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
(경쾌한 통화 연결음) 띠링- 짧고 가벼운 소리에 이어 화면에 두 얼굴이 뜬다. 매일같이 만나는 친구들이다. 친구들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다. 화면 한켠의 내 얼굴은 약간 들뜬 사람처럼 보인다. 뭐 하고 있어? 두 친구는 의문이 가득한 모습으로 말한다. 우리? 밥 먹고 있었지. 지극히 평화로운 일상에 나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룸메이트와 마주 보며 폭소를 터뜨린다. 화면 속 친구들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왼손에 쥔 그것을 다시금 고쳐잡는다. 할 말이 있어, 가까이 와 봐. 휴대폰은 어느새 네 명의 얼굴로 가득 찬다. 이제 곧 평화는 깨질 것이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다 모였지? 자, 우리 지금부터 가족사진 찍는 거야. 하나 둘 셋- 마지막 카운트다운에 맞춰 왼손을 재빠르게 올린 나는 그것을 자랑하듯이 내보이고, 곧이어 친구들의 얼굴은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한다. 기다란 플라스틱의 그것은 두 줄이 선명한 임신테스트기다.
8월 2일 토요일
여름이다. 햇살이 짱짱한 바깥에 나가 자리를 잡고 서서 담뱃불을 붙인다. 구겨진 담뱃갑엔 “남을 병들게 하는 길”이라는 문구와 함께 담배꽁초 젖병을 아기에게 물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내가 임신을 했다는 걸 재차 확인시키고자 하는 위대한 누군가의 소행이기라도 한 건가? 모르는 척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네, 잔뜩 찌푸린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고 인터넷에 ‘낙태’라고 검색한다. 스크롤을 내리고 내려도 끝이 없는 뉴스들이 차례로 뜬다. 기사를 읽기도 전인데 벌써 피곤해진다. 마치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내 몸이 여기저기 소환되어 두들겨 맞는 것만 같다. 천천히 살펴보자. 특정 종교는 낙태가 생명 경시 현상을 사회에 확산시킬 거라는 성명문을 냈으며,1) 미국에서는 낙태 기관이 20곳 이상 폐쇄되었다.2) 임신 36주 차의 여성은 낙태를 해 살인죄로 기소되었고,3) 연인의 낙태 사실을 알고 폭행을 저지른 남성도 있다고 한다.4) 앗, 기사에서 흥미로운 댓글을 발견했다. “여성 여러분, 생명을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죽은 태아의 억울한 영혼이 낙태를 한 여성들에게 100% 불행을 가져오게 합니다.” 불행이라, 며칠 전 트위터에서 봤던 짤을 떠올린다. “인생의 어려움을 견디는 법” “1. 적어도 당신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나는 이미 임신을 해서 불행하며 임신중절을 해도 백 퍼센트 불행해진다. 그래, 나는 확실히 불행하고 앞으로도 불행할 예정이다. 이미 불행하기 때문에 내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이렇게나 킬킬거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나는 임신 사실을 확인한 아까부터 모든 것이 웃기다고 생각하고 있다.
룸메이트와 밥을 먹고 있다던 친구네 집에 왔다. 애인이 낙태를 하라고 보내 준 돈으로 다 같이 비싼 육회 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메뉴였지만 비싼 걸 먹어야 될 것 같았다. 뭔가를 축하하고 싶었던 걸까. 이 아이를 낳을 것도 아니면서. 비빔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부서지는 부드러운 육회를 씹으면서 나를 살인자라고 칭하던 사람들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고기를 넘겨 삼키다 내가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태라는 결말만이 예정된 임신을 기념하며 죽은 소를 먹고 있는 이 꼬라지가. 영락없이 “생명을 경시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그래서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무엇을 선택해도 불행과 마주하게 될 이 상황에서 대체 어떤 걸 할 수 있다는 건지. 뭐, 적어도 지금 나는 곁을 내어준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돈 많은 애인이 있어 수술 비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감사하고, 절대 내게 하룻밤 이상의 애정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 수많은 원나잇 상대들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음에 또다시 감사한다. 6년 전에 임신하지 않았음에,5) 그러니까 모든 것이 운으로 비켜 나갔음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어느새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치우려고 일어나는데 친구들이 나보고 누워있으라 한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감동의 눈물이 아니라 내가 ‘임산부’라는 게 실감이 나 터지려 하는 눈물이다. 여기서 울면 순식간에 놀림거리 또는 위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둘 다 싫지만 후자는 최악이다. 안 울려고 존나 버틴다. 방금 밥을 먹은 탓인지 몸이 엄청 무겁게 느껴진다. 잠이 온다.
