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호] 2. 따이한, 따이한

베트남 전쟁│수습위원 이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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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용사’라는 단어는 젊은 세대에게 낯설고 먼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가까운 이들 중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 있다면 어떨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베트남전에 참전한 조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옆에서 동기들이 죽어 나가는데, 참는 놈이 어디 있어” 전쟁의 실상보다 개인의 영웅담에 가까웠던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한국군을 묘사해 온 ‘용사’의 이미지와 가까웠다. 그러나 정말 한국군은 '용사'이기만 했던 걸까? 정의로운 ‘참전 용사’의 이면에는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심각한 전쟁 범죄 사실이 존재하지만, 이는 국내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자유 수호를 위하여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통해 독립을 맞이했지만, 제네바 협정1)으로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분단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미노 이론’2)을 내세우며 정부 개입 등 남베트남에 통제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의 패퇴 이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시점에서 찾아온 미국 제국주의는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자유와 통일을 향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창설된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하 ‘베트콩’)’은 조국의 번영과 자유, 민족 통일을 목적으로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또한 민족해방전선에 가입하지 않은 주민들도 베트콩의 투쟁을 반식민지 투쟁의 유산으로 인식하고, 이를 대거 지지하기에 이르렀다.3) 이러한 경향은 베트남전까지 이어져, 베트남전은 ‘인민 전쟁’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군인만이 전선에 나가는 것이 아닌 인민 전체가 적극적으로 게릴라 전투를 수행하며 군인을 돕게 된 것이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집에 베트콩을 숨겨주거나, 이들에게 식량을 조달하는 등 전선 안팎으로 깊이 관여했다.

이렇듯 베트남 전쟁의 본질은 ‘민족해방투쟁’이었으나, 투쟁의 주체가 ‘공산주의 세력’이라는 이유로 한국은 ‘이념 대립 전쟁’으로 만들었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이 확정되었을 시점, 한국전쟁이 끝난 지 겨우 10년이 지났을 때였고, 이승만 정부의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파월 장병 교육과 ‘도미노 이론’은 파병 군인에게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을 심어주었다.4) 실제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은 “베트남 전쟁은 공산주의와 싸우는 제2의 전선이었다.”, “우리는 세계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자유 민주주의의 십자군이라 자랑스럽게 긍지를 가지고 생활하였다.”라고 말했다.5) 이로부터 한국은 모든 ‘베트콩’을 ‘자유 민주주의를 해치는 불온한 존재’로 정의하고, 제거해야 마땅한 대상으로 취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군은 참전 및 파병이 세계 평화와 자유 수호를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음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제국주의적 ‘평화’와 ‘자유’ 개념이 약소국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것이 얼마나 많은 베트남의 생명과 맞바꾸는 일인지를 회피하였다.6) 1968년 베트남에서 석 달간 벌어진 최소 여섯 차례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과 전시 성폭행은 이러한 한국군의 회피와 반성 없는 태도의 결과였다.


베트콩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양민을 베트콩으로 만들어라7)


“1968년 정월 24일 오전 9시 30분, 한국 해병대는 탱크와 장갑차를 하미의 두 번째 작은 마을인 쏨떠이 경계 밖으로 남겨두고 세 방향에서 마을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중략)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발포를 시작했고, 빠져나가려는 사람은 파편 수류탄 세례를 받았다. 공격은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다른 학살 장소에서는 마을 사람 70명이 응우옌 집 안의 제단이 있는 방에 꾸역꾸역 넣어졌다. 공터에서 기관총 소리가 들리자마자 학살이 시작되었다. 정오까지 135명의 마을 사람이 죽었다.”8)


1968년,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하미마을에서 민간인 집단학살이 일어났다. 당시 꽝남성의 주요 지상부대로 활동하던 ‘대한민국 제2 해병여단(이하 청룡부대)’은 ‘베트콩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하미마을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하미마을은 격전지에 근접해 있었기에 모든 주민이 군인이 되고, 마을이 요새가 되는 ‘인민 전쟁’ 특성 속 ‘베트콩’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라는 게 학살의 이유였다. 하미마을에는 이러한 하미학살9) 희생자 135인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본래 위령비의 뒷면에는 집단학살을 자행한 한국군을 향한 비문이 새겨질 예정이었다. “이제부터 모래언덕과 그 위에 자라는 나무는 비극적 살육의 역사를 기억하리라.”라는 문구로 끝나는 비문은 증오와 반감을 넘어, 한국군을 향한 용서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외교관들은 비문을 향해 ‘공격적이고 호전적’이라며 격분했고, 당시 ‘비극적인 과거를 잊지 말되, 초월하자’라는 입장을 내세우던 베트남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연꽃무늬 대리석으로 뒷면을 덮었다. 한국은 25년 전 ‘증오와 반감으로 쓰인 과거를 덮고 나아가’10) 세워진 위령비 앞에 아직도 무반성과 부인(否認)의 형태로 일관하고 있다.

