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는 이 단어가 마치 마법처럼 떠돌기 시작했어요. 바로 “중립 기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르르 몰려가서 이게 맞네, 저게 맞네 싸우는 것보단, 한 발 뒤에서 흐름을 지켜보겠다는 굉장히 ‘이성적’인 표현이지요. ‘현명’한 솔로몬의 판단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말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이상해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말은, 사실 그 무엇보다도 치우쳐 ‘있겠다’라는 뜻이잖아요! ‘중립’이라는 게 정말 가능하긴 한 걸까요? 그리고 ‘중립’을 선언하는 사람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 문장을 볼 때마다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셨다면, 잠시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아, 물론 이 글이 근맥 전체의 의견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B와 D 사이, P 그리고 C
*P(Positioned Subject), C(Choice)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 장 폴 사르트르가 남긴 고전 명언은 현대인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수한 선택의 연속’ 안에서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남기면서. 하지만 일종의 ‘시대 정신’이 된 듯한 ‘중립 기어’를 떠올려 보라. 범지구적으로 동의하는 삶의 철학과도 조금 다른 갈래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 ‘다른’ 이야기일까?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먼저, ‘중립’과 ‘중립 기어’란 무엇일까? ‘중립’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간적인 입장에 섬. 또는 그런 입장.”1) 즉 어떠한 사안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가 녹아 있는 인터넷 신조어 ‘중립 기어’는 “어떤 뉴스의 정보가 확실해지기 전까지 섣불리 의견을 제시하지 말 것”을 이르는 말이다.2) 온라인이 오프라인보다 훨씬 익숙한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사회적 가치관은 일종의 ‘현상’으로 등장했다. 사실 관계 여부를 단번에 파악하기 어려운 온라인/인터넷 환경의 특성상, ‘중립 기어’는 섣부른 확단이 낳을지 모르는 ‘누명’이나 ‘2차 가해’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선택을 심사숙고하겠다는 ‘침착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매우 ‘당연한’, 또는 ‘바람직한’ 사회적 현상이자 정신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는 착각에 불과하다. 중립 기어를 사용하겠다는 건, 곧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하겠다는 암묵적이고 명백한 입장 표명이기 때문이다.
이때 ‘중립 기어’라는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는 차량의 기어 조작 상태에서 따온 말이기도 하다. 차량에서의 중립 기어는 ‘기어가 분리된 상태’를 의미한다.3) 아예 동력 자체가 차단되기 때문에, 차량은 주차도 주행도 아닌 상태가 된다. 즉 중립(N)4)은 신호 대기, 또는 견인이나 이중주차 등 불가피하게 외부의 힘으로 차량을 끌어야 할 때 매우 안전하고 적절한 대응 방식이다. 이 ‘안전하고 적절함’은, 차량을 옮기는 주체와 차량 모두를 포함한다. 예기치 못한 사고나 손상을 막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제거해 버리는 조치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를 ‘사람’, ‘사건’, ‘상황’에 대입하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현대인에게 중립(N)은 타인의 힘에 이리저리 휘둘리도록 스스로를 ‘내버려둔다’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립 기어’라는 말은 굉장히 관조적이면서, 그 사안과 ‘나’를 분리하겠다는 인상을 주곤 한다. 이는 사안에 대해 당장 판단을 내리지 않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겠다’5)라는, 은근한 ‘방관’과도 맥을 함께 한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로 인해, 정작 사안을 다룰 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점은 ‘외면’당하고 만다. 바로 중립 기어를 해제하거나 그것을 넘어서야 하는 순간들이다. 기다린다고 ‘사실 관계’가 그저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 사안에 얽힌 맥락과 서로의 입장, 증거, 교차 검증, 논쟁과 논의, 법적 절차 또는 비판적 여론 등…6) 사실 관계가 정의되기까지는 이처럼 복잡하고, 필수 불가결하며, 또 상호적인 과정들이 수반된다. 결국 ‘선택하지 않음’을 택하는 중립 기어는, 자칫하면 이러한 과정들을 ‘생략’하고 결과만 받겠다는 나태한 태도로도 읽힐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순간들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항상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길래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이는 우리가 ‘입장지어진 주체(P)’7)이기에 발휘되는 순간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학자 레나토 로잘도는 이 개념을 제안하며 ‘나’는 “특정 위치에 놓여 있는 사회적 존재”8)라는 점을 강조했다.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떤’ 사고방식, 위계 체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를 성찰적으로 바라보게끔 하는 것이다.9) 예를 들어, 필자는 스스로를 한국 거주 중인 대한민국 국적의 20대, 시스젠더 여성이자 여자대학교 학생, ‘정상 가족’에서 자란 무성애자로 정의한다. 필자가 놓인 이러한 ‘특정한 위치’는, 타고난 기질과는 별개로 필자의 가치관, 신념까지도 꽤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결국 ‘나’가 어떠한 “사회인구학적 특성”10)이자 관점을 지녔는지를 객관화하는 시도를 통해, ‘중립 기어’ 선택의 향방도 갈리게 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결국 ‘입장지어진 주체’로서 ‘선택’의 연속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대들은 삶을 어떻게 주행할 것인가?
