感想
감상이라는 단어에는 뜻이 많다.
感傷 — 하찮은 일에도 쓸쓸하고 슬퍼져서 마음이 상함.
鑑賞 — 예술 작품을 이해하여 즐기고 평가함.
感賞 — 마음에 깊이 느끼어 칭찬함.
感想 —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
대체로 감상은 어떤 작품을 보며 느끼는 감상(鑑賞)의 의미로 쓰이지만, 우리는 마지막 감상(感想), 즉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생각”을 선택했다.
오래전 내가 좋아하던 그림책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마음의 집>을 읽고 아이들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 당시 유치원생이던 아이들에게 주로 그림책에 등장하는 마음의 집에 대해 들려주고, 각자의 마음속을 상상하며 ‘마음의 방’을 그려보게 했었다. 옆에 앉아 나도 같이 끄적이며 이런저런 방구조와 가구를 배치해 봤다. 그때 아이들은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들을 그려냈다.
방 한가운데로 내려가는 긴 계단, 그 계단이 이어진 지하의 공간, 문을 열면 다른 계절이 펼쳐지는 비밀의 출구...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만들면서 내가 만남 감상은 이렇듯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구조물을 설계하는 힘이었다.
그림책 수업을 오래 하다 보면 아이들이 자신이 정해둔 장르와 스토리 안에서만 그림을 그리다가 슬럼프를 겪는다. 그럴 때면 일명 ‘자유 그림’을 제안한다. 사용해보지 않은 재료도 써보고, 배워보지 않은 새로운 기법을 써보는 시간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자유 그림마저도 연령대에 맞춘 비슷한 주제로 모인다. 계절, 학교 숙제, 유행하는 캐릭터들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명색이 그림책 학원인데, 자유 그림을 조금 더 특별하게 해 보자.
고민하던 와중에 우리가 떠올린 것은 동시를 읽게 하고 그에 맞는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게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동시집에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나 지나치게 성숙한 감수성이 담겨 있었다. 그림으로 옮기기에는 언어의 높이가 맞지 않았다. 물론 예상치 못한 깊이로 작품을 이해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편하게 받아들이고 장면으로 옮길 수 있는 시는 따로 필요했다.
결국 내가 쓰기로 했다. 매일같이 아이들의 말을 듣는 사람이라면, 문학적인 완성도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들이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쓴 시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자, 이미 시를 읽고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도 “이건 쉽다”면서 더 자유롭고 즐겁게 그림을 완성했다.
우리는 시를 ‘읽히는’ 대신 ‘들려주는’ 방법도 써봤다. 단 한 번만 들려주고 기억 속의 인상으로만 그리게도 해봤다. 또, 한 가지 재료나 색깔을 골라서 표현하게도 해봤다. 그것은 일종의 ‘감상의 실험’이었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게 그때 썼던 시를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같은 시에서도 매번 새로운 그림이 나온다.
사실 시의 재료는 다름 아닌 ‘아이들의 말’이다.
지나가듯 던진 말들, 아이들이 낙서해 둔 단어 몇 개, 흘려 들었던 수다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그들의 말이 새로운 언어가 되어 내 안에서 감상으로 남았고, 그 감상이 시로 변했다. 아이들은 그 시를 감상하고, 다시 그림으로 옮긴다. 감상은 느끼고 생각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창작의 씨앗이 된다.
감상화시 연구소의 일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감상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중간의 단계다. 아이들의 말에서 시가 태어나고, 그 시에서 그림이 피어나며, 그림은 다시 이야기를 낳는다. 감상과 화시는 그 순환의 고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계속 실험하고, 관찰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꺼내온다.
※ 본 포스팅에 수록된 그림은 감상화시 수업 과정에서 창작된 결과물입니다. 모든 그림의 저작권은 감상화시와 참여 아동에게 있으며, 허락 없는 복제나 게재는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