‘월남전참전자회(이하 전우회)’는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하여 전면 부인한다. 이들은 사령관에게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민간인을 죽일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전우회는 누군가를 죽였다면 그는 베트콩이었을 것이라 덧붙이며, 마을 주민의 양민성 즉, ‘선량함’을 가리는 것이 민간인 학살 사건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지점이라고 말한다.11) 베트콩이 아니더라도, 적을 도와준 사람이라면 ‘선량한’ 양민이 아니기에 민간인으로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전쟁은 내가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면죄부가 적용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식의 논리는 민간인 학살과 같은 명백한 범죄까지도 생존이라는 명목 아래 정당화하려는 행위이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Lai·Lie Đại Hàn

베트남에는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은 잡종을 뜻하는 라이, 대한민국을 뜻하는 따이한을 결합한 단어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를 의미한다. 하지만 단순히 ‘혼혈아’만으로 ‘라이따이한’을 설명할 수 없다. 혐오와 멸시를 담은 ‘잡종’을 포함한 ‘라이따이한’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계기에는 한국군의 전시 성폭행이 있다.


“그날 한국군 병사에게 처음 강간당한 뒤 저는 모든 걸 잃었어요. 집에 사실상 감금된 채 살아야 했고, 그 집마저 잃었죠. 제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단 한 번도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했어요. 저 같은 피해자가 사과받을 날이 올까요? 언젠가는 오겠지만, 그날에 아마 저는 죽고 이 세상에 없겠죠. 그래도 하늘에서라도 저는 그 사과를 받을 겁니다.”12)


베트콩을 색출하겠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전쟁 범죄는 전시 성폭행으로 이어졌다. 베트남 정부가 발간한 전쟁 보고서와 정부 공문 등 각종 문헌에는 ‘한국군이 현지 여성을 성폭행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성폭행 피해자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빈딘성에 주둔했던 ‘한국군 수도사단’은 인근 마을 여성들에게 베트콩을 잡으러 가자는 핑계로 유인해 강간 범죄를 저지르거나 베트콩이라는 누명을 씌워 성범죄를 정당화했다.13) 이와 같은 일은 반복해서 일어났고 상당수의 ‘라이따이한’이 태어났다. 이들은 한국에서는 ‘없는 존재’가 되고, 베트남에서는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해 쫓겨나듯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는 교육 부족으로 인한 문맹으로 연결되어 가난으로 이어졌다.14)

그러나 수많은 ‘라이따이한’과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한국은 무시와 부인으로 일관했다. ‘적군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었다’며 한국은 또다시 ‘인민 전쟁’의 특성을 들먹여 잘못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설령 피해 여성들이 ‘베트콩’이었다 할지라도 전시 성폭행은 적법하지도, 정당하지도 않다. 한국의 이러한 태도는 일제강점기를 외면하는 일본 정부와도 다르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길원옥 여성운동가는 나비기금을 통해 “한국 군인들이 잘못했으니, 당연히 한국 정부가 나서서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책임과 연대의 목소리를 베트남 여성들에게 전했다.15) 영국 시민단체 ‘라이따이한에게 정의를(Justice for Lai Dai Han, JLDH)’에 따르면 한국군에게 성폭행당한 피해자 베트남 여성 800여 명이 생존해 있다.16) 피해 여성이 살아있을 때, 민간 단체의 활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제대로 된 사과가 이루어져야 한다.


손에 손잡고

현재 베트남 정부는 ‘과거를 접고 미래로 나아가자’를 외치며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 승전국으로서 입장도 있지만, ‘비극적인 과거를 잊지 말되, 초월하자’라는 실용주의적 사고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입장일 뿐, 피해자의 입장까지 대변해 주지는 못한다. 민간인 학살과 전시 성폭행 유족과 생존자들은 여전히 한국 정부의 전쟁 범죄 인정과 사과를 바라며, 소송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퐁니·퐁넛 학살은 국가 배상 소송, 하미학살은 진실화해위원회 행정소송 중에 있다.

이렇듯 피해자가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원하는 상황 속에서, 한국의 지속적인 부인은 그들이 정말 ‘공식적인 사과를 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전쟁 범죄 사실을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한 민간인 학살 생존자는 ‘정부가 이 학살을 시인하도록 할 의무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다’라고 말했다.17) 그의 말처럼 우리는 더 이상 국가가 인정하길 바라며 멀리서 바라보기만 안 된다. 지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알리는 것이 우리의 책임으로 남아있다.



1) (i) 회의에 참여한 국가는 베트남의 독립, 주권, 통일 및 영토 보전의 기본적 국가적 권리를 존중한다. … (iii) 북위 17도 선을 임시 군사 분계선으로 설정, 북쪽에는 베트남 인민군이, 남쪽에는 프랑스 연방군이 주둔한다. … (v) 2년 후인 1956년 7월, 베트남을 통일하기 위해 전국에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한다.

Báo Quốc Tế. 「제네바 협정: 협상 테이블로 가는 길」, 『VIETNAM.VN』, 2025.08.08.

2)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지 못하면 동남아 전역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강조했다. 뒤이은 정권까지 강조점이 약간씩 달라도 만약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서 베트남을 지키지 못한다면 미국의 세계 전략에 큰 타격을 받는다는 논리였다.

