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88호][여성] 모순

모래

6.jpg


작가의 말1)

이름과 사주에 남자와 아이가 없어서 개명을 강요하는 가족과 살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퀴어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티 페미니스트였을 땐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래디컬 페미니스트일 때는 머리를 자르고 여자와의 우정을 즐기다가, 여대를 다니면서 만난 애인과 친구들 덕분에 지금은 더 다양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혐오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사랑을 합니다. 당신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지 않나요?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그럴 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분명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


1.

삶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허구에 기반해 창작된 이야기지만, 삶에는 거짓이 없다. 하지만 때로 삶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다. 우연과 필연이 만들어낸 순간들은 이야기를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전개한다. 믿기지 않고, 믿을 수도 없는 순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 싫은 타자는 영원히 내 삶에 불가사의로 남는다. 하지만 삶에는 그것들을 지우는 기능이 없다. 하물며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그 불가사의가 되는 경험을 마주한다. 그럴 때면, 본질은 우리에게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말에는 괄호가 붙지 않고, 행동에는 해석이 따라오지 않는다. 각자의 사정을 남이 읽기 좋게 풀어내기란 어렵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자신을 벗겨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마주할 때, 비로소 '나(주인공)'는 맥락 속에 자리한다. 삶의 배경을 이해하는 일은 그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니,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2016년 5월 17일 화요일. 날씨 : 완전 여름 쨍쨍, 땀나서 앞머리 다 떡졌다 ㅠㅠ


오늘은 서연이랑 둘이 하교했다. 만나자마자 서연이가 “김다은한테 틴트 바른 거 예쁘다고 했더니 그런 것도 외모 평가라는 거야 어이없어”라고 하면서 화를 냈다. 서연이 생각에는 다은이가 페미가 아니라 메갈2)이라나 뭐라나? 또 서연이가 “나는 칭찬을 해준 건데 외모칭찬도 평가고 코르셋3)이래 존나 이상하지 않아?”라고 물어봐서 그냥 맞장구만 쳐 줬다. 여적여4)라는 게 이런 건가? 아무래도 서연이가 다은이보다 못생기긴 했으니까. 집에 와서 다은이한테 서연이가 너 메갈이라고 뒷담 깠다고 페메5)를 보냈더니 최서연은 벌써 아다 떼인 걸레니까 거르라는 답장이 왔다. 어제 다은이가 나보고 시발 쓰지 말라고 했는데 걸레는 써도 되는 건가.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다은이가 자기는 여성 우월주의자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라고 했으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외모 칭찬도 평가라면, 다은이가 매일 하는 화장과 긴 머리도 코르셋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은이는 진짜 페미니스트가 맞나?

아까 페메하면서 다은이가 ‘강남역 묻지 마 살인사건’6)도 여자라서 죽은 거라고 같이 추모하러 가자고 했다. 다은이는 어려운 말만 한다. 다은이 때문인지 페미니즘도 어려운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살면서 페미니즘이 필요한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냥 남자랑 여자랑 둘 다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


2020년 3월 18일 수요일. 날씨 : 맑음.


정혈7)이 터져서 아침부터 몸이 무거웠다. 심지어 대숲8)에 변수정 페미냐는 글이 올라와서 그거 신경 쓰느라 급식도 제대로 못 먹었다. 몰려다니면서 야동 얘기나 하는 남자애들이 쓴 질문인 게 뻔했다. 아니면 걔네 여자친구거나. 페미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건 왜 무서울까? 학교에 머리 짧은 여자애가 나밖에 없고, 탈코 페미로 소문났을 때부터 이런 공격은 예상했다. 그래도 학교에 페미 스피커가 나뿐이라는 사실은 절망적이다. 오늘은 유독 피곤한 날이다. 체육 시간에 체육부장인 유나가 자기는 피구 말고 축구가 하고 싶다면서 울었다. 유나는 남미새9)인 데다가 남자 아이돌도 못 놓는다. 페미니즘은 관심도 없고 취미가 마카롱 사 먹기랑 다꾸10)다. 근데 남자애들만 운동장을 쓰게 해주는 게 불만이라면서 억울하다고 했다. 진즉에 여성 인권에 관심 좀 가지지. 좀 울더니 자기 남친한테 가서 공 달라고 떼쓰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유나는 자존심도 없나? 걔 남친이 나한테 변수정 페미니까 너도 조심하라고, 같이 놀지 말라고 했는데도 아직 사귀는 이유가 뭘까? 친구보다 남자를 선택하다니. 역시 백래시11) 맞은 한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유나는 왜 한남이랑 사귀는 거지? 이게 다 한남 때문이다. 아~ 한남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러고 보니 아까 유나 인스스12)에 n번방 엄중처벌 청원13)이 올라왔다. 자기 남친은 25만 명 안에 포함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성애에 미친 한녀를 이해하는 건 포기해야겠다.