8월 3일 일요일
평소 사용하던 생리어플에 임신 사실을 입력한다. “이제 임신 단계가 시작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시스템 전환을 위한 로딩이 이어진다. 로딩 완료와 함께 핑크빛의 디자인 컬러가 살구색으로 변한다. 곧 내 임신 주차에 맞는 태아의 모습이 나타난다. 무언가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살구색의 배경은 나의 자궁으로 추측된다. 세상에, 지금 나는 무려 ‘어머니의 자궁’을 가진 존재다! 모든 생명을 잉태하며 성장시키는 근원지, ‘어머니의 자궁’. 이 자궁을 가진 나는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되어야 하는, 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어떻게든 그것만은 피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슴을 숨기고, 여자들 사이에서 ‘남자 역할’을 하고,6) 내가 동경하는 남자애들을 은밀하게 따라 하면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 자리에 이렇게 끌려오다니. 동경하던 그 남자애들이랑 자고 다녔다는 그 이유 하나로 어머니의 자리에서 멀어지고자 한 나의 모든 노력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무언가를 포기하는 심정으로 ‘임신 단계’ 어플의 달력을 쓸어 넘기자 주수에 따라 태아가 커가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이 아이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아이를 키워보면 어떨까? 불가능하기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을 시작한다. 애인도 혈연 가족도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나의 룸메이트와 이 아이를 함께 키우는 상상을. 우리는 이 아이를 통해 진짜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자궁을 통해 내가 가고 싶었던 다른 자리를 더 생생하게 그려본다.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다정한 아빠의 모습을.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이 아이를 키울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아이와의 삶이 바로 그 형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왜 아버지가 되고 싶은지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애인도 아닌 고작 친구밖에 되지 못하는 나의 동거인과 왜 가족씩이나 꾸리고 싶어 하는지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설명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상상은 애초에 의미 없는 상상이었다. 갈 곳 없는 욕심만 늘었다.
8월 5일 화요일
온갖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다. 조급한 마음에 눌려 진행되지도 않는 일을 카페에서 꾸역꾸역 붙잡고 있던 도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아, 그곳이다. 친구가 바쁜 나를 대신해 어제 한 여성단체와 상담을 했다고 말했었다. 번호를 넘겼으니 전화가 오면 꼭 받으라고 당부했더랬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전화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매일같이 오던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나는 그제서야 조금씩 일상 감각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자 위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가 마치 어떤 경고와도 같이 느껴진 건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너는 지금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고, 너에게 일상이라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아주 단호한 진동이 끝도 모르고 징징대며 속을 울렸다. 아······ 회피하고 싶다. 한숨을 한 번 쉬고 통화버튼을 눌러 바깥으로 밀어냈다. 이지적이고 따뜻한 목소리의 활동가가 인사를 건넸다. 내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자 그는 관련 정보를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그렇게 통화 몇 분에 일상과 위기의 구분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웃기고 신기했다. 스스로도 이 모든 상황에 약간 겁이 나긴 했던 것 같다. 신기했던 부분은 그와 전화를 하면서 무언가가 깨부숴지고 다른 무언가가 채워지고 있다는 감각을 받았다는 것이다. 되찾고 있던 일상이 조각난 것 같지만 위기인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무언가가 물밀 듯 쏟아졌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에 다시 한번 낙태를 검색한다. 아일랜드에서는 낙태 시술을 거부당한 한 여성의 사망으로 낙태죄 폐지 운동이 일어 헌법을 개정했고,7) 프랑스에서는 여성 운동의 성과로 1975년부터 낙태죄가 합법화되었고 이제는 ‘자유’로서 헌법에 명시되었다.8) 반면 미국에서는 낙태할 권리를 옹호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되면서 전역에서 강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9) 뉴스를 보고 나니 쏟아지던 것이 무언가 익숙한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처음 남자랑 자고 산부인과에 사후 피임약을 처방받으러 갔을 때의 감각. 남자랑 섹스한다는 경험으로 연결되는 게 좀 웃기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때 나는 그곳의 의사와 간호사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그들은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때와 같다. 그 산부인과의 여자들과 거리의 여자들, 전화를 걸어준 여자와 함께 여자가 되는 것. 나는 그 여자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여자들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그 여자들도 낙태를 했을 것이다. 외로웠을 것이고 덜컥 겁이 났을 것이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든다. 고마움의 마음이자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 것은 왜일까. 너무 쉬운 선택지만 내게 주어졌다고 말이다. 생각을 거듭하다 정신을 차리니 몸이 너무 무겁고 아파 옆에 있던 친구에게 상태가 좋지 않다고 토로한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친구는 낙태를 못 해서 아이를 낳아 보냈다는 언니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내가 뻔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배반하고 있다고.
