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대학을 다닐 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런던의 어느 광장(주변에 노천카페들이 둘러싸고 있는) 한켠,
친구와 길거리 보도블럭에 걸터앉아
노점에서 파는
맛대가리 없는 핫도그인지 샌드위치인지를 씹으며
건너편에 즐비한 노천카페에서
여유롭게 식사와 음료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나중에 어른 돼서 돈 많이 벌어 여기 꼭 다시 오자“
”그러자! 저 사람들처럼 저 자리에 앉아서 저렇게 먹고 마시자"고.
그리고
속으로도 다짐했다.
"내가 십 년 안에 꼭 다시 와서 저기 앉는다"
솔직히 주머니에 경비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그때는 지금과 시대가 다르기도 했고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한계와
낯선 곳이 주는 부담감으로 인해
그 카페에 그 사람들과 섞여 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이도 차림새도 경험도
여러모로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런던 중심가에 어느 노천카페에 앉았다.
같은 카페, 같은 친구는 아니다.
찾아볼까 했으나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대낮부터 카페엔 사람들이 많았다.
잘 차려입은 현지인들, 적당한 모습의 여행객들이
맑은 공기, 따뜻한 런던의 햇살과 함께
각종 술과 음료를 마시며
자기 나라 말로 떠들고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리도 인파로 붐볐다.
몇몇은 우릴 쳐다보기도 하고
우리가 뭐 먹는지 테이블을 보기도 하며
바쁘게 혹은 느긋하게 지나쳐갔다.
저 멀리 길거리 보도블럭에 앉거나 서서
음료나 샌드위치 같은 걸 먹는 사람들도 보였다.
마치 오래 전의 나처럼.
우린
여기까지 와서 무슨 커피냐,
여행엔 낮술이라며 와인을 한 병 주문했다.
음식 두어 가지와 물도 주문해서
먹고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라 친구에게 얘기했다.
대학생 때 런던 길거리 보도블럭에서 먹은 맛대가리 없던 음식과
그 건너편 카페에 대한 얘기.
이 친구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는
왜 노천카페에 앉을 생각도 못했는지
식사값 정도는 충분히 있었음에도
우리는 왜 그렇게 궁상을 떨었냐며 웃으며 얘기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에게 없었던 것은
한두 끼 식사값이 아니었다.
저 자리에 앉아도 된다는 자격감 같은 것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간에 대한 어색함,
어쩌면 약간의 두려움 같은 것.
그 불편함이 스스로를 제한했었던 것 같다.
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확신이 없었으니까.
그냥 앉아서 주문을 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되는 건데도 그게 어려웠다.
그래서
그 긴 여행 기간 동안
그 수많은 노천카페를 지나치면서도 단 한 번도 앉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10여 년의 시간은 그냥 흐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우리는 여러 번 해외를 다녔고 좋은 곳에도 익숙해졌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술잔은 계속 비워져 갔다.
오후 3시쯤 되었을까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더 마실까 말까 하던 차에
친구가 조금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제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 와인 이까이꺼 뭐라고 걍 마셔마셔 "
"글치 우리가 대학생도 아니고, 여행이야 낼 해도 되고! 한 병 더 시켜!"
서로 신나서 한 병을 더 주문했다.
그리고
그날은 이후에 내내 호텔에서 잠만 잤다.
담날 두통은 덤이었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경험이 쌓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나를 이 자리에 어울리는,
자연스럽게 앉아서 노닥거리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어느 시절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 시절의 나는 서툴렀으나
순수한 젊음 그 자체였고
이날의 나는 자연스러웠으나
더 피곤하고 낮술덕에 반나절을 잠으로 날렸으니 말이다.
By 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