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일상기록

by 글멋지기


현실이 맺힌 두 눈으로 뒤를 돌아본다. 이것은 수사학적 행위요, 따라서 다소 벌건 눈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음이 옳다. 돌아본 것은 무엇인가. 찰랑이는 마음의 초입에 매달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그 눈일 테다. 단단한 십자가에 매달린 눈은 그리하여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닌 안으로 안으로 침전할 뿐이다. 폭풍으로 내리친 시간이 마음의 두께에 더해지며 찰랑임은 무거움을 뒤집어쓴 고요가 되거나 울부짖는 파도가 되어 한참을 방랑하게 된다. 가라앉고 가라앉아 어느덧 바닥에 닿은 눈은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바라봄에 눈물이 따르던 웃음이 따르던 그러할 뿐이다.


눈이여, 그대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그대 몸담은 그곳에 나는 그저 버렸을 뿐이다. 반짝였을 별과 달콤했을 바람과 안온했을 어둠이 탐스럽게 녹아내린 것은 나와 너와 그녀와 그와 우리와 그들이었다. 한동안 그것들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고, 애처롭게 희미한 자국을 따라가니 그것들은 나를 반겼다. 썩고 바스러져 더는 반짝이지 않는, 더는 향기가 피어나지 않는 그것들의 눈빛이 두려워 그대 잠긴 그곳 깊숙이 봉인했을 뿐인데. 다시금 거슬러 내려가 바라보려는 까닭은 무엇이던가.


여느 때와 다를 리 없는 달이 제자리를 찾은 날이었다. 밤을 도와 내달린 끝의 바다는 어둔 달빛을 머리에 이고 묵묵히 걷고 있었다. 눈 둘 곳 찾지 못해 하나로 이어진 감색 세상 위를 배회하니 너울 너머 거친 바람과 파도는 네가 되고 그녀가 되어 나를 부르며 일어섰다. '바라보고 싶지 않아.' 조용히 되뇌며 꼿꼿이 경직된 몸을 애써 돌려 걸으니 파도는 거칠어져 바닷속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염증처럼 퍼져 있는 암석은 거친 얼굴을 들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더는 찾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었고 우리의 모습이었다. 언젠가 풍랑은 울음을 그치고 고른 숨을 내쉬겠지만, 이것은 멈추지 않을 순환이며 반복이자 지워지지 않는 저주임을 잊지 않는다. 기억에서 잘라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삐걱대는 소리 리듬 삼아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 옮긴다. 몇 발자국 되지 않아 멈춰 서니 네모난 유리가 세상을 소개해 준다. 저 아래 크고 작은 나무들, 계절을 껴안은 채 서 있음이 시야를 채운다. 어제의 이들이 오 년 전의 이들이 십 년 전의 이들이 그리고 이십 년 전의 이들이 변함없이 시간 위에 흘러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뿌리로부터 발원한 피는 끊임없이 순환하며 매일 다른 가지와 꽃봉오리와 열매를 맺고 떨어트린 이들은 종래 똑같은 모습으로 저곳에 서 있음이리라.


찰랑이는 마음의 시작점에 선 눈이여. 두꺼운 안경을 쓴 채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눈이여. 밑으로 밑으로 침전해 겨우 잦아든 바다를 헤집어 일으키는 것의 까닭은 무엇인가. 앞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서러운 짐승은 따라서 앎을 역설할 능력도 없이 울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해줄 수 있으니 목적 없는 방랑을 잠시 멈추고 들어주길 바랄 뿐.


본래의 색과 향을 잃은 그것들을 그대가 숨 쉬는 바다에 버린 것은, 희미해져 흩어진 순간과 관계와 사랑과 미움은 사라진 것으로 끝이요 다시 돌아오지 없음을 덤덤히 슬퍼할 수 있기에 기꺼이 버린 것이라. 날카로운 미련과 잔인한 눈으로 내가 버린 그것들을 되찾으려 하는 그대의 몸부림은, 되려 또 다른 후회로 상처만 낸다는 것을 그대는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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