8월 7일 목요일
온 종일 잤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괴롭다. 지금 당장 끝내야 하는 일이 산더미인데 잠만 자버렸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싫다. 애인이랑 전화하다가 펑펑 울어버렸다. 내가 너무 싫고 한심하고 짜증 나고 모든 게 싫다고 말하면서 그냥 계속 울었다.
8월 8일 금요일
몸이 좋지 않아서 전혀 일하지 못하고 있다. 웃어주는 게 일인데 아파서 억지웃음조차 지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아프기 때문에 일 자체를 아예 나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먹는 양은 어마무시하게 늘었는데 일을 전혀 못 나가고 있으니 배로 가난하다. 당장의 생활비가 걱정이다. 다가오고 있는 월세 날도, 카드값도···. 솔직히 개에바다. 이제 진짜 출근을 해야 한다.
출근했다. 역시 무리였다. 그래도 다행히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을 꺼내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나를 먼저 보내줬다. 자기들끼리 연장 근무자를 정했다며,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먼저 가서 푹 쉬라는 것이다. 좀 감동받았다. 동시에 얼마나 감동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왜 아픈지 ‘진짜’ 이유를 알게 되면 분명 날 걸레라고 욕하고도 남을 사람들이니까. 그런데도 퇴근할 때 보여줬던 그 사람 좋은 미소들이 생각난다. 자꾸 선의를 비틀어 생각하게 된다. 집에 오는 길에는 토마토를 사 왔다. 요즘 입맛이 변해 신선한 것들을 자꾸 먹고 싶어진다. 삶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자꾸만 싱그러운 것들을 찾게 된다.
8월 9일 토요일
병원에 왔다. 지난번 통화했던 여성단체 활동가가 연계해 준 병원이다. 산부인과가 아니라 성·재생산 건강 전문 의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이곳의 새하얀 벽은 트랜스젠더 플래그와 재생산권에 대한 책으로 빼곡이 채워져 있다. 화장실은 휠체어 이용자의 접근성을 세밀하게 고려해 설계되어 있고, 문진표도 섬세하게 짜여져 있다. 퀴어들의 난관, “성관계 경험이 있습니까”라는 문항은 “질내 탐폰, 생리컵, 손가락, 성기 등의 삽입의 경험이 있습니까?”로 대체되어 있다. 내가 어떤 젠더와 자는지, 여자인지 아닌지는 이곳에서 중요하지만 동시에 중요하지 않다. 문진표를 작성한 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자, 하나둘 예약 환자들이 들어온다. 아뿔싸, 너무 크게 웃을 뻔했다. 다들 너무 퀴어하다.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으러 갔던 병원과는 달리 이 공간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곧 내 이름이 불리고 간호사 선생님과 상담을 하러 간다. 선생님은 임신과 출산 대신 재생산이라는 단어를, 애인이 아니라 파트너라는 명칭을, 나의 성별을 재단하지 않는 방식의 말하기를 차근차근 이어갔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상담이 끝난 뒤엔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내가 경험한 몸의 무거움과 수많은 잠의 시간을 입덧이라고 말했다. ‘내가... 입덧...?’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자, 선생님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는지 미소를 띠셨다. 초음파 검사를 위해 누웠을 때는 인형을 안겨 주었다. 선생님이 초음파를 보면서 이것저것을 설명했고 심장 소리는 들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는데 사실 이게 아직도 후회가 된다. 나는 그 아이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초음파 사진이라도 갖고 싶어서 받아왔다.