2024년 12월.


예원이랑 헤어졌다. 내가 메이드복 좀 입었다고 가짜 페미라니! 물론 섹스하면서 메이드복을 입는 게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일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메이드복을 입은 건 예원이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 애랑 불법 사이트에 있는 그렇고 그런 만화를 공유하면서 서로의 욕망을 이야기했으니까. 그렇지만 난 페미니스트다. 내 학잠은 아직 민주동산에 있고,14) 예원이랑은 페미니즘 소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생각해보니 예원이를 만나면서 난 조금 이상한 페미니스트가 된 것 같다. 예원이의 이상형에 맞추기 위해서 머리를 기르고, 다시 치마를 사고, 화장을 시작했다. 4B15)를 실천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예원이는 머리가 짧은 여자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가부장제 질서에 부역할 일도, 아이를 낳을 일도 없을테니까. 그런데 예원이가 여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자도 아니기에 이전처럼 젠더론 안 산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사랑하는데 부정할 수는 없다. 예원이는 내가 정답이라고 믿었던 많은 것들을 달리 바라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를 다시 정체화했고, 내게는 새롭게 속할 곳이 필요해졌다.

꼭 메이드복 때문에 헤어진 건 아니다. 다툰 이후에도 우리는 함께 광장에 나갔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발언16)을 들었다. 다녀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도 있었다. 왜 하필, 지금 그런 발언들이 나와야 하는지 예원이가 물었고 나는 답했다. 하지만 메이드복을 입는 페미니스트는 여성 인권과 연대에 답할 자격이 없었다. 심지어 홍조 블러셔 범벅에, 트위터 북마크에는 여성을 착취하는 포르노가 가득하고, 사랑을 확인받고 싶을 때마다 임신하고 싶다고 말하는 레즈비언이라면 더욱. 문득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미워하는 쪽이 더 빠를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이별을 결심했다. 내 애매함에 신물이 난다.

나를 이루는, 나와 분리되지 않는 많은 것들을 분리해야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나일까?


2.

