연자였으므로, 당시에, 얇게 입은 소위 실내 거주용 옷차림 위에 두터운 롱패딩을 걸치고 한 쪽 주머니에는 담배와 라이터를, 다른 한쪽에는 휴대폰과 보조 배터리를 단단히 챙긴 차림새로 밖으로 나선다. 일층 유리 자동문을 몇 발자국 앞에 마주할 시점에는 적당한 힘과 계산된 각도의 움직임을 왼손에 미리 예약해 두어야 한다. 길쭉한 자동문 개폐 버튼은 세월의 두들김에 피로해져 정확한 누름이 아니면 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 찰나의 순간에 급해지기만 하는 마음이 버겁기 때문에.


첫 번째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정확히는 담배 끄트머리에 불이 붙도록 적절한 타이밍에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핵심이다. 해는 저물어 가로등에게 더 밝은 무대를 양보하고 밤하늘을 덮은 찬 손길이 코 끝으로 내려올 때에 딱 들어맞는 전화번호를 휴대폰에서 똑바로 찾아야 하는 것처럼. 첫 번째 날숨에 섞인 흰색 니코틴 연기를 휴대폰 액정에 내뿜는다. 몇 안 되는 전화번호가 위아래로 휙휙 움직이는 그 위로. 마치 신 내린 점술가의 점궤마냥 연기가 보이는 최후의 손가락질을 유심히 관찰하면 어떤 전화번호 위 통화 버튼을 눌러야 할지 답을 주기 때문이다.


두 개비, 세 개비, 늘어가는 개수만큼 이어지는 겨울밤의 통화는 어느새 정지 버튼이 눌려 똑같은 모습으로 박제되어 있다. 매해 똑같은 겨울밤은 바통을 이어받고 달음 박쳐 오지만 그때의 흡연자는 이미 비흡연자가 되어 십수 년을 보낸 뒤다. 괜한 아련함까지 곳곳에 박혀있던 하얀 니코틴 연기가 때로 그리우면서도 이 비흡연자는 절대 다시 찾지 않고 있다.


겨울의 입김은 담배와 멀어진 만큼 희미해졌고, 또한 멀어진 만큼 휴대폰 속 전화번호부에 살아가던 대다수의 전화번호도 멀어졌다. 그들 삶의 궤적에 새겨졌던 여러 빈칸을 채우던 나의 자리는 다른 존재로 대체된 지 오래, 인류 조상이 남긴 동굴벽화의 그것처럼 깎이고 덮이길 반복해 이제는 자취조차 그 향을 잃어버린 셈이다. 내가 걷는 회랑은 어떠한가. 한동안 자리를 차지했던 그들의 그림은 여전히 걸려있으나 방문객을 잃은 그림 액자는 먼지로 가득하고 회랑의 관리자는 그다지 청소를 할 생각이 없다.


뭐해, 그냥 있지 뭐, 너는, 나도 그냥 있지, 생각나서 전화했어. 휴대폰 수음부에 한동안 묻은 퉁명하지만 자연스럽고 무덤덤하지만 관심이 담긴 문장들은 두꺼웠고 색은 바래있다. 철없는 섭섭함에 손가락으로 힘주어 긁어내도 벗겨지지 않는다.


아련하고 애틋한 겨울밤의 입김, 니코틴과 찬 공기와 더운 입김이 만들어낸 흰색 아지랑이가 더는 그리워지지 않은 어느 겨울밤, 무거운 발걸음 재촉해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밤, 눈앞으로 퍼져 나가는 날숨에 불현듯 떠오른 그리움이 사무쳐 휴대폰을 꺼내든다. 밝게 빛나는 가로등이 흐릿했던 눈을 말끔히 씻겨주니 마이크와 스피커에 오래 묻어있던 글자와 단어와 생각과 애정은 외면했던 시간에 이미 깎여 나갔음이 눈에 들어왔다.


뭐해,

아기 재우는 중이야, 미안 나중에 통화하자,

......

뭐해,

야근하는 중이야, 미안 나중에 통화하자,

......

뭐해, 애 숙제 봐주고 있어, 미안 나중에 통화하자,

......

뭐해,

......

뭐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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