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호][여성] 페미니스트로 웃기 혹은 울기

KakaoTalk_20260310_225614495_07.jpg

무대 위에 한 여자가 등장한다. 관객을 쳐다보며 어슬렁거리는 그의 얼굴엔 어떤 표정도 없다. 길어지는 정적에도 여자의 관찰은 끝날 줄을 모른다. 들리는 소리는 여자의 발걸음, 마이크 선의 마찰, 그리고 관객의 짧은 기침 소리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 여자가 멈춰 선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모두는 숨죽인 채 여자의 말을 기다린다. 곧이어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카메라는 관객의 모습을 돌아가며 비춘다.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 흐느끼듯이 웃는 사람, 옆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짓는 사람, 그리고... 눈치를 보는 사람. 어느새 여자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다.


즐거움을 죽여라: 페미니스트 킬조이

당신이 읽게 될 이 글은 페미니스트 유머에 대한 글이다. 아니 잠깐, 페미니스트 유머라니? 인터넷에 ‘페미니스트 유머’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거라곤 남초 사이트에 유머 해시태그를 달고 유통되는 ‘페미니스트 참교육’ 게시물들뿐이다. “가장 싫어하는 사회운동”으로 페미니즘을 꼽을 게 분명한 이 사이트 유저들에게, 그리고 많은 성차별주의자들에게 확실히 페미니스트는 좀 ‘웃기는’ 애들이다. 인생의 ‘팩트’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무지성의 ‘남혐’, 남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쿵쾅’거리며 평화를 어지럽히는 인격성의 결함.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열등한’ 페미니스트가 웃음을 유발시키는 존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페미니스트 ‘유머’? 페미니스트가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직접 웃음을 만들어내는 유머의 주체라도 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는 모두가 웃고 있을 때 찬물을 끼얹으며 ‘갑자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주범이 아니던가?

확실히 그렇다. 페미니스트는 웃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 선배님에게 배운 “웃기지 않으면 웃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 이들의 ‘정색’은 여자들에게 더 많은 웃음을 강요하는 사회를 문제시하고, 온갖 차별적 발언에 터지는 웃음이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렇기에 ‘웃어야 할 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페미니스트들의 무표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저항이 된다. 사라 아메드는 이러한 저항의 양식을 페미니스트 킬조이Killjoy라 명명한다. 문자 그대로 즐거움을 죽인다는 뜻의 킬조이는 웃음과 정치를 연결하며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에 기원한 웃음에 선을 긋는 태도를 취한다.1)

나는 이 ‘킬조이’ 정신의 단호함에 흠뻑 빠져 페미니스트라면 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야기에 침을 튀기며 깔깔대는 한심한 작자들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재미없는데요”를 반복하는 게 일상의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융통성이 부족한 사주 탓일까? 그땐 유머와 농담이라는 게 이런 거라면,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하곤 했다. 나는 진지하기에 더 ‘좋은’ 놀림감이 되곤 하는 ‘정석’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뒤에서 자기네들끼리 눈을 마주치며 날 비웃고 있든, 앞에서 한 번만 더 그런 ‘눈깔’을 했다간 널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고함을 치고 있든. 내게 중요한 것은 끝까지 아니라고 말하는 일, 웃지 않는 일이었다. 모든 게 ‘싸움’의 현장이던 때 웃음의 필요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웃음의 힘과 페미니스트 유머

뜬금없지만 여기서 잠시 철학 이야기를 하겠다. 다 필요해서 하는 이야기니 지루해하진 마시라. 탈레스를 들어보았는가? 그렇다. 무려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우리 아버지께서 별을 보기 위해 걸으시다 그만 눈앞의 우물을 보지 못해 빠지고 마셨다. 이 광경을 보고 박장대소를 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트라키아의 하녀이다. 별의 이데아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최초의 철학자를 감히 비웃다니! 플라톤의 『테이아테토스』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철학에 무지한 이들의 단순함을 경고하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있다.2)