어떤 삶은 각주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끝끝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삶을 이루는 핵심이 되기도 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 분리되지 않는 것, 이해받기 어려운 것이 나를 이룬다는 말은 결국 자신의 교차하는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페미니즘을 부정하던 날, 마침내 페미니즘에 매료된 순간, 내가 알던 페미니즘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경험이 차례대로 존재할 따름이다. 세 명의 페미니스트에게 세 개의 페미니즘이 있는 것처럼 읽힐지라도 그들은 각자의 시간 선에서 동일한 존재로 살아왔다. 혼란스럽지만, 모든 것은 '나(주인공)'였다. '나'는 ‘좋은’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혹은 ‘진짜’ 페미니즘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결국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일에 불과했다는 건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나'의 페미니즘은 SNS와 함께했다. 그곳에 정답이 있다고 믿었다. 다만 SNS에 기반한 ‘제4물결 페미니즘’17)이 차별과 혐오 또한 빠르게 재생산한다는 건 알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는 개인의 정체성을 단일한 것으로 상정하고 서로 간의 차이를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같은 정체성이 아니라면 연대할 수 없다는 인식은 차별과 혐오의 말로 탄생해, 다른 정체성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주변부로 밀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안전한 공간에 남을 수 있는 사람 역시 끊임없이 심사의 대상이 된다. '생물학적 여성'18)이 아닌 사람은 태생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여성은 자궁이고, 모든 것은 자궁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여성일지라도 '4B'를 실천하지 않거나, 남자에게 끌림을 느끼는 이성애자거나, 성욕을 가졌거나, 꾸밈노동을 한다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것’들은 허락되지 않으며, ‘우리’ 페미니스트의 숭고한 가치와 목표를 저해하는 방해물이다. 성 노동자, 장애인, 퀴어, 이주민, 탈가정/대학 비진학 청년은 페미니즘에 말을 '얹으면' 안 된다. 페미니즘은 단일화 되어야만 하며, 균열과 잡음의 목소리는 사라져야만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페미니즘의 '성과'에 '편승'해서도 안 된다. 여성 인권은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의제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울타리에 가둬, 지배권력과 질서에 저항할 힘을 잃어버리도록 만드는 말들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페미니즘에는 정답이 없다. 페미니즘은 끊임없이 기성 질서에 반문을 제기하고, 소외된 약자와 연대하는 학문이자 사상이다. 정답은 오답을 전제하고, 진리는 누구에 의해 쓰였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폭력이 될 수 있다. 페미니즘에 정답이 없기에 우리는 저항할 수 있다. 정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닌, 틀을 부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다른 의미에서 이 말은 여성 인권 운동이 모두의 인권을 위한 운동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파이를 나눠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누가 파이를 만들고, 분배했는지 따져 묻는 운동이며 그 과정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파이를 굽는 연대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누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지, 어떤 모습이어야만 페미니스트인지 말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스트에서 가장 먼 모습이다.

디지털 공간에서 논의된 페미니즘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지만, 이를 무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전에 페미니즘이 전문화된 영역에서 논의된 후, 대중운동으로 확산했다면 지금은 대중들이 SNS에서 논의를 만들고 여성운동이 그것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19) 하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더 많은 사람과 더 넓은 곳에서 나눌수록 힘을 갖는다. 보이지 않는 말에 힘을 싣기 위해서, 우리에게 만남이 필요하다. '나' 또한 잊을 수 없는 만남‘들’ 덕분에 정답이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 더 많은 이들과 연대할 수 있었다. 놀랍도록 생생하고, 낯선 모습을 한 이들에게서 그리움이나 연민, 동질감과 수치심을 느끼며 사실 그들이 내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과 내가 다르지 않고, 어쩌면 우린 같을지도 모른다는 걸. 미지에 대한 불쾌감은 맥락 속에서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만남’에 대한 기대가 사회의 억압과 차별을 무시하고, 개인의 인식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자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에게 각자의 모순이 분명히 존재하고, ‘나’로서 살기 위해서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모두가 ‘나’로 살기 위해서는 이해와 사랑이, 포용과 성찰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것은 ‘나’로 살기 위한 호소이자 선언이다. 나는 단일하지 않고, 당신을 부정하지 않으며, 우리는 단절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누구나 페미니즘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누구도 페미니스트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민중 언론 참세상의 2025 신년기획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퀴어-네트워크(이하 ‘민페퀴네’)'20) 활동가 인터뷰>에는 각자의 영역에서 투쟁하며, 연대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민페퀴네 활동가들은 여성이고, 페미니스트이면서 다른 무언가로 연결되어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한다. 활동가 ‘인아’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억압자들이 억압하기 쉽게 ‘너는 퀴어, 너는 여성, 너는 장애인’ 이런 식으로 분리해 놨을 뿐이지, 결국 우리에게 다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거를 보는 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들이 어떻게 억압하는지 잘 보고 그걸 못 하게 하는 방식을 빨리 찾아내야 나한테 가해지는 억압에도 대응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활동가 ‘인아’


이처럼 서로 다른 존재들의 삶이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과 내가 연결되어 ‘우리’가 될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개인은 영원히 개인으로 남을 뿐이므로, 우리는 나의 존재를 통해 다른 사람을 환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각자의 공간에서도 따로 또 같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제 우리 발화(發話)하자. 선형의 물결에서 벗어나 파동이 되자. 당신의 복합적인 삶과 지위를, 지워져서는 안 되는 교차하는 맥락을, 현실에서 느껴지는 괴리의 감각을 발화(發花)하자. 다시 한번 이것은 소설이 아니며, 삶에 관한 이야기다. 끊임없는 갈등과 자책 속에서, 유한하고 다채로운 모습을 한,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의 이야기.



