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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호][여성] 무성애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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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애자'는 대체로 에이섹슈얼(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해당 기사는 무성애 스펙트럼 및 무로맨틱 스펙트럼1)을 전반적으로 이르는 에이엄브렐라(이하 에이엄)를 뜻하는 용어로 작성되었습니다. 또한 에이엄 스펙트럼은 넓고 방대하며, 글에서 전부를 다루거나 대변할 수 없음을 알립니다.


케이크 한 조각.2)

성(性)은 임신·출산과 같은 생식 기능과 ‘여성/남성’이라는 생물학적 범주화를 넘어, 한 인간의 매력 요소 혹은 ‘사랑’이라는 감각의 전제 조건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누군가의 신체, 생김새 등에 매력을 느껴 그와 접촉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사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몸의 욕구만으로 불충분하다. 누군가와 감정적으로 밀접해지고 싶다는 느낌도 필요하다. 성적 끌림3)과 로맨틱 끌림4)을 전부 느껴야만 ‘사랑’이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끌림은 누구나 경험하고 느끼는, 다양한 모양새의 사랑 중 가장 당연하고 보편적인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은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이들. 연애하지 않거나, 섹스하지 않거나. 연애하지만 섹스하지 않거나. 섹스하지만 깊은 감정은 없거나. 혹은 모두 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경험의 부재나 신념에서 비롯된 선택이 아닌, ‘삶’인 사람들 말이다. 여기, 성애를 제외한 수백 가지의 사랑이 뾰족한 언어로 표현되지 않아 답답한 존재가 있다.


케이크 두 조각.

무성애는 섹슈얼·로맨틱 언어5)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성(性) 담론은 유성애라는 공고한 ‘정상성’의 범주 안에서만 발화했다. 연애, 스킨십, 첫 키스, 연인 등 많은 사랑의 표현이 성적 끌림과 로맨틱 끌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넘쳐나는 성애적 언어에 붙은 '비(不)'가 무성애자에게 한정된 언어의 범위 전부다. 비연애, 비섹스, 비혼……. 전유할 수 있는 말의 부재는 자아 표출의 어려움으로 연결된다. 이들은 마땅히 있어야 하는 감정 혹은 욕망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로 여겨질 뿐이다. 결국 드러나지 않는 무성애 존재는 정체성이 지워진 채, ‘미숙한’ 유성애 존재로 환원한다.

그러나 무성애자로 명명하지 않은 이도 비혼, 비연애 등과 같은 ‘무성애적 실천’을 하며,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이유로 잠깐은 무성애적 상태를 경험한다. 일상에서 무성애로 발화되는 것들을 계속 마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무성애가 존재하지 않는 듯 굴러간다. ‘무성애로 성찰하기’의 저자 이브리는 “무성애를 늘 접하고 있음에도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명명하는 사람이 나타나거나 이들이 전인구의 몇 퍼센트라는 식으로 실체를 가진 집단으로 등장하면 ‘보이지 않는 성’이 나타났다며 충격을 받은 듯 행동한다.”6)라고 말한다. 다양한 매체에서 언급되는 유성애와 로맨스는, 현실의 ‘무성애적 실천’과 무성애자를 가리고 유성애를 선망하도록 만든다.

이는 결국 유성애가 유/무성애 논의에서 특권적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성애가 기본값인 유성애 중심적 사회에서 무성애자는 성애를 부재한, ‘비정상적’ 존재로 치부되기 쉽다.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적 지향성과 정체성 담론도 마찬가지로 ‘유성애’를 본질로 간주한 채 논의를 잇는다. 이에 대해 무성애를 연구해 온 조윤희는 “기존 LGBTQ담론이 정상성으로서의 이성애 상정을 비판하며 우리의 성적 욕망과 끌림이 다양한 방향을 가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면, 무성애 개념은 그러한 비판조차도 당연시하는 인간의 본능 및 본질로서의 성적 욕망과 끌림을 문제시한다.”7)라고 언급한다. 이렇듯 무성애는 성애적 욕구 및 로맨틱 감정이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닌 비자연적인 생산물이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사랑하는 이와 애착 관계를 맺거나 ‘자연스러운 진도’에 따라 성행위의 단계를 높여나가는 것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부산물에 불과함을 말하는 것이다.

