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사회] 시민 A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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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었다. 자타공인 사회 성원으로서의 나를 인식했다. ‘사회가 생각보다 부조리하다.’ 이것은 새롭게 이 사회 성원이 된 자의 소감이었다. 요즘에는 최소한의 신뢰마저 앗아가는 일들이 너무 대놓고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내가 느낀 부조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20대의 단편적인 감상에 불과한가? 불편한 의구심이 든다. 사회의 이정표가 되어주던 정의, 공정, 도덕 따위의 지켜야 마땅한 진리가 위협을 받고 있는 듯하다. 소명의식, 책임, 청렴, 진실, 진심은 허울 좋은 속임수처럼 보인다. 이러다 인간불신이 올지도 모른다. 다들 지금 괜찮은가? 혹시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닐까. 웃을 수 없어서 큰일이다. 거리 두고 싶은 인간들이 너무 많다. 아니, 이대로 세상의 결말을 인간실격¹으로 끝낼 수는 없다.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은 희망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희망과 믿음을 동력으로 우리와 세상에 전하는 시민 A, 나의 바람이다.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²


이런. 세상에 저런 인간들이 있다.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터넷 댓글창, 온라인 커뮤니티, SNS … 여기저기 ‘우리’로 묶이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그들’은 ‘우리’와 너무 다르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를 보는 ‘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그들은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이야기를 두고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이야기가 안 된다. 서로 상대 ‘진영’이 완전히 틀렸으며 편향됐다고 여긴다. 또 상대가 유난히 가짜뉴스에 휩쓸린다고 본다. 서로를 ‘멍청이’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서로를 멍청이로 보는 걸까? 여기서 혐오의 개념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지성으로 평가받는 마사 누스바움에 따르면,³ 혐오는 결국 ‘어떤 대상과 거리를 두고 경계선을 그으려는 것’이다. 잠깐, 우리가 혐오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혐오와 혐오가 아닌 것 사이의 경계는 자의적으로 정의되는 듯하다. 그러니 여기서 혐오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무용하다. 즉 이 파트의 요지는 혐오 여부 가리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혐오의 기제를 고려해볼 것을 제안한다. 그 기제의 핵심은 ‘배제’다. 우리는 마땅하지 않은 것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긋는다. 경계선 밖의 것들을 배제함으로써 경계선 안에 자리하는 우리는 무결한 존재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배제하기 위해 서로를 '멍청이'로 상정했을지도 모른다. 누스바움의 말마따나 배제에는 가능성과 개선의 여지란 없기 때문이다. 상대는 똑똑한 우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이기에 굳이 치열하게 논의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아예 상종하지 못할 이들일 뿐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소망은 곧 목표의식으로, 행동의 지표가 될 것이다. 자,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여러 대답이 있겠지만, 나는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 진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들의 패배와 몰락, 우리의 영원한 승리 따위가 절대 선이 된다면 너무 슬플 것이다. 나는 인류와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에 기대보고 싶다. 만약 당신이 더 나은 세상을 소망하고 있다면, 당신과 나는 같은 목표를 지닌 ‘우리’로 묶일 수 있다. 우리는 같은 뜻을 가진 동지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질문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금 잘하고 있는가’이다.

아무래도 배제로는 진보를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앞서 말했듯 배제는 개선의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역화 효과로 일면 증명해볼 수 있다. 역화 효과란 내가 굳게 믿는 신념에 반하는 증거를 알게 될 때, 신념을 바꾸기보다 오히려 더욱 굳히는 현상을 말한다.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는 역화 효과로 온라인 논쟁에서 절대 이길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온라인에서의 논쟁이야말로 배제와 편향성 없이 이야기하기 힘들다. 즉 이때의 논쟁에서는 진위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온라인에서 우리가 근거를 뒷받침할 사실과 수치, 통계, 인용을 제시하면 상대방은 자기 생각을 더욱 고수하게 된다. 반대로 상대방이 열정적으로 근거를 쏟아내면, 우리도 똑같이 반응하게 된다. 역화 효과로 양쪽 모두 기존의 신념이 더 확고해진다. 논의는 공회전할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사공, 목적지는 어디인가