8월 11일 월요일
결국 해야 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정말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파서 그랬단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하고 울었다. 애인이 아닌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체 나는 왜 울었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신경이 삐쭉 서고 얼굴이 화끈해지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창피스럽고 모욕적인 기분은 뭐였을까?
8월 14일 목요일
애인과 연락이 안 돼서 울었다. 애인한테 짜증을 존나 내면서 뭐라고 했다. 나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구는 것 같다고. 물론 나는 이 일이 고작해야 ‘웃긴 에피소드’ 정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낙태를 하겠다고 말해서 누군가한테 맞지도 않았고, 돈이 없어서 낙태를 못 하지도 않는다. 죄책감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이 일이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자꾸 관심 같은 걸 받고 싶을까? 막상 임신한 애 취급당하는 건 또 질색하면서. 내가 뭘 원하는지, 뭘 원해야 하는지, 아니 뭘 느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히스테리’의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나는 내가 더 싫어지고 슬퍼지고, 수치스러워진다. 이건 모두 임신 때문에 일어난 일일 테다. 수술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모든 게 다 끝난다.
8월 18일 월요일
수술 당일이다. 나는 오늘 낙태를 한다. ‘가족사진’을 찍은 지 정확히 2주가 흘렀다. 그때로부터 무엇이 달라졌을까. 2주밖에 안 됐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더 긴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아침으로는 토마토를 먹었고, 병원까지는 친구들과 택시를 타고 갔다. 아침부터 이동하느라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약간 설렜던 건 친구들에게 그 이상한 병원을 보여줄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웃음을 참으며 눈빛을 교환했다. ‘내가 말했지... 진짜라고...’ 이어지는 대기. 수술실에서는 전신마취를 했기 때문에 기억이 없다. 회복실에서 깼을 때 옆에 친구들이 있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바라오던 모습이 있었다. 병원 침대에서 깨었을 때 친구들 옆에 둘러싸이는 그런 꿈. 기분이 좀 좋았던 것 같다. 가족사진은 결국 네 명의 모습으로 남았고 5명이 되지는 못했지만 무언가를 약속받는 것 같았다. 우정과 우정과 우정이 모이면 그건 그것대로 또 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게 가능하다. 퇴원하자마자 우리는 국밥집에 우르르 들어가 감탄사만 내뱉으면서 밥을 먹었다. 집에 올 때도 택시를 탔다. 비가 조금 왔다. 눅눅한 기분을 느끼면서 집에 도착했다. 긴 잠을 잤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와 재생산권을 위하여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 형법 제269조의 낙태죄는 여성의 몸에 대한 국가의 통제라는 점에서 오랫동안 문제의 대상으로 지적되어 왔다. 특히 모자보건법상 허용 범위를 벗어난 임신중지를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시행한 의사의 자격정지 기간을 12개월로 확대하려 했던 2016년 9월 보건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개정안」 입법예고와, 같은 해 12월 정부가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는 2015년 전후의 페미니즘 리부트 흐름 속에서 여성을 출산 도구로 대상화한다는 거센 논란을 불러왔다. 이에 2017년 9월 28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을 위한 국제행동의 날’을 계기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발족하는 등 낙태죄의 위헌 여부 심리를 압박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본격화되었다.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요구하는 약 23만 명 규모의 국민청원도 이어졌고, 정부는 2017년 11월 낙태죄 문제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인정했다.10)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마침내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 결정문에 제시된 위헌 사유는 그간 낙태죄 폐지 운동을 통해 축적되어 온 문제의식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이었다. 특히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이나 형벌 중심 접근을 넘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며 규제가 아닌 보장과 지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논의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이 결정은 단순위헌이 아닌 헌법불합치에 머물렀고, 형법과 함께 작동해 온 모자보건법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언급은 충분하지 못했다. 