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는 장비빨

2025. 3. 12. 주변 사물 묘사하기

by 글러먹은

“요새 회사 생활 어때요?”

“조금 좋아졌습니다.”


평소와 똑같은 일상인데 짜증이 30% 경감되었다. 최근에 직원 복지 차원으로 연식이 오래된 사무실 컴퓨터를 바꾸었다.


나는 지금까지 병든 수탉을 품고 있었구나.

골골대는 컴퓨터를 어르고 달래가며 끝까지 함께 하려 했다. 매번 얼굴이 파랗게 질려 블루스크린을 외쳐도 ‘우리 애가 또 이러네’하며 넘긴다. 지금까지 쌓아온 보고서와 자료라는 이름의 추억들이 날아갈까 지지부진하게 인연의 끈을 붙잡았다.


“주사님은 왜 컴퓨터 안 바꿔요?”

“기존 자료 옮기기 어렵잖아요.”

“요새 알아서 다 백업해 줘서 편해요!”

끈을 놓기란 참으로 쉽다.


새로 분양받은 친구는 분명 까마귀다.

얼마나 영리한지. 잘 모르는 품종-티원엘에스라는 컴퓨터 브랜드-이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주 빠릿빠릿하다. 날지 못하는 수탉과 너무 오래 일했는지 묶여 있던 키보드와 마우스가 이제야 활개를 친다. 오랜만에 손이 날아다닌다. 그러다가 문득 ‘대기업은 얼마나 좋은 컴퓨터를 쓸까? 독수리는 되겠지’하고 속으로 생각해 본다.


까마귀는 반짝거리는 물건들을 수집하는 특성이 있다.

내 까마귀는 수집은 못 할지언정 끌어들이기는 하나보다. 모니터 앞에 붙은 누렇게 뜬 포스트잇을 떼고 새 인쇄물을 붙여본다. 틈만 나면 먼지가 앉을까 물티슈를 수시로 뽑아 가볍게 닦아준다. 누구는 컴퓨터가 빨라졌으니 일을 더 하는 거 아니냐고 흉조 취급하던데 나에게는 길조다.


업무는 장비빨이다. 좋은 장비는 단순히 시간만을 줄여주는 것이 아니라 업무의 질을 높이고 과정 자체를 더 즐겁게 만든다.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며 고생할 필요가 없다. ‘좋은 장비’란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한 현명한 투자일지도 모른다.


듣고 계시지요. 회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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