플라톤은 웃음을 경멸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웃음을 경멸하다니, 플라톤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누군가를 보고 웃음지었던 최근의 순간을 떠올려보라. 아마 높은 확률로 당신은 그 사람의 결함을 보고 웃었을 것이다. 당신뿐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의 인품을 깎아내리면서 웃곤 하니 말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웃음의 경향성에 주목해 웃음에 비도덕성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3) 과연 맞는 말이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에 ‘유머’ 태그를 걸어둔 이들의 웃음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조롱이 남초 사이트라는 공간 안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굳이 페미니스트들의 사진을 수집해 첨부하고 유머 말머리를 달아 ‘공유’ 버튼까지 누르는 이들의 행동에 주목하라. 웃음의 또 다른 중요한 성질 하나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웃음은 언제나 한 집단의 웃음”이라는 사실이다.4)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웃음을 ‘사회적인 제스처’라고 해석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사회는 구성원들이 잘 어우러져 살기 바라는 욕망을 갖고 있다. 사회는 상상한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서로에게 적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말썽쟁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엉뚱하게 행동하는 사람, 상식에서 벗어난 짓을 하는 사람, 규범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나타나 사회의 바람을 방해한다. 사회는 난감함에 봉착한다. 이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감옥에 보내는 건 너무 과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사회는 가벼운 ‘제스처’를 취하기로 한다.5) 바로 그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사회는 웃음이라는 ‘징벌’을 통해 교정을 명령하고, 웃음은 그렇게 사회를 다시 통합시키며 도덕적 질서를 공고히 한다.6) 웃음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 웃음 그 자체가 도덕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것을 밝힌 베르그송의 통찰은 날카롭다. 그의 말대로, 부드러운 얼굴을 한 웃음은 서늘하고 뾰족한 칼을 그 뒤에 감추고 있다.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 웃음의 힘을 적극적으로 탐구한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 건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기존의 권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권력관계를 상상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은 무엇보다 힘에 관한 이론이니 말이다. 차별적 농담에 무표정으로 대응하던 페미니스트들은 이제 자신만의 유머를 구사함으로써 정말 웃기는 사람이 누구인지 가려보자는 도전장을 날린다. 이쯤에서 우물에 빠진 탈레스를 보며 한바탕 배를 잡았던 트라키아의 하녀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보자. “자기 발밑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면서 하늘의 일을 알려고 하시다니요!”7) 그의 말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 삶과 거리를 두면서만 가능하다는 유럽 철학의 근본적 거짓을 꿰뚫어 본다.8) 노예 여성인 트라키아의 하녀는 철학자 남성의 모순을 비웃으며 공고한 권력 구조에 균열을 낸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유머에 함께 웃고 권력관계가 역전된 세계를 잠시나마 음미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발명한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아픈 이유는: 울면서 웃는 페미니스트

‘즐거움을 죽이는 일’이 저항의 전부인 줄 알았던 나는 점차 이 새로운 즐거움에 매료되어 갔다. 웃지 않는 것도 저항이지만 한껏 웃는 것 역시 저항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웃고, 웃기게 만들고, 웃긴 사람들을 찾아 나서며, 그들과 함께 웃었다. 남자들을 비웃고 여자들과 눈길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유머는 분명 매일의 저항을 위한 훌륭한 도구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날카로운 웃음의 날들이 얼마간 이어졌고, 어느새 유머는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어있었다. 킬조이 정신으로 무장했던 날이 전생처럼 느껴지던 때, 나는 유머를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머는 더 이상 저항의 도구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페미니스트로 계속 살아남기 위한 발악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 윤리적 선택지를 척척 골라내는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어쩌면 그렇게나 열심히 웃고, 웃지 않으며 저항한 것은 그 믿음을 증명해 보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윤리적인 선택지가 버겁다며 실수인 척 그것을 모르는 체했고, 가끔은 알기 위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것, 혹은 그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애초에 나는 내가 비웃었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모든 것에 스며들어 복잡한 지형을 만들어내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인종주의, 이성애규범성, 인간중심주의··· 그것들은 때로 달콤하기까지 했다. 변방의 가난한 동성애자 ‘여성’으로써 온갖 착취에 저항해야 논리적으로 말이 되겠지만, 오늘도 나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가득 묻어난 더티토크에 전율을 느끼며 “목을 더 세게 졸라달라고” 말한다.9)

나는 언제부턴가 페미니즘을 알면 알수록 슬퍼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적’에게 저항하는 방식이 아니라 ‘적’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는 날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선배’들을 만나고, 여성학 수업을 듣고, 이 지식에 점점 익숙해져가던 어느 날, 문득 무언가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업신여겼던 사람들, 내 앞에서 침을 튀기며 온갖 부적절한 말에 큰 소리로 웃던 바로 그 사람들로부터. 나는 종종 그들이 중산층 지식인 앞에서 기가 죽던 모습을 떠올린다. 그들이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계급의 슬픔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도 아는 그 슬픔에 대해서. 나는 그들과 분리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팔짱을 끼려 했다는 사실이 슬펐고, 그들과 대화하는 법을 모르겠다는 사실이, 어쩌면 평생 그 기회를 놓쳐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들과 ‘우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슬펐다.

‘싸움’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적’과 나를 가르는 두터운 선 같은 것은 없었고, 페미니스트는 윤리적 선택지 그 자체를 질문하는 사람이지 정답을 잘 따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종종 무엇에 저항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는 걸 의미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유머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생존을 시도해 본 존재들이라면 이 방식이 낯설지 않을 테다.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몰라 슬픈 것, 슬픈 게 넘쳐난다면 그것들을 전부 우스운 것으로 만들어버리자. 내가 웃기려고 든 것은 다음과 같다. 강간당한 것, 쓰레기와 광인이 난무하는 동네에 사는 가난한 삶에 대한 것, 강간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되는 섹스, 아침에 일어날 수 없는 것, 지금까지 받은 수많은 F의 개수, 죽고 싶지만 죽을 용기가 없는 것, 지난여름의 낙태,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코미디를 그만두겠어요”: 결국, 말을 거는 방식

