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기록
영화를 읽고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기록한다. 이것은 누군가에겐 취미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이해하기 힘든 영역에 위치한 나만의 입맛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경험한 영화와 마음의 기록을 잇기 시작한 것은, 같은 인간을 사랑하고 신뢰해야 한다는, 어디선가부터 언젠가부터 시작된 세뇌의 영향력이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인간을 향한 불신이 깊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어느 날의 서러움 때문이었다. 인간이 창조한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를 읽어낼 수 있다면, 감독이 담아둔 그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면 인간을 사랑해야 할, 인간을 신뢰해야 할 가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기록의 역사가 시작된 2023년 12월의 추운 겨울 저녁부터 비로소 영화는 단단한 치아와 다소 탁해진 잇몸을 스쳐가는 혓바닥 위에 놓인 취미와 부드럽게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거창한 고뇌에 빠진 채 별 개수와 짧은 한줄평만을 고민하던 십여년의 시간에 분기점이 찾아온 것이다. 어두운 상영관 안에서 건조한 종이 위 사각거리는 소리를 벗 삼아 위태롭게 걷는 연필 끝의 무른 흑연의 감촉을 느끼며. 불쾌할만큼 흔들리고 어둔 마음을 그렇게 반짝거리는 거대한 화면으로 날려 보냈고 이것의 일방성에서 오는 아쉬움과 외로움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또한 마땅히 받아들이며 또한 마땅히 만끽했다.
영화를 읽고 나를 기록한다. 누군가에게 이 작업은 여전히 불가해의 영역에 속한다. 알지만 이해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일수도. 사뭇 벅찬 감정이 흩뿌려진 표정으로 나 자신과 영화를 잇는 얇고 어설픈 다리를 그들에게 선보일 때면 그들의 얼굴을 채우는 색은 검정 물감이 몇 방울 섞인 불투명한 색채를 띤다. 혹은 어떠한 색도 없이 너무나 투명한 거울이 되어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내 얼굴을 비출 때가 있다. 내가 짓고 있지만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어색한 미소는 때로 우스꽝스럽고 당혹스러운 감정을 선사한다. 그런가. 이들에게 비친 내 모습은 신발 속 깔창 어딘가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할 수 있음을 느낀다.
처음으로 붉은 와인을 곁들이며 마주한 밤, 그녀의 입술 위를 흐르던 작지만 따뜻한 고백의 시작 또한 영화였다. 영화를 향한 나의 순수하고 붉게 물든 고백이 그녀의 흥미가 고인 마음의 가장자리에 내려앉았음을 고백했다. 영화관에서, 카페에서, 그리고 집에서, 수없이 많은 감독과 마주했고 그들을 읽었으며 나를 읽었고 그녀를 기록했다. 인간이 가진 모순과 한계, 끈적거리는 온갖 더러운 감정에 지쳐 회색의 눈으로 그들의 존재 이유를 회의한 오랜 시간은 비로소 봄이 다시 찾아온 산천과 들판의 모습처럼 제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영화를 향해 끝없이 일렁이며 퍼져간 감정의 열매는―믿음, 인연, 예술, 가족, 우정, 사랑, 책임, 사과 같은―인생에 맺힌 기록을 투영하는 화면 속 그녀에게로 방향을 바꿔 흘러갔다.
영화를 읽고 기억을 기록한다. 저장된 기록을 한쪽에 띄운 채 처음 마주했던 영화를 기억 속에 고정해본다. 첫 문장과 함께 생을 부여받은 그때의 감정은 검은색이 빼곡한 흰 종이에 변함없이 맺혀 있으나 기억이 회고하는 그것은 꼭 똑같지만은 않음이 보인다. 달음박질치며 흐르던 감정은 영화로 향하던 것인지 그녀에게 흐르던 것인지, 갈림길에 세워두었던 이정표조차 해와 달에 풍화되어 자취를 감췄다. 여전히 어디론가 흐르고는 있지만 종착지의 모습은 이전만큼 두 눈 속에 제 모습을 새기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중얼거림은 계속해서 영화를 향해 흐르고 있는 감정 끄트머리를 쫓아가고 있다. 꽤나 단단하게 붙잡은 탓에 당분간은 도중에 떨어져 나가거나 저 홀로 허우적 걸릴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어딘가 입 한구석이 까슬거리는 것은 기록된 기억의 한 자락 흐름 탓일테다. 나의 뜻이 향하던 곳을 바라보며, 내가 풍기던 영화의 향기에 취해 같이 흘러가던 그 물줄기 자국이 아직 다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