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에 대해 쓴 지 3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출판사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늘 같은 질문을 받았다.
출판사 이름이 뭔가요?
-감상화시입니다.
뜻이 뭔가요?
-예, 일단 감상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생각과 느낌이라는 뜻인데요, ...그게 이제 화시 라는 걸 만나서요... 화시라는 게 뭐냐면... 블라블라 (장황해지는 말들)
말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핵심에서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감상은 지난 글에서 풀어냈지만, 화시는 아직 온전히 정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화시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화시(和詩)라는 단어는 함께 일하는 원장님이 발견했다. 내가 아이들과 하는 일, 우리가 그동안 해온 그림책 작업들을 아우를 수 있는 단어를 찾다가 폭풍 검색 끝에 찾아낸 말이다.
화시의 원래 뜻은 이렇다.
"남의 시를 읽고 감흥되어, 그 주제나 제재를 좇아 새로운 각도로 쓴 한시"
나는 시를 전공했지만 한시를 짓지 않는다. 게다가 아이들과 시만 만들지도 않는다. 그림책에 등장할 캐릭터, 에세이, 역사 이야기까지 아주 다양한 창작물을 고민한다. 그렇다면 왜 화시가 우리 출판사의 중심 이름이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화시가 설명하는 작동 원리 때문이다. 어떤 작품의 울림이 또 다른 작품으로 옮겨가는 일. 남의 이야기에 감흥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일. 그것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시에서 시로, 시에서 그림으로, 말에서 책으로. 형식은 달라지지만 본질은 같다.
내게 화시는 '영감'과 같은 말로 읽힌다. 단, 혼자만의 상상에서 나오는 영감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전해 받고,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영감이다.
예전에 썼던 에세이를 다시 펼쳐봤다. 몇 년 전, 어느 날. 작가가 꿈이어서 그림책을 만들러 학원에 온 아이에게 물었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모험하는 이야기요.”
모험은 작가를 꿈꾸는 많은 아이들의 흔한 소재다. 그에 관해 몇 가지 흔한 질문이 더 이어졌고, 아이는 유난히 침묵했다. 통상적인 운영에서는 “모르겠으면 모른다고 말해도 된다”고 마무리했을 상황이다. 그날은 조금 더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모험을 시작하려면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데?”
아이의 대답은 짧았다.
“아무도 없는데…”
그 말에 나는 즉시 되물었다.
“그럼 ‘아무나’라는 사람이 나온다고 할까?”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날따라 하도 모른다고 하는 아이들이 많았던 터라 어떻게든 이야기 하나를 꼭 만들고 싶다는 굳은 의지였을까.
방향이 생기자 아이의 말문이 열렸다. 아무나 씨가 배를 타고 아마도 섬으로 떠나는 이야기. 말도 안 되는 동물과 숨겨진 보물들까지...
결론적으로 아이는 그 책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내 안에서 오래 품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의 한 문장으로부터 출발한 그림책 〈이야기 씨〉를 만들고 있다. (드디어 제목을 정했다!)
이 과정이 내가 이해하는 화시다.
한 편의 시를 다른 시로 바꾸듯, 누군가의 말이 내 이야기로 이동한다. 나의 말이 아이에게 옮겨 가고, 아이의 말은 또 내 안에서 머물렀다. 형태도 주제도 바뀐 채 다시 나의 작업대 위로 올라왔다. 원천은 혼자만의 상상이 아니라 대화에서 나온 영감이었다.
감상화시가 지향하는 것도 이 지점에 가깝다. 우리는 오롯이 혼자서 닫힌 방에서 만들어낸 결과물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질문을 주고받고, 서로의 생각을 함께 골몰하며, 타인의 문장과 장면에서 자극을 받아 새로운 각도로 옮겨 적는다.
아이들의 말이 시가 되고, 그 시가 그림책의 장면이 되며, 그 장면이 다시 다음 이야기를 부른다. 감상(感想)이 화시(和詩)로 전환되고, 화시는 또 다른 감상을 낳는다. 혼자에서 함께로, 감응에서 창작으로 이동하는 연쇄가 곧 우리의 작업 방식이다.
결국 “누구나 작가가 되는 과정”은 개인의 영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말하기 주저함 속에 숨은 단서를 발견해 빼내고, 그 단서가 다음 사람의 작업으로 건너갈 수 있게 연결한다. 그 연결을 잘 설계하는 일, 거기에 감상화시의 역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