또한 여성의 결정권을 중심으로 검토하면서도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를 포괄하는 재생산 권리 전반, 그리고 이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방향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협소했다는 한계를 남겼다.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6년이 지난 현재까지 입법 공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공백 속에서 각기 다른 문제의식과 해법을 반영한 개정안들이 동시에 발의되었다.11)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법안이냐가 아니라, 임신중지를 둘러싼 논의가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느냐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금지와 규제, 처벌이 아니라 보장과 지원의 원칙이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임신 당사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정보에 기초한 판단과 더불어, 비용 부담 없이 안전한 환경에서 임신중지를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임신 주수나 임신중지 사유에 대한 논의 역시 처벌과 허용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태아와 임신 당사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의료적 가이드라인으로 다루어져야 하며, 임신중지 결정이 지연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지원과 보장 체계를 통해 접근되어야 한다. 사회경제적 조건이 취약하고 건강 정보 접근성이 낮으며 차별적 관계 속에 놓일수록, 초기 임신중지 결정은 현실적 장벽에 가로막히기 쉽고 그 결과 임신 후기에 이르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가족정책, 출산 지원, 입양 제도 역시 임신중지 논의와 분리된 사안이 아니라 재생산 권리 전반의 맥락에서 통합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12)
한편 재생산 건강을 위협하는 장벽은 형법적 처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세계보건기구는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 접근 제한, 제3자의 승인 요구, 제공자와 시설의 제한, 유산유도제 승인 제한, 사생활과 기밀유지 침해, 개인적 신념에 따른 진료 거부, 숙려기간 및 상담 의무, 건강 정보의 검열과 왜곡 등을 주요 장벽으로 지적하며, 정책 입안 시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가는 제도와 전문가 집단을 통해 정보를 독점하거나 차단하는 방식이 아니라, 포괄적 성교육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필요한 정보에 접근하고 이를 토대로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13) 특히 청소년, 장애인, 이주민, 난민 등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들이 충분한 정보를 얻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다.14)
인공 임신 중절 관련 정보
현재 한국에서는 임신중지를 해도 처벌받지는 않지만, 이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법과 제도는 마련되지 않았다. 따라서 약물을 통한 인공 임신중절15)이나 수술을 고려하는 경우, 관련 병원이나 여성·시민사회 단체를 통해 개별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다음은 인공 임신 중절을 고려하는 이들이 상담을 요청할 수 있는 기관 정보이다.16) 인공 임신중절에 관한 구체적인 절차나 비용, 방법 선택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경우 다음 기관에 연락하라. 당신의 임신 주수와 건강 상태, 의료 접근성 등을 고려해 적합한 선택지를 안내해 줄 것이다.
병원에 문의하고 싶다면 다음과 상담하라
국립중앙의료원, 색다른의원
혼자 양육을 하게 될 것 같다면 다음 기관과 상담하라
미혼모, 한부모, 청소년부모 지원 플랫폼 품, 변화된 미래를 만드는 미혼모협회 인트리,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이주민 혹은 난민이라면 다음 기관에 상담을 요청하라
다누리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 두레방, 난민인권센터, 한국이주인권센터, 한국이주민건강협회 희망의 친구들
장애인이라면 다음 기관에 상담을 요청하라
장애여성공감,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성소수자라면 다음 기관에 상담을 요청하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트랜스해방전선,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폭력을 경험했거나 위기 상황에 있는 경우, 다음 기관에 상담을 요청하라
해바라기 센터, 여성긴급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1) 김아영. 「무제한 낙태 허용 땐 생명 경시 풍조 확산될 것」. 『국민일보』, 2025.07.28.
2) 박애리. 「美 최대 낙태 기관 20곳 이상 폐쇄… ‘생명을 위한 승리’」. 『데일리굿뉴스』, 2025.07.31.
3) 뉴시스. 「검찰, ‘36주 낙태’ 산모·의사 살인 혐의 기소」. 『뉴시스』, 2025.07.23.
4) 장병철. 「“왜 상의 없이 낙태해” 전 여친 폭행에 ‘가족 죽이겠다’ 협박 20대 남성」. 『문화일보』, 2025.08.02.
5)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11일 형법상 ‘낙태죄’의 헌법불합치를 선고했다.
6) 흔히 레즈비언 ‘부치’라고 불린다.
7) 박다해. 「가톨릭 국가 아일랜드에서 ‘낙태죄 폐지’ 가능했던 5가지 이유」. 『한겨레』, 2022.08.28.
8) 임주리. 「프랑스, 세계 최초 헌법에 ‘낙태 자유’ 명문화…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 『중앙일보』, 2024.03.05.