목표를 강조한 이유는 목적을 알아야 ‘그럴듯한 무논리’를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무논리는 목적이 논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척을 하면서 교묘히 논의를 방해한다. 그럴듯한 무논리의 대표격으로는 ‘중립기어 신화’와 ‘표현의 자유 오남용’이 있다. 한 기사에 따르면 ‘중립기어’는 미투 운동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중립기어’는 굳이 중립을 취하고 싶지만 떳떳하고도 싶을 때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립을 취했다는 당사자는 본인이 완벽한 제삼자의 입장에서 옳은 판단을 내렸다고 착각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확히 말하면 판단 주체가 이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일부러 가능성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이는 명백한 악이다. 의식하지 못한다면 골치 아프게도 무해한 오류가 생긴다. 무지가 낳는 오류는 주체가 스스로 무지를 인식해야 해결할 수 있으므로 다루기 까다롭다. 따라서 중립을 취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섣부른 판단을 막기 위해서인지,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 것인지, 선택에 책임질 자신이 없어 회피하는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외면하고 싶은지, 아니면 이들 일부/전부에 해당하는 것인지 인지해야 진보할 수 있다. 나머지 이유와는 달리 ‘섣부른 판단 예방’이라는 사유는 꽤 그럴 듯해 보이는데, 사실 이때의 중립에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 아직 있다. 중립은 그 자체로 마땅한 이상(理想)이 아니라 책임져야 하므로 숙고가 필요한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판단을 예방하기 위한 중립은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갖추는 태세다. 하지만 정말 ‘정확한 판단’을 하고 싶다면, 중립이 정당화로 기능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공명정대한 옳은 판단을 할 수 없다. 여기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동의한다면 최소한 본인 주장의 오류 가능성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반박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는 더 나은 논의를 위함이다. 반론과 재검토를 거쳐야 발전할 수 있다. 숙고 없는 중립은 신화일 뿐이다. ‘중립기어 신화’는 본인이 중립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과 중립기어를 통해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토대로 존재한다. 믿음의 근거가 오로지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신화’이다. 다시 말해 이 믿음은 자만이다.

또한 정말 진보를 원한다면 중립도 하나의 선택임을 알아야 한다. 중립은 과정이 아닌 결과로 기능할 수 있다. 중립기어는 어쨌든 진짜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입장이다. 모든 사실은 누군가/무엇에 의해 정해지거나 만들어진다. 따라서 ‘사실’이 어떻게 사실로 자리매김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기다림의 미학이 언제나 통하지는 않는다. 설령 법원의 판단이라고 해도 의심할 여지가 있다.


'표현의 자유 오남용'은 또 어떠한가. 이 무논리의 사용 목적을 살펴보자.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할 논거가 ‘표현의 자유’ 뿐이라면 그 주장은 의심되어야 한다. 물론 다양한 이야기가 공론장에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마땅하다. 그래야 진보를 위한 논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진보를 위한 논의,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도 아니고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 이유를 지우고 자유를 누릴 수 없다. 표현의 자유는 면제권이 아니다. 즉 시민으로서 이 사회의 룰을 지킬 의무를 벗어던지고, 본인 말의 무게를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말을 해도 해코지 당하지 않기 위한 방어막으로 쓰일 수는 없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표현의 자유가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해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란 결국 화자가 아닌 발화를 위해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화가 장려되는 이유는 역시나 사회의 진보를 위함이다.