1) 이 글은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글에서 등장하는 인물, 단체와 그 밖의 모든 명칭은 허구임을 밝힘.

2) 2015년부터 운영된 여성 커뮤니티 ‘메갈리아’의 줄임말. ‘메갈리아’는 전신인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를 여성주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 빗대면서 지어진 이름이다. 페미니즘과 정동 정치학을 연구한 김보명은 “남성을 우선시하는 ‘부모’와 ‘남녀’ 등을 ‘모부’와 ‘여남’으로 바꾸어 부르는 사례, 남성의 작은 성기나 무능력을 비웃고 멸시하는 사례, 성범죄나 가정폭력 등 일탈적 성행위를 저지르는 남성을 비난하고 훈육과 처벌을 가하는 사례 등은 모두 문법적 전도를 통해 여성을 권력과 권위의 자리에 둔다.”라고 정리한 바 있다. 그의 연구처럼 메갈리아 사이트는 당시 ‘기행’적으로 평가받은 행동을 통하여 구조적 불평등의 전복을 시도하였다. 세간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해당 활동의 결과로 페미니즘이 온라인을 통해 빠르게 '대중화'되었다는 것이다.
김보명. (2018). 혐오의 정동경제학과 페미니스트 저항. 한국여성학, 34(1), 12쪽.

3) ‘코르셋’ 혹은 ‘꾸밈노동’은 중세 여성이 가는 허리를 만들기 위해 드레스를 입기 전 착용하는 도구인 코르셋처럼 여성에게 강요된 미의식과 수행을 의미한다. 디지털 노동과 페미니즘을 연구한 김애라에 따르면, “10~20세대에게 코르셋은 비단 ‘외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평등한 경쟁’을 저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자유주의 논리에 따라 ‘꾸밈노동’에 투자하는 시간과 돈을 남성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요소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운동의 일환으로서의 ‘탈코르셋 운동’으로 이어졌다.
김애라. (2019). ‘탈코르셋’, 겟레디위드미(#getreadywithme) : 디지털경제의 대중화된 페미니즘. 한국여성학, 35(3), 45쪽.

4) ‘여자의 적은 여자’의 줄임말. 여성 간의 ‘기싸움’ 문화가 존재한다는 기대가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이를 미러링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가 ‘보돕보(보지가 보지를 돕는다)’ 혹은 ‘여돕여(여자가 여자를 돕는다)’로, 자매애와 연대를 강조한다.

5) SNS 플랫폼 ‘페이스북’의 대화 서비스 ‘페이스북 메시지’의 줄임말.

6) 2016년 5월 17일 한 여성이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일면식 없는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처음 사건이 알려지고 ‘묻지마 살인’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으나, 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피해자로 여성을 물색하고 선정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성혐오 범죄’로 명명되었다. 이에 대한 추모 물결은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논의와 시위로 이어졌다. 지난해 8주기 추모 행동이 진행되었다.

7) 정혈(精血)이란, ‘깨끗한 피’라는 뜻으로 월경(月經)의 대체 용어로 등장했다. ‘달마다 하는 것’이라는 뜻의 월경 대신,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긍정하여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8) 대나무 숲의 줄임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동화에서 따온 이름으로, 비밀을 터놓고 토론하는 익명 커뮤니티이다. 학생들의 제보가 관리자를 통해 SNS에 익명으로 기재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9) ‘남자에 미친 새끼’의 줄임말. ‘남자의 실수에는 관대하지만, 여성에게는 각박한 여성’의 이미지로 사용되며 미디어에서 조롱거리로 빠르게 확산했다.