D(Drive)와 R(Reverse) 사이, N(Neutral) 또는 P(Parking/Positioned Subject).
중립이라는 ‘힘’
“중립은 가해자에게만 이로울 뿐,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침묵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 있는 것이다.”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의 수상 연설 중11)
진짜 ‘중립’인 사람들은 아무 댓글도 안 달 걸?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주제의 게시글, 어김없이 등장하는 ‘중립 기어론’, 나아가 그러한 ‘설득’ 또는 ‘강요’에 툭, 던져지는 한마디. 이 말에는 ‘중립’을 내세우겠다면 ‘침묵’이라는 수단을 활용하고 또 활용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어떤 입장도 견지하지 않았으므로, 언급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납득 가능하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침묵’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다. 또한 ‘침묵’이 언제나 ‘중립’을 의미하는 것 역시 아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중립은 ‘선택하는’ 것이지만, 침묵은 ‘선택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사회에서의 ‘중립’은 ‘위계적’으로 작동한다.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문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해당 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맥락과 사회적 구조가 삭제된다. 중립을 취한다는 명목 아래 ‘이쪽도 틀리고 저쪽도 틀렸다’는 양비론만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시민 사회에서 결정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순간에도 ‘무응답’으로 대응하게 된다. 명백한 혐오 범죄나, 사측의 노측 탄압 등 불의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순간에조차 말이다.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구조적 차별에 연대해야 할 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잘 몰라’,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 일이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등의 방식으로 한 발짝, 아니 백 발짝 정도 뒤로 물러난다. 이는 흔히 ‘무관심’으로, ‘어떤 의견도 얹지 않음’으로써 상황이 진행되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고 비추어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중립적 태도’는 ‘강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애초에 기울어진 저울이다. 그 저울에 아무것도 올리지 않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가진 ‘힘’과 ‘득실’ 여부를 지키는 것이다.
물론 기득권, 다수, 주류와 비기득권, 소수, 비주류를 이분법적으로 가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당연한’ 이들, 또는 항상 결정권자의 위치에 있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누구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누구의 목소리가 쉽게 지워졌는지 알 수 있다. 소위 ‘엘리트’로 칭해져 왔던 집단12)부터, 대기업 오너 또는 임원, 부유층, 고학력자(4년제 대학 졸업이 ‘기본’인), 서울 거주, 정규직, 비장애인, 비퀴어, 이성애자, 남성, 청장년 등… 이러한 상황에서는 중립을 선언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권력’이 된다. ‘힘 있는 자들’에게는 굳이 자신의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사회적 의제를 모른 척 해도, 약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기득권의 위치에 있기에 ‘중립’이라는 말을 쉽게 뱉을 수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게다가 ‘침묵’은 오히려 권력자들에게는 묵시적인 방향으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 각자가 처한 위치에 종속된 사회적 존재로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가피한 위계 관계는 수동적인 태도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동료 시민의 꾸준하고 적극적인 관심이 있어야 한다. 양쪽 다 잘못했다거나, 아예 입을 닫아 버리는 행위는 권력자들의 위치와 그를 보호하는 벽을 더 견고히 만들 뿐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흑백논리만으로 바라볼 수 없다. ‘침묵’이 언제나 중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소수자와 약자가 중립을 선언하는 경우도 있다. ‘중립’이 꼭 ‘강자’만의 논리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이유다.13) 퀴어, 여성, 장애인, 이주민, 난민, 비정규직, 사회·경제적 소외 계층 등은 기득권층과는 갖고 있는 사회적 자원과 정보의 양질에서부터 이미 큰 차이가 난다. 목소리를 낸다고 하더라도 곧장 해고나 고발 등 실질적인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으며, 고립, 배척, 혐오로부터 오는 두려움에 고통받아야 한다. 이들에게는 선택지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거나, ‘예 또는 아니오’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이 주어진다. 결국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더라도 침묵을 고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중립’은 생존을 위해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정말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게 가장 쉽고 편하니까