무성애자는 공백( )을 가진 존재다. 공백은 비어 있지만, 무수히 많은 개념으로 메꿔질 수도 있다. 그만큼 무성애의 개념 또한 다양하며 정체화 범주가 넓다. 흔히 무성애자라 하면 자칫 성욕이 없는 사람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성적 끌림과 성욕은 다르다. 자위하거나 성적 충동을 느껴도 이것이 누군가와 성관계 혹은 성적 행위를 갈망하는 유성애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에이엄 스펙트럼에는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에이섹슈얼, 성적 끌림을 낮은 빈도로 경험하는 데미섹슈얼, 로맨틱끌림을 낮은 빈도로 경험하는 그레이로맨틱을 포함해 수십 개의 범주가 존재하며, 이 외에도 아직 명명되지 않은 넓은 존재가 있다. 이러한 용어는 무성애자가 전유할 언어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함의를 둔다. 나의 모습을 나타내는 명칭을 통해, 무성애자들은 유성애 사회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스펙트럼 전부가 기억되거나 새로운 용어로 기록될 수는 없지만, 존재를 명명하고 언어화하려는 시도에서부터 공백( )은 채워진다.


케이크 세 조각.

23살 누룽지.
‘따끈한’ 누룽지를 좋아한다. 최근에 자주 먹은 음식도 누룽지다. 짧은 기장의 머리 위엔 언제나 캡모자가 씌어있다. 팔과 다리는 기다랗지만, 안경과 눈매는 동글동글하다. 최근에는 괴담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쉽지 않은 기록일 텐데, 제안을 수락해 주신 이유가 있나요?

무성애자로 정체화하며 정체성에 대해 알아가고 저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근데 세상에서 무성애자가 어떻게 다뤄지는지는 뻔하잖아요.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죠. ‘이런 사람도 있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말씀해 주셨듯 한국에서는 특히 ‘무성애’라는 개념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하나의 정체성이 아니라 비혼 등으로 나타나는 단기간의 행위로 치부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고요. 무성애의 개념도, 정의도 모두 정체화하는 이에 따라 제각각이죠. 누룽지는 무성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누룽지만의 정의가 궁금합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유성애적 관계없이도, 이 세상을 충분히 즐기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인 것 같아요. 유성애적인 행위를 굳이 삶에 집어넣지 않아도 재미있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애초에 당연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누룽지가 무성애의 개념을 접하고 감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어렸을 때부터 연애가 궁금하지 않았어요. 관심이 없었죠. 쏟아지는 연애 프로그램이나 로맨스 장르의 콘텐츠를 봐도 흥미로웠던 건 순간이었어요. 나중엔 질리다시피 했고요. 그 반응도 제가 정말로 설렘과 재미를 느껴서인지, 아니면 학습해서 나온 건지도 헷갈렸어요. 확실한 건 제가 그 감정을 굳이 경험해 보고 싶진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이상한 건가' 고민했었는데, SNS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마주하며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는 걸 알았죠. 되게 반가웠어요.


그렇다면 현재 누룽지는 자신을 어떻게 정체화하고 있나요? 최대한 느끼는 대로 답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로맨틱한 감정이나 섹슈얼한 끌림이 아예 없진 않아요. 그렇지만 친구들이랑 맛있는 걸 먹고 웹소설을 읽는 시간이 제게는 더 중요해요. 누군가 제게 호감 표시를 한다고 해도 연애로 발전할 것 같지 않아요. 상대방이 누구든지 간에요. 제가 누군갈 그만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연인 관계로 나아가고 싶은 감정도 없어요. ‘만나본 적 없어서 그런 건가?’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알기 위해서 경험해 보고 싶진 않아요. 애초에 선택지에 없거든요. 비연애는 연애와 비연애라는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떠한 ‘삶의 방식’을 선언하고, 선택한 것이잖아요. 근데 저는 그냥 비연애 상태가 ‘삶’이에요. 방식이 아니라. 계속 이렇게 살아왔어요. 느끼기만 하던 걸 말로 표현하려니 어렵네요.


정체화 후 답답하다고 느끼거나, 어려움을 겪었을 때가 있을까요?

무성애는 비가시화의 끝판왕이잖아요. 관련 연구나 정보를 찾아보려 해도 없더라고요. 조금 나오나 싶으면 죄다 영어예요. 무성애를 집중적으로 다룬 한국 연구는 손에 꼽을 정도예요. 정보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죠. 미디어 노출 빈도도 현저히 낮고요. 그래서 접근성 측면에서 유독 힘들었던 것 같아요.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은데, 나를 알아가려면 황무지에서 정보를 긁어내야만 하는 상황이니까요.


앞서 정체성에 대해 답변하면서,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말해주셨어요. 많은 무성애자가 감정을 언어화하기 어려워할 것 같은데, 정보량이 부족한 것 외에 다른 이유가 또 있을까요?