그럴듯한 무논리가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지지받기 때문이다. 이 지지현상은 ‘말의 인플레이션’과 ‘적군과 아군을 가리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말의 인플레이션이란 과장해야 하는 말하기 상황을 말한다. 오바를 떨어야 주장이 되고 반응이 된다. 논리 대신 머릿수와 목소리 크기로 정설이 결정된다. 다수가 지지하는 이야기가 보편타당성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다수에 따르는 결정방식은 그 다수가 공유하는 이해(利害)가 무엇이며, 이해를 따르는 방식이 어떤지에 따라 아주 골치 아픈 오류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류는 상식을 지지하는 사회의 논리를 오염시킨다. 정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문제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철학자 칼 포퍼는 이렇게 말했다. “논쟁이나 토론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진보여야 한다.” 이는 다수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이유다. 목적이 승리뿐이라면 주장은 사회의 진보보다는 마찰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상대방의 의견을 테이블에 올리지도 않고 시작하는 말하기에서는 언어가 과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의견에 대한 이해와 개선의 가능성을 진작 제거해두고 시작하는 말하기는 대화가 될 수 없다. 상대의 말은 듣지 않지만 본인의 말은 들릴 것이라는 착각으로 언어는 과해진다. 논리에 근거한 논의가 아닌 이미 정해진 팩트를 관철하는 고성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근래 목표의식도 없는 다수가 더 많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이들의 목적을 ‘승리’라고 말해주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단 절대 진보는 아닐 테다. 그저 반대에서 의견을 만든다. 역시 논의가 안 된다. 여기에는 절대 찬성과 절대 반대만 있다. 침착한 말은 귀에 들리지 않는다. 고성싸움으로 이어지기 딱 좋지 않은가. 논리는 무용해진다. 세상을 적군과 아군으로 깔끔하게 쪼개보는 가공할 이분법만이 작용할 뿐이다. 본인이 하는 말이 곧 진리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설마?) 반박은 받지 않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애초 목적이 논의도, 진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밀은 인간이 지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이유를 ‘자신의 잘못을 정정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는다. 나는 이 능력이 합리적 사고의 근간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이성적 주체로서의 인간 호명의 근거일 테다. 인간이 이성적 주체로서 스스로를 천명한 지 몇 세기가 지난 지금, 인간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는 인간답게 굴러가고 있는가. 인간은 정말 이성적 주체로서 존재를 다하고 있는 걸까? 긍정이 어렵다면 우리의 이정표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결말이 아닌 과정 속의 우리


우리는 희망해야 한다. 좋은 게 좋다는 게 아니다. 언젠가 나아질 거라는 무력하고 막연한 희망도 아니다. 노력하기 위해서 희망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면 불확실성이 아닌 가능성을 보자. 가능성은 우리의 믿음 여하에 따라 규정된다. 세상이 진보할 수 있다는 가능성,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는 가능성, 민주적 호혜를 모두가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면, 혹은 믿고 싶다면 희망해야 한다. 누스바움의 말처럼 ‘희망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너, 나, 우리의 사회가 향할 곳은 어디인가. 우리가 정할 수 있다. 아직 결말은 나지 않았다.





¹ 『인간실격』은 오직 순수함만을 갈망하던 젊은이가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한 채 인간 실격자가 되어 가는 내용의 소설로, 타산과 체면으로 영위되는 인간사에 대한 예리한 고발로 평가받는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다.

² 알랭 바디우 저,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제목 인용

³ 세계적 석학이자 정치철학자. 대표 저서로 『혐오에서 인류애로』, 『타인에 대한 연민』이 있다.



참고문헌

김세원, 「혐오에 대한 이해: 아렌트의 아이히만론(論)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철학』,30, 2018, 61-92

다자이 오사무, 유숙자, 『디 에센셜: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2021

마사 누스바움, 임현경, 『타인에 대한 연민』, 알에이치코리아, 2020

엄기호, 「‘닥치고 지지’의 사회학」, 『한겨레21』,2021.05.02

윤광은, 「‘중립 기어’라는 신조어는 무엇을 반영하나」, 『미디어스』,2019.12.24

이호규, 「모든 의견은 들려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와 표현의 자유에 관한 연구」, 『사회과학연구』, 28, 2021, 7-29

제임스 볼, 김선영,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다산초당, 2020

존 스튜어트 밀, 권혁, 『자유론』,돋을새김,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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