심상준. 「[심상준 칼럼] 1975년 4월 30일, 남부 해방의 날, “사이공 정권 왜 붕괴되었나?”」, 『아세안 데일리 뉴스』, 2021.04.30.

3) 박태균.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한겨레출판, 2015, 86~88쪽. 참조

4) 대부분의 국민들은 베트남이 어떤 나라이고 전쟁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으며, 이는 참전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이 베트남이란 나라를 처음 인식한 계기는 파병이 결정되고 시작된 파월장병교육에서였다.

윤충로. (2015). “베트남전쟁의 한국사회사 : 잊힌 전쟁, 오래된 현재” (정현우. 2018. 재인용).

5) BBC News 코리아. (2020.04.30.). 전쟁: 끝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의 유령 - BBC News 코리아.

6) 김종욱. 「한국과 베트남의 ‘베트남전쟁’ 인식과 교육」, 『아시아연구』, 제 20-4호 (2017), 75쪽.

7)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이 내린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은 전쟁 기념관의 베트남전 전시 시작점에 적혀있을 만큼 대표적인 슬로건이다.

8) 권헉인. 『학살, 그 이후 : 1968년 베트남전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인류학』 아카이브, 2012, 85~86쪽.

9) 1968년 2월 24일, 하미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부르는 명칭이다.

10) 위의 책, 233~239쪽.

11) 정충신. 「월남전 파병 60주년… 전우들, 아직도 후유증·가짜뉴스와 사투중[현안 인터뷰]」, 『문화일보』, 2024.02.07.

12) ingppoo.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성폭행 당한 피해자들은 아직 사과를 받지 못했다.」, 『NewsPeppermint』, 2019.01.30.

13) 곽상아.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이 증언한다」, 『HUFFPOST』, 2015.04.26.

14) 정부경. 「베트남 전쟁: ‘성폭행범 군복을 봤어요. 한국의 백마부대였죠’」, 『BBC NEWS 코리아』, 2019.02.28.

15) 김복동의 희망[공식 홈페이지], 발행일 불명.

16) ‘라이따이한에게 정의를’은 성폭력 희생자에게 힘을 실어주고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 동안 만연했던 강간과 성폭력을 인지하고 이에 사과하도록 하는 캠페인 하는 그룹이다.

라이따이한에게 정의를[공식 홈페이지], 발행일 불명.

17) 황윤희. 「아가야, 한국군이 우릴 폭탄 구덩이에 넣고…」, 『ohmynews』, 2014.03.02.



참고문헌

김복동의 희망[공식 홈페이지], 발행일 불명, https://kimbokdong.com/2792(2025.07.15. 접속).

김종욱. 「한국과 베트남의 ‘베트남전쟁’ 인식과 교육」, 『아시아연구』, 제 20-4호 (2017), 61-84.

권헉인. 『학살, 그 이후 : 1968년 베트남전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인류학』 아카이브, 2012.

곽상아.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이 증언한다」, 『HUFFPOST』, 2015.04.26, https://www.huffington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3598(2025.07.11. 접속).

라이따이한에게 정의를[공식 홈페이지], 발행일 불명,https://laidaihanjustice.org/ko/%ED%99%88%ED%8E%98%EC%9D%B4%EC%A7%80/ (2025.07.11. 접속).

박태균.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한겨레출판, 2015.

심상준 . 「[심상준 칼럼] 1975년 4월 30일, 남부 해방의 날, “사이공 정권 왜 붕괴되었나?”」, 『아세안 데일리 뉴스』, 2021.04.30, https://www.asean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1308(2025.07.26. 접속).

정부경. 「베트남 전쟁: ‘성폭행범 군복을 봤어요. 한국의 백마부대였죠’」, 『BBC NEWS 코리아』, 2019.02.28, https://www.bbc.com/korean/news-46896179(2025.07.11. 접속).

정충신. 「월남전 파병 60주년… 전우들, 아직도 후유증·가짜뉴스와 사투중[현안 인터뷰]」, 『문화일보』, 2024.02.07, https://www.munhwa.com/article/11411456(2025.07.15. 접속).

정현우. 「베트남전쟁 초기(1964~1968), 한국사회의 베트남전쟁 및 국군 파병에 대한 인식-파월(派越) 병사와 기술자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8.

황윤희. 「아가야, 한국군이 우릴 폭탄 구덩이에 넣고…」, 『ohmynews』, 2014.03.02,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63246(2025.07.09. 접속).

BBC News 코리아. (2020.04.30.). 전쟁: 끝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의 유령 - BBC News 코리아 https://www.youtube.com/watch?v=kIZH7OyZ2bA(2025.07.09. 접속).

Báo Quốc Tế. 「제네바 협정: 협상 테이블로 가는 길」, 『VIETNAM.VN』, 2025.08.08, https://www.vietnam.vn/ko/hiep-dinh-geneva-duong-den-ban-dam-phan(2025.08.13. 접속).

ingppoo.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성폭행 당한 피해자들은 아직 사과를 받지 못했다.」, 『NewsPeppermint』, 2019.01.30, https://newspeppermint.com/2019/01/29/vietnamwarkoreansoldiers/(2025.07.09.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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