소수자와 약자가 혹여 아주 작은 실수, 흠결이라도 보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순간 한 번도 ‘목소리 내야만 하는’,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위치에 있지 않던 이들. 혹은 말없이 흐름에 묻어가면 일이 ‘짠’하고 해결되어 있던 이들. 앞서 기득권이 사용한 무의식적이고 강력한 전략으로도 볼 수 있던 중립의 태도는 이렇게 정의 내려 볼 수 있다. 바로 ‘나는 손해보지 않겠다’라는 철저히 보신주의적인 태도다.14) 앞서 언급한 ‘양비론’도 맥을 함께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손해보지 않으려 이슈마다 던지는 ‘중립 기어’가 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중립이란 대체 무엇일까. ‘틀림’이 곧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나아가 자신의 손해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말과 주장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것일까? 여전히 위계적인 사회 구조 아래, 익명의 힘을 빌려 자신이 누려왔던 위치와 권력을 잃고 싶지 않은 불안감이 반영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그들은 기득권인 자신의 위치와 ‘나’는 ‘지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누군가 목소리를 냄으로써 ‘불편해지는’ 상황과 그 감각이 여기저기 솟아난 길을 자근히 밟아 번번한 길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공격’은 항상 어디로 향할까. 언제나 소수자, 약자에게 돌아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거대한 권력과 그 구조에 분노하는 것보다 더 쉽고 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소리 내야 하는 일은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이 되기도 하며, ‘우리 조금만 더 지켜보자’는 말에 눌려 사라지기 일쑤다. 하지만, 이제는 그 ‘편한’ 방식에 균열을 내야 할 때가 아닐까. 중립 기어를 작동시키는 순간, 우리는 제힘으로 나아갈 수도, 방향도 결정할 수 없다. 불편함 대신 게으름을 선택한 대가는 채 세워지지도 못한 공론장의 붕괴로 이어진다. 무너진 공론장에서는 기형적인 권력 구조의 파편들 아래, 이리저리 배회하는 논의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쉽게 살지 말자
중립은, ‘중립 기어’는 결코 개인을,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건 세상을 고이게 하고, 오히려 병들게 한다. 손해 보기 싫어서, 깊게 고민하기 싫어서, 책임지기 싫어서. ‘보류’와 ‘숙고’였던 중립은 어느새 ‘쉬운 선택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내게‘만’ 유리한 선택지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 없다.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했음에도 그 책임은 유효하다. 그러니 오늘도 찰나의 고민 끝에 중립 버튼을 누르려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고한다. ‘쉽게 살지 말자’고. 방향키를 남의 손에 쥐어 주면 분명 삶이 편해질 테지만, 고뇌도 하고, 목소리도 내고, 파도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도 하면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이건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다. 결국 중립은 ‘양심’의 문제임을.
1) 표준국어대사전. 「중립」. 『표준국어대사전』.
2) 네이버 국어사전. 「중립 기어」. 『네이버 국어사전』.
3) 한국도로교통공단. 「중립기어는 언제 사용해야 할까?! 올바른 N의 사용법!」. 『한국도로교통공단 블로그』. 2020.01.14.
4) 기어 N은 ‘중립 상태’를 나타내는 ‘Neutral’의 약자이다.
5) 이 글에서의 ‘지켜보겠다’라는 표현은 ‘누군가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또는 절차가 적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감시하고 견제’할 때 종종 쓰이는 표현과는 다른 의미이다.
6) 윤광은. 「‘중립 기어’라는 신조어는 무엇을 반영하나」. 『미디어스』. 2019.12.23.
7) Positioned Subject
8) 이현서. (2018). 질적 연구에 나타나는 연구자 감정 성찰. 문화와 사회, 26(1), 19쪽.
9) 이현서, 위의 글, 19쪽.
10) 이현서, 앞의 글, 20쪽.
11) 김석. 「[새로 나온 책]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남긴 가르침 ‘나의 기억을 보라’ 외」. 『KBS 뉴스』. 2024.04.06.
엘리 위젤은 유대계의 작가이자 교수, 인권운동가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당했다. 1986년 폭력과 억압, 인종 차별과의 투쟁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2) 의료인, 법조인, 언론인, ‘세계적 석학’ 및 교수(‘지식인’), 고위 장성 및 공직자 등
13) 그러나 ‘중립 기어 박아라’는 말은 분명한 강자의 언어이다.
14) 이예지. 「중립 기어 밟는 시대, 가수 이채연의 ‘소신’을 질투하다」. 『한겨레』, 2024.12.13.
참고문헌
김석. 「[새로 나온 책]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남긴 가르침 ‘나의 기억을 보라’ 외」. 『KBS 뉴스』. 2024.04.06.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418076(2024.12.30. 접속).
네이버 국어사전. 「중립 기어」. 『네이버 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entry/koko/6e8bef245cd5dc13108366e97e7df13b(2024.12.30. 접속).
윤광은. 「‘중립 기어’라는 신조어는 무엇을 반영하나」. 『미디어스』. 2019.12.23. https://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0722(2025.01.05. 접속).
이예지. 「중립 기어 밟는 시대, 가수 이채연의 ‘소신’을 질투하다」. 『한겨레』. 2024.12.13.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72358.html(2025.01.31. 접속).
이현서. (2018). 질적 연구에 나타나는 연구자 감정 성찰. 문화와 사회, 26(1), 7-41.
표준국어대사전. 「중립」. 『표준국어대사전』.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2024.12.30. 접속).
한국도로교통공단. 「중립기어는 언제 사용해야 할까?! 올바른 N의 사용법!」. 『한국도로교통공단 블로그』. 2020.01.14. https://blog.naver.com/koroadblog/221771014617(2024.01.04. 접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