10) ‘다이어리 꾸미기’의 줄임말. 다이어리를 꾸미는 데 사용되는 문구류에 여성이라서 더 많은 돈을 내는 ‘핑크 택스(Pink Tax)’가 부과되었기 때문에 일부 SNS에서 탈코르셋 운동과 함께 이를 자제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이와 함께 거론되었던 소설 읽기 또한, 자기계발서나 경쟁력을 기를 수 있는 독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한다. 즉, ‘여성의 취미’는 남녀 임금 격차에 기인한 여성의 가난을 심화시키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생산성이 없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11) ‘백래시(Backlash)’란, 미국의 저널리스트 수잔 팔루디(Susan Faludi)의 동명의 저서에 어원을 둔다. 그는 이에 관하여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은 여성들이 '완전한 평등'이라는 결승선에 도착하기 전에 멈춰 세우려는 선제공격”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백래시는 본래 진보적인 사회 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발을 뜻하나, 일부 SNS에서는 ‘4B’를 실천하지 않거나, 꾸밈노동을 지속하는 여성 등 ‘페미니즘’을 저해하는 행위를 통틀어 표현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12) SNS 플랫폼 ‘인스타그램’의 사진 공유 서비스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줄임말.

13) 2020년 3월 18일, ‘텔레그램’ 채팅방(일명 n번방)에서 성 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운영자 조주빈에 대하여 신상 공개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재되었다. ‘n번방 사건’ 이후 처벌의 사각지대에 놓였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엄중 처벌 요청과 관심은 ‘n번방 방지법 (전기통신사업법 및 정보통신망법 개정법)’ 국회 입법으로 이어졌다. 다만 해당 법안은 국내 대리인을 지정하지 않은 ‘텔레그램’에 적용되지 않아 처벌이 어려우며,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다.

14) 지난해 11월부터, 본교에서 동덕여자대학교 대학 본부의 독단적인 공학 전환 반대에 맞서 동덕여자대학교 재학생과 연대하기 위해 민주동산에 학교 로고나 학과명이 새겨진 점퍼를 놓는 움직임이 있었다.

15) ‘4B’ 혹은 ‘4B 운동’은 ‘비성관계, 비연애, 비혼, 비출산’을 지향하는 삶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여기서 B는 비(非)의 음을 따온 것으로,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과 함께 등장하였다. 가부장제에 저항하고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거부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16) 2024년 12월 3일 내란사태 이후, 광장은 넓어지고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국회와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거제, 이태원, 한남동까지. 시민들은 집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발언을 통해 함께 연대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퀴어, 성노동자, 농민, 이주민 등의 다양한 정체성과 의제들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더 많은 이들이 광장에 모일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정체성 소개는 “자신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하겠다는 환대”이자, “우리의 세계를 안전하고, 더 넓은 공간으로 만들어가자고 손을 흔드는 것”이다.

박주영. 「우리가 함께 만든 광장, 배제하지 않고 연결되어」. 『일다』. 2025.01.09.

17) 온라인을 통해 사건을 알리고 사람들을 모아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페미니즘 운동을 ‘제4물결 페미니즘’이라고 한다. 의제에 대한 의사소통이 신속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더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페미니즘의 확산 및 대중화가 가능하였다는 특징을 가진다.
김소라. (2021).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 ‘잇기’ : 프루던스 체임벌린 『제4물결 페미니즘』, 김은주 외 『출렁이는 시간들』, 에디투스 2021. 창작과비평, 49(3), 483쪽.

18) 생물학적 여성이란, 국가가 생물학적으로 지정한 XX 염색체를 가진 여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 짓기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이성애중심주의를 강화하며, 개인의 성적 지향성을 획일화시킨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성을 착취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폭력과 혐오에 저항해야만 한다.

19) 김지효. (2021). 페미니스트‘들’의 인스타그램 : 디지털 평판과 SNS 페미니즘. 한국여성학, 37(4), 149.

20)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퀴어-네트워크(이하 ’민페퀴네‘)’는 윤석열 탄핵을 위해 모인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다. 뉴그라운드,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불꽃페미액션,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언니네트워크, 장애여성공감, 페미당당, 플랫폼C,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FDSC, FFF, 총 16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페미, 퀴어, 네트워크 사이에 하이픈(-)은 포괄할 수 없는 더 많은 정체성을 담기 위해 쓰였다.