누구를 성애적으로 좋아하거나, 함께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 너무너무 당연한 세상이니까요.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존재다 보니, 사람들에게 나를 납득시키는 건 차치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는 거죠. 언어화해서 말하더라도 전달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연애를 해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란 반응을 많이 마주하죠.


누룽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람들에게 무성애의 존재 자체를 인지시키는 게 우선시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무성애가 가시화되기 위해선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할까요?

일단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는 게 가장 직관적이고 쉬운 방법이란 생각이 들어요. 연구도 많이 되어야겠죠.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도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아요. 퀴어 중에서도 무성애자는 배제되거나 비가시화되는 경우가 꽤 있어서요.


네, 무성애자는 퀴어 내에서도 특히 무성애자만의 커뮤니티나, 모임이 잘 없는 것 같아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개선할 방법이 있을까요?

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고민을 많이 해봐야겠네요. 오프라인 모임이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해요. 무성애를 다룬 일본 드라마를 본 적이 있거든요.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이란 작품이에요. 작중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장면이 있어요. 누구는 파트너가 있고, 아예 그런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요. 무성애자로 정체화하더라도 각각의 삶과 생각이 다양하거든요. 현실에도 그런 모임이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아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존재를 만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23살 거북이.
거북이다. 행동은 굼뜨지만, 마음은 급하다. 여름날 하늘하늘한 민소매 원피스를 입는 것을 좋아하며, 겨울엔 부드러운 목도리로 코와 입을 칭칭 두르고 다닌다. 최근에는 예쁜 인조 속눈썹을 구매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가방에는 언제나 남자 아이돌의 키링이 달려있다.


무성애의 개념을 접하고 감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무성애라는 개념은 안 지 꽤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다가왔던 건 작년이 처음이었어요. 주변인들과 나를 비교해 보며 ‘섹스를 원하지 않는 게 일종의 정체성인가?’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 연애도, 섹스도 안 하는 것 같았거든요. 물론 경험하진 않았지만, 경험해 보더라도 지금과 상태가 쭉 동일할 것 같은 거예요. 내 몸을 드러내고 남과 성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이 상상이 안 돼요. 그냥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어려워요.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의 뽀뽀, 포옹 등을 포함해서 나와 남의 살이 접촉하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근데 심지어 키스는 입안 잔여물이나 치석을 다 확인하고 공유하는 거잖아요….


거북이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감각을 느끼고 있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일단 모르는 사람의 옷이 스치는 건 당연히 싫고요. 손을 잡는 작은 접촉도 저에게는 조금 이상한 행위라고 해야 할까요. 친구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져도요. 애정과 온기를 나눈다기보다 물렁한 무언가가 닿는 것에 가까운 느낌이에요. 좋진 않지만, 뚜렷한 불쾌감은 아니에요. 거북하다는 느낌보다는 ‘뭐지’ 정도의 감각이죠. 뭐, 더 나아간다면 거북하겠죠. 특히 섹스한다고 가정했을 때, 봐야 하는 남의 땀이나 신체도 싫지만, 내 생식기, 겨드랑이, 온몸 구석구석이 만져지고 공유된다는 부분이 더 싫어요.

하지만 저는 성적인 것을 다루는 영상물이나 콘텐츠를 보거든요. 성욕도 있고요. 그걸 타인과 나누고 싶지 않을 뿐이죠. 근데 또 콘텐츠는 재미있게 보고, 잘생기고 몸 좋은 아이돌 직캠 보고 좋아하기도 해요. 그러니 이게 미적인 것을 보고 감탄하는 건지, 성적 끌림을 느끼고 있는데 모르는 건지 의문도 들고요. 성적 끌림이 뭔지도 모르겠어요. 답이 안 나와요.


현재 고민하고 걱정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지금의 거북이는 자신을 어떻게 정체화하고 계시나요? 최대한 느끼는 대로 답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정말 어려운 질문이에요. 대부분의 사람이 정체성이나 지향성에 대해 고민할 때 느끼는 욕구가 내가 ‘감정하는 것들이 뾰족한 단어로 표현되었으면 좋겠다’라는 감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유성애자’ 하면 하나의 단어로 표현이 되고 올바른 길이 있는 듯한데, 해당 범주에서 벗어나면 대체할 한 단어가 없는 거예요. 수백 가지의 길이 생기고요. 완벽하게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남과의 성적인 행위는 싫고요. 연애는 하고 싶은 것 같아요.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었으면 하는 욕망은 있어요.


희망하는 긴밀한 관계와 연애가 궁금해요. 어떤 관계를 꿈꾸나요?

