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교토-걸음

2018-10-?

by 글쌤 류민정


목표는 무사였다.

無事. 아무 일 없이 다녀오는 것이었다. 무언갈 얻어온다는 생각도, 무언갈 할 용기도 없이 아무 계획도 짜지 않고 떠났다. 공항에서 교토로 들어가는 기차 패스를 사야 한다는 것도 4일 전에 알고 구입했으니 철저한 계획 속에 살던 일상과는 너무 달라 막상 떠나는 날엔 너무 긴장돼 몸살 기운까지 돌았다. 떠나기 전날까지 원고 마감을 해서 피로에 절은 채였다. 교토에서 유명한 사찰 한두 군데만 제대로 보고 '쉬자'는 다짐만 되뇌었다.


여행은 늘 '한 순간'으로 남았다.

여행 경험이 별로 없을뿐더러 가끔 멀리 나갈 땐 기약 없음이 두려워 딱 한 순간만 잘 기억하자는 주의였다. 그래서 도시와는 전혀 관련 없는 장면들이 떠오를 때가 많다. 이를 테면 중국 상해의 기억은 전자방이라는 골목에서 주저앉아 쳐다봤던 그림 하나다. 초록 바다에서 남녀가 서로 꼭 붙어 걸어 나오는 그림이었는데 상해 하면 그 장면만 떠오른다.


교토의 장면은 없다.

호흡이 긴 영화처럼 남았기 때문이다. 기대 없는 마음에는 뭐든 깊숙이 박히는 법이라지만, 교토는 달랐다. 교토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한국인들이 모두 '하-'라며 탄성을 지르는 이유를 나도 안 셈이다. 여행의 좋은 순간이 진짜 긴 시간으로 남겨졌으니 길게 기록해두려 한다.



혼자 길을 헤맨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구글맵이 든든하게 나를 지켜줬지만 한번 이상 지나간 곳은 왠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성큼성큼 걸어본다. 갈 길이 의심스러울 적마다 뒤를 돌아보거나 왔던 길을 헤아려본다. 매 걸음마다 아슬아슬한 기분이 좋다.


통통한 이끼와 대나무, 수많은 이름 모를 나무로 둘러싸여 초록이 무성한 은각사는 한 바퀴 도는데 20분이 채 안 걸린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웅장하게 느껴졌다. 높은 나무가 우산에 가려져 억지로 올려다보느라 그냥 비를 다 맞아버렸다.


전날 블로그를 살펴보다가 반드시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던 철학의 거리는 비 때문인지 인적 없이 휑 했다. 스페인어를 하는 외국인 커플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고요히 걸었다. 비가 제법 분주하게 내리는데도 싫지 않았다.



무엇을 기리는지도 모른 채 지나가는 게 아쉬워 잠시 멈춰 눈길을 던져보고 사진에나마 담아봤다. 길이 너무 길면 돌아갈까 싶었는데 또 뭐가 나올지 모르는 길을 끝까지 걷기로 결심하던 중, 개구리가 지키는 예쁜 종이 편집샵에 들렀다. 알고 보니 니시키 시장 안에도 있는 체인점이었지만 안 사면 아쉬울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 비싸고 아름다운 양장 노트를 샀다. (돌아와 펼치자마자 본드가 떨어져 슬펐지만 그냥 강력 접착제로 고쳐 쓰고 있다.)



소비를 한 뒤에도 한참 동안 열린 가게 없는 길을 걸었다. 외국인 커플도 편집샵에 함께 들어갔는데 종이접기를 배우느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걸어야 했다. 휴대폰 배터리는 3%. 카페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하는 와중에 겉이 빨갛게 칠해진 카페를 발견했다! 문을 열면 짤랑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커피가 담긴 잔도 엄청 무겁고 약간 모든 게 오래돼 보이는 공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교토는 어쨌든 모든 게 오래돼 보이긴 하다만.



소심한 시선이 느껴지는 사진들. 안쪽은 더 예쁜 그림과 소품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충전 중이었던 휴대폰으로 급히 찍은 터라 내부 사진은 이것뿐이다. 아무래도 고흐 그림이 있었던 것 같다. 아몬드 나무였던 것 같은데 그걸 유심히 바라보니 커피 내리기 담당인 할아버지가 관심을 보였다. 간판이 없길래 물었더니 카페 이름은 플러스라고 했다. 전혀 연관이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더 좋은 기분. 웨아유프롬? 하는 질문에 코리안이라고 하니 짧은 대화가 끊겼다.



5시 정도밖에 안 됐는데 문을 닫는다고 해서 나오면서 카페의 시선으로 찍은 길. 이래저래 둘러봐도 그저 초록초록. 초록에 묻혀 있다 온 듯하다. 교토는 그렇다면 나에게 초록으로 남은 걸까. 내가 걷는 속도 그 자체로 남은 걸까. 어떤 공간이 담고 있는 시간을 이렇게 온전히 느껴본 적이 있는지 묻는다. 늘상 변하는 시간 속에서 나아가는 걸음만 알았던 내가, 교토에서의 걸음에서는 쌓여 있는 시간을 알게 된 것 같다. 그 깊이를 헤아리기에 내 시간은 너무 모자라고, 내 걸음은 너무 가벼웠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구나, 교토는 걸음이 직접 시간을 헤아려야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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