9) 김지연·김동현. 「‘낙태권’ 다른 길 가는 미국과 유럽」. 『연합뉴스』, 2024.03.05.
10) 양성평등 아카이브. 낙태죄 폐지 운동 – 2019년 헌법불합치 결정까지[웹 페이지], 발행일 불명.
11) 22대 국회 들어 모자보건법 개정을 통해 입법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가 다시 일어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과 이수진 의원에 이어 국민의 힘 조배숙 의원, 그리고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까지 각각 개정안을 발의했다. 총 4건의 개정안이 국회에서 계류 중인 것이다. 남인순 의원과 이수진 의원이 내놓은 개정안은 인공임신중절 허용 한계 조항을 삭제하고, 약물 방식을 허용하고 건강보험 적용 논의까지 포괄하고 있다. 박주민 의원의 안은 절차적 위반 시 과태료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규정을 변경했다. 임신중지 문제를 형벌 중심 규제에서 보건의료 관리 체계로 전환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조배숙 의원의 안은 형법 개정안을 통해 임신 주수를 기준으로 임신중지를 단계적으로 형사처벌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12)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쉐어. [논평] ‘낙태의 죄’와 모자보건법의 역사는 끝났다. 이제 모두의 성과 재생산 권리가 보장되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해야 한다![공식 웹페이지], 2019.04.15.
13) 위의 글.
14) 앞의 글.
15) ‘미프진’이라고 불리는 유산유도제 미페프리스톤을 제공받을 수 있는 경로는 소수의 국제 비영리단체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중 하나가 Women Help Women이다. 위민헬프위민은 전 세계 여러 대륙에 걸쳐 임신중지 접근권 확대를 목표로 활동해 온 국제 비영리 페미니스트 단체로, 의료적 정보 제공과 온라인 상담을 통해 임신중지에 필요한 지원을 이어오고 있다.
16) 아래의 기관 관련 정보는 쉐어의 ‘임신의 유지·중지에 관한 지원 정보를 안내하는 반응형 웹페이지’를 참고하였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쉐어[공식 웹페이지], 발행일 불명.
참고문헌
김아영. 「무제한 낙태 허용 땐 생명 경시 풍조 확산될 것」. 『국민일보』, 2025.07.28.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53601883&code=23111111&cp=nv
김지연·김동현. 「‘낙태권’ 다른 길 가는 미국과 유럽」. 『연합뉴스』, 2024.03.05. https://www.yna.co.kr/view/AKR20240305001600085
뉴시스. 「검찰, ‘36주 낙태’ 산모·의사 살인 혐의 기소」. 『뉴시스』, 2025.07.23. https://www.newsis.com/view/NISX20250723_0003263520
박다해. 「가톨릭 국가 아일랜드에서 ‘낙태죄 폐지’ 가능했던 5가지 이유」. 『한겨레』, 2022.08.28.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846570.html
박애리. 「美 최대 낙태 기관 20곳 이상 폐쇄… ‘생명을 위한 승리’」. 『데일리굿뉴스』, 2025.07.31. https://www.goodnews1.com/news/articleView.html?idxno=450105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쉐어. [논평] ‘낙태의 죄’와 모자보건법의 역사는 끝났다. 이제 모두의 성과 재생산 권리가 보장되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해야 한다![공식 웹페이지], 2019.04.15.https://srhr.kr/statements/?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MTE7fQ%3D%3D&bmode=view&idx=6142645&t=board(2026년 2월 14일 접속).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쉐어[공식 웹페이지], 발행일 불명, https://www.byyourside-share.org/(2026년 1월 26일 접속).
양성평등 아카이브. 낙태죄 폐지 운동 – 2019년 헌법불합치 결정까지[웹 페이지], 발행일 불명, https://moa.seoulwomen.or.kr/exhibits/show/abortion/ex9-p3(2026년 2월 14일 접속)
임주리. 「프랑스, 세계 최초 헌법에 ‘낙태 자유’ 명문화…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 『중앙일보』, 2024.03.05.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3058
장병철. 「“왜 상의 없이 낙태해” 전 여친 폭행에 ‘가족 죽이겠다’ 협박 20대 남성」. 『문화일보』, 2025.08.02. https://www.munhwa.com/article/11523264?ref=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