사실 이 ‘긴밀한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하긴 어려운데요. 사회에서 말하는 연애 관계는 성적 끌림을 전제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저에게는 애초에 해당 측면이 배제되어 있어요. 그런데 친구와 연인을 구분 짓는 큰 요소도 성행위잖아요. 그렇다 보니, 친구와 연인의 범주를 확정해 말하기 힘들어요. 가끔은 제가 단짝을 원하는 건지, 연인을 원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마음속으로 느끼기에 둘은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긴 해요. 설명하긴 어렵고, 관계가 형성된다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거북이의 고민과 정체성 혹은 원하는 관계에 대해 다른 이들과 대화해 본 적이 있나요?

네, 두 번 정도 얘기했는데 고등학교 친구에게 얘기했을 때 진짜 웃겼어요. 아까도 언급했지만, 저는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작년에 처음 했거든요. 그래서 엄청나게 고심하다가 친구에게 “나 무성애자인 것 같다”라고 말했죠. 저조차도 제 정체성에 대해 확신이 없었으니까요. 근데 이 친구가 “난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거예요. 예상 못 한 반응이었죠. 아쉽게도 이유는 못 물어봤어요.


앞으로 무성애가 가시화되기 위해선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할까요?

무성애 스펙트럼이 단일하게 여겨져선 안 될 것 같아요. 성욕 있는 사람, 섹스하는 사람, 연애하는 사람, 하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한데 비섹스, 비혼 등만이 무성애자의 실천 행위, 무성애자의 정체성으로 판단되잖아요. 유성애자 중에서도 비혼과 비섹스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정말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넓은 사람들이 있는데 진짜 무성애자와 가짜 무성애자를 판별하게 될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스펙트럼이 꾸준히 확장되다 보면,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체화하고 무성애도 점차 가시화되지 않을까요.



1) 무성애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지향성을 말하며, 무로맨틱은 로맨틱 끌림을 느끼지 않는 지향성을 뜻한다. '스펙트럼'은 빛의 파장의 정도를 나열한 순서에서 가져온 용어로, 정체성의 범주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다. 어떠한 성적 취향 혹은 질병 등은 단순히 양극단의 '있음/없음'으로만 나눠지지 않고 그사이 다양한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빛 스펙트럼은 여러 색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적으로 변화하며 나타나는데, '스펙트럼' 역시 이러한 연속성과 색상 경계의 모호함을 강조한다. 적거나 미미한 정체성일지라도, 혹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지라도 범주에 포용하겠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2) “Cake is better than sex”라는 무성애자 슬로건에서 착안해 인용한 말이다. 본문에서 후술하겠지만, 무성애자 중에서도 타인과 섹스하거나, 때에 따라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림을 느끼는 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3) 성적 끌림은 성적 욕구가 어떤 대상을 향하도록 하는 힘을 의미한다. 즉, 어떤 대상에게 성적인 접촉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서 후술할 예정이다.

케이 무성애 활동가. 「아무에게도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 나는 나다」. 『한겨레』. 2016.07.22.

4) 로맨틱 끌림과 성적 끌림은 동일시되기 쉽지만, 엄연히 다르다. 로맨틱 끌림은 누군가와 깊은 관계로 이어지고 싶다는 감정이며, 익히 알고 있는 '로맨틱'의 설렘과 두근거림이란 감정에서 확장된, 상대를 향한 긴밀한 관계 맺음 욕구, 유대감을 의미한다.

위의 글.

5) 섹슈얼은 성적인 것, 로맨틱은 연애와 낭만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섹슈얼·로맨틱은 '섹시하다', '설렌다' 등 대부분 특정 대상을 향한 표현 수단의 언어로 이용되었다. 욕망하는 상대가 없는 무성애자는 단어의 의미를 직접 느끼지 못한 채 관용적인 감탄사처럼 쓰거나, 사용 시 어색함을 느끼기도 한다.

6) 이브리. (2014). 무성애로 성찰하기. 여/성이론, 0(30), 261쪽.

7) 조윤희. (2023). 명사 혹은 형용사로서의 무성애. 문화과학, 0(116), 246쪽.



참고문헌

이브리. (2014). 무성애로 성찰하기. 여/성이론, 0(30), 257-267.

조윤희. (2023). 명사 혹은 형용사로서의 무성애. 문화과학, 0(116), 245-259.

케이 무성애 활동가. 「아무에게도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 나는 나다」. 『한겨레』.

2016.07.22. https://www.hani.co.kr/arti/society/rights/753553.html(2025.01.29.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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