나는 자주 웃었다. 그래야 비로소 슬프고 비참한 것들을 장악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만 같았다.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 슬픔을 관조하고 살짝 초월해 보기. 유머야말로 갈 곳 잃은 페미니스트의 고통을 말하는 가장 제대로 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유머는 울면서 말할 수 있는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았을 때, 사람들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내가 말하다 울어버린다면 분명 상대방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슬픈 것을 웃기게 다루는 이 조용한 작업이 퍽 마음에 들었고, 그것은 곧 나의 유일한 말하기 방식이 되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그렇게나 집착했던 페미니스트 유머를 통해 다시 한번 실패했다. 왜 ‘이런 것들’을 농담의 거리로 삼는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당혹스러운 얼굴 앞에 자주 서곤 했기 때문이다. 말을 걸고자 했지만 말을 걸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실패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 당혹스러운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웃기려 들었던 나는 무엇이 슬픈지, 무엇이 화가 나는지, 그리고 무엇이 웃긴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웃기다는 말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러니까 웃음 앞에서 정확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나는 분명 웃음으로 슬픔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으로 마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슬픔과 고통을 다루고 타인에게 가닿고자 한 이 일은 이미 실패가 예견된 기획이었을 것이다.

페미니스트 유머에서조차, 웃음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웃기는 것이 규칙인 공간에서 관객들을 울리는 코미디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작고 보수적인 지역에서 나고 자란 해나 개즈비는 레즈비언이자 페미니스트인 코미디언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쇼를 만들어왔다고 고백한다. “비주류에 속한 사람의 자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나요? 겸손이 아니에요. 수치심이죠.” 그는 무대 위에서 자신이 경험한 폭력과 고통의 경험을 토해내듯이 말한다. 웃음소리로 시끄러웠던 무대는 한순간에 얼어버리지만 그는 그 긴장을 웃음으로 해소하려 들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온전히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로서 겪는 자기혐오, 수치심,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분명 웃음에는 저항의 힘이 있고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오해는 마시라, 나는 여기서 웃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이 글을 마무리한 뒤 누구보다 크게 웃을 것이다. 페미니스트로 겪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모순들과 슬픔들에,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일의 잔혹함에, 세상의 폭력성에 그저 단순히 웃고 넘기지는 말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슬퍼서 철철 우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주자는 것이다. 같이 감당하자는 것이다. 울면서 말해도 옆에 있어주자. 그리고 울어도 좋으니 끝까지 말하자. 우리들의 고통을 끝까지 보자.


이야기의 마무리

무대 위의 긴 이야기를 읽느라 고생 많았다. 지금 당신은 웃고 있는가? 혹은 알고 있는 페미니스트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당황했는가? 사적인 이야기가 가득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는가? 재밌을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슬프게 끝나서 눈치만 보고 있는가? 나는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즐거웠다. 나만 즐거웠다면 유감이다. 아무튼 이 모든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들어주었다는 사실에 감사드린다. 감사의 덕담 한 마디. 당신이 슬픔을 정확히 다룰 수 있는 힘을 갖길 바란다. 끝없는 슬픔 속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기쁨까지. 끝까지 울고 끝까지 웃자. 힘들면 연락하라. 내 번호는 010-136···.


1) 이연숙. 「“페미니스트는 분위기 깬다”는 당신, 그들 유머엔 웃을 수 있나요」. 『한국일보』, 2022.03.19.

2) 엄주엽. 「서양철학사의 금기 ‘웃음’을 복원하다」. 『문화일보』, 2018.03.16.

3) 정현경. 「웃음의 미적 형식으로서의 유머」. 『인문학연구』, 제18호, 2011, 154쪽.

4) 앙리 베르그송. 『웃음』, 정연복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15쪽.

5) 위의 글, 28쪽.

6) 앞의 글, 200쪽.

7)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정준영 옮김, 아카넷, 2022, 173-174쪽.

8) 엄주엽, 앞의 글.

9) 해당 분야의 탁월한 유머 구사자인 앨리 웡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참고했다. Wong, A. (Writer). (2022). Ali Wong: Don Wong [Standup Comedy Special]. Netflix.




참고문헌

민음사 편집부. 『한편 16호: 유머』, 민음사, 2025.

앙리 베르그송. 『웃음』, 정연복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엄주엽. 「서양철학사의 금기 ‘웃음’을 복원하다」. 『문화일보』, 2018.03.16. https://www.munhwa.com/article/11076179

이연숙. 「“페미니스트는 분위기 깬다”는 당신, 그들 유머엔 웃을 수 있나요」. 『한국일보』, 2022.03.19.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31616400002162

정현경. 「웃음의 미적 형식으로서의 유머」. 『인문학연구』, 제18호, 2011, 153-175쪽.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정준영 옮김, 아카넷, 2022.

Gadsby, H. (Writer). (2018). Hannah Gadsby: Nanette [Standup Comedy Special]. Netflix.

Wong, A. (Writer). (2022). Ali Wong: Don Wong [Standup Comedy Special]. Netflix.


작가의 이전글[90호][사회] 등잔 밑이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