참고문헌

강석영. 「“생리 아닌 정혈” 대구 여성들의 ‘정혈대 연대’가 시작된다」. 『민중의 소리』. 2020.01.14. https://www.vop.co.kr/A00001461023.html(2025.01.23. 접속).

강푸름. 「“여성 목소리 되찾아야…앞으로 더 설치고 생각하고 떠들겠다”」. 『여성신문』. 2016.12.22.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575(2025.01.21. 접속).

구점숙. 「[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여적여’, 진실 혹은 거짓?」. 『한국농정』. 2022.02.27.

https://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6720(2025.01.21. 접속).

김보명. (2018). 혐오의 정동경제학과 페미니스트 저항. 한국여성학, 34(1), 1-31.

김애라. (2019). ‘탈코르셋’, 겟레디위드미(#getreadywithme) : 디지털경제의 대중화된 페미니즘. 한국여성학, 35(3), 43-78.

김소라. (2021).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 ‘잇기’ : 프루던스 체임벌린 『제4물결 페미니즘』, 김은주 외 『출렁이는 시간들』, 에디투스 2021. 창작과비평, 49(3), 482-486.

김슬기.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고 대나무 숲으로 향하는 청춘들!」. 『매일경제』. 2015.10.26. https://www.mk.co.kr/news/special-edition/7026226(2025.01.24. 접속).

김지효. (2021). 페미니스트‘들’의 인스타그램 : 디지털 평판과 SNS 페미니즘. 한국여성학, 37(4), 119-154.

김형은. 「n번방: 또 다른 팬데믹… 최전방 활동가들이 말하는 사건의 핵심은?」. 『BBC NEWS 코리아』. 2020.05.29. https://www.bbc.com/korean/features-52845264(2024. 01. 21. 접속).

독자 기자. 「메갈리아로부터 떠날 때」. 『레디앙』. 2016.09.12.

https://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02217(2025.01.27. 접속).

류민. 「여성, 퀴어, 모두의 해방, 모두의 민주주의」. 『참세상』. 2025.01.22. https://newscham.net/articles/111802(2025. 02. 02. 접속).

박권일. 「‘메갈리아’의 세계 지배」. 『한겨레』. 2023.12.01.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18687.html(2025,01.21. 접속).

박주영. 「우리가 함께 만든 광장, 배제하지 않고 연결되어」. 『일다』. 2025.01.09. https://www.ildaro.com/10089(2025. 01. 25. 접속).

변정희. 「[중앙로365] 굿바이, 핑크택스!」. 『부산일보』. 2024.04.22.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4042217473855351(2025. 01. 24. 접속).

배시은. 「‘강남역 살인사건’ 8년 흘렀지만 국가 차원의 ‘여성혐오 범죄’ 개념 정립 안 돼

」. 『경향신문』. 2024.05.17. https://www.khan.co.kr/article/202405171804001(2025.01.21. 접속).

손희정. 「여기는 지옥, 그렇다면 지금 4B운동」. 『한겨레21』. 2024.11.15.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365.html(2025.02.02. 접속).

이마루. 「[엘르보이스] 사회가 거대한 남미새라면」. 『엘르』. 2024.11.11. https://www.elle.co.kr/article/1872662(2025. 01. 24. 접속).

이지혜. 「갈길 먼 ‘n번방 방지법’…일보전진했지만 늑장 처리 비판」.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42737.html(2025. 01. 24. 접속).

최은수. 「[사이다IT] N번방 방지법 있어도 텔레그램 못 잡는 이유」. 『뉴시스』. 2024.09.02. https://www.newsis.com/view/NISX20240902_0002871040(2025. 01. 24. 접속).

홍명교. 「내전의 코드가 된 '집게손' 논란, 굴절된 불만과 백래시를 부르다」. 『프레시안』. 2024.08.01.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73115283460558?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2025.02.01 접속).

작가의 이전글[88호][여성] 무성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