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그 애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의 동창이자 좋은 친구였고, 성실한 직장 동료였다. 그는 말주변이 뛰어났다. 내 마음을 나보다 잘 알아채 필요한 말을 좋은 타이밍에 해주곤 했다. 그는 학업, 학생회, 자격증, 각종 대외활동까지 많은 일을 해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그런 그가 가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 때면, 얘도 참 피곤하긴 한가 보다 싶었다. 다재다능하고, 모난 구석 하나 없던 그 애는 어느 날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럽게. 그러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사고로 인해 밝혀진 그의 정체였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지능, 그게 그 애였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때 난 무슨 정신이었는지 초연히 일어나 내가 ‘그것’의 상주가 되어 주겠다 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던 이질적인 내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삼일장을 치렀고, 잿가루가 되어 납골당으로 옮겨졌다. 삼일 밤을 거의 새다시피 하며 묻고 싶었던 건 한 가지였다. 너도 네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
인간 사회에서 존재하는 동안 ‘그것’은 법의 규제와 보호를 받았고, 사람들로부터 암묵적·명시적으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시민이 그를 ‘사람’이라고 가리킬 때, 그동안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기계와 기술과 인간
2016년 이세돌 9단과 AI 알파고의 대결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사람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대국을 관전했다. 하지만 5번의 대결 중 인간의 승리는 단 한 번뿐이었다.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등장했다는 충격 속에 술렁이던 반응이 아직도 선명하다.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난 기계와 프로그램이 등장한 후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변화의 기점은 어디에나 존재했지만, 천지가 개벽할 만한 느낌은 없었다. 기술과 기계는 조용히 우리의 삶에 안착했다. 책을 뒤지며 찾던 영어 단어는 진작에 전자사전으로 대체되었고 이제는 통·번역 AI가 등장했다. Apple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시리(Siri)는 사용자의 부름에 언제든 응답한다. 시리를 이용해 편의에 따라 앱을 실행하거나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용자의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파악하지 못해 대화를 이어나가기는 쉽지 않다. 통·번역 AI 또한 인간이 직접 번역한 문장만큼 매끄럽지 않아 번역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다. 분명 인간처럼 자연스럽지는 않다. AI는 사용자와 능숙하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없으며 구어체와 문어체를 구별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어설픔을 위안 삼아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기가 아직 멀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기계는 인간 대신 일을 하고, 사회를 굴리고, 사람을 돕는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사라질수록, 지금의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인류에게 찾아왔다. 편리하고 신기한 기술에 주목하던 와중 생겨난 두려움이었다. 인간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창작이다. 글이나 그림처럼 ‘창작의 고통’이 따르는 일에서는 아직 로봇과 프로그램이 인간을 따라올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를 비웃듯 2021년 12월 카카오는 그림을 그리는 AI를 발표했다. 명령어를 입력하면 AI는 그에 맞는 새로운 창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런가 하면 2016년 일본의 한 문학 공모전에서 인공지능이 집필한 소설이 1차 심사를 통과했고, 2021년 한국에선 AI가 쓴 소설 『지금부터의 세계』가 공개되었다. 물론 해당 집필은 인간이 지정한 문장의 순서와 요소에 맞춰 AI가 단어를 골라 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카카오가 개발한 AI ‘민달리’도 작업 전, 1,400만 장의 텍스트와 이미지 세트를 학습했다. 비록 온전한 창작이 아닐지라도 이에 도전하는 AI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을 학습한 AI는 인간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능력의 집합체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이라는 것
그렇다면 ‘사람’이라는 건 무엇을 뜻할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다. 사람은 모두의 합의 속에 만들어진다. 김현경의 저서 『장소, 환대, 사람』에 따르면,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 즉, 사람이란 자연적 사실보다 사회적 인정의 영역에서 고려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사회에서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럼 AI는 어떨까. 앞선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사회적 인정 속에서 로봇도 사람으로 인정받을 여지가 생긴다. 로봇을 보고 모두가 사람이라고 합의할 수 있다면, 로봇에게 사람이라 칭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아직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아닌 개체를 사람으로 보는 건 어렵다.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에서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피조물’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가 언어를 배운 이유 역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언어는 상징적이고 체계적이다. 문화적 맥락과 사회적 약속 없이는 능숙하게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우리가 영어를 사용할 수는 있어도 그 문화권의 농담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 기인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문화를 사회 안에서 형성되는 규칙으로 보고, 문화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 다른 동물들과 인간을 구별 짓는 차이점이라고 주장했다. 동물 간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하더라도 질적 측면에 있어서 사람과 차이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규칙성과 의미 창조가 가능한 건 인간뿐이다.¹ 시리와 파파고가 인간과 구별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언어를 배운 로봇은, 사회적 기호와 문화적 맥락을 학습한 프로그램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까? 라캉은 언어를 배우고 파악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된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지금보다 더욱 정교하게 언어를 학습하고 말하는, 외관까지 완벽히 인간인 로봇이 등장한다면 사람이라는 단어는 재정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람으로 인정받는 새로운 존재가 생기면, 정의뿐 아니라 사람의 지위도 새로이 상정되어야 할 것이다.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인간은 다른 창조물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인간은 자유로운 사고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존재의 사다리²’에서 최고의 위치에 놓여 있다고 여겼다. 사다리의 각 단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존재했다. 인간에 부여된 특권적 지위는 인간과 다른 존재들 사이의 근본적인 불연속을 전제로 만들어졌다.³ 그러나 세상은 발전했고 많은 변화를 거쳤다. 여전히 인간은 지상 최고의 존재이자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생명체일까. 인간보다 효율이 좋은 기계가, 능력이 뛰어난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있다. 인간의 특권을 위한 불연속성은 구시대의 전유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인간이 증명해야 하는 건 기계보다 나은 능력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문제를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과학 기술과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정의하는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
앞으로의 우리
로봇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인간은 키오스크와 택배 로봇 등 기계를 보며 생경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쓸모를 증명해야 살 수 있는 시대에서 사람이 가진 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제 인간이 더 잘할 수 있는 건 욕망하는 것 정도인 듯하다. 무엇이든 대체될 수 있는 세상에서 생득적 권리를 주장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뻔뻔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이 뻔뻔함이 없으면 쓸모에 전복당한다.
모순적이나 로봇과 AI가 인간을 닮길 바라는 것도 인간이다. 변하지 않으며 능력이 뛰어난 무언가를 만든다면, 더 편리한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의 산물이다. 기계가 언젠가 우리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한 기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기계와 기술의 불확실한 위험성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걱정일 뿐이다. 이런 발전에 관한 입장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기술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인간이 어디까지 만들 수 있는지 탐구할 기회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기계나 프로그램은 감정적 사고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AI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감정의 진정성은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기계의 뛰어난 판단 및 계산력을 활용해 인간과 협업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학회지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며 인간이 만든 결과물인 기술, 자본, 정책 등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기계 배치라고 밝혔다. 중요한 건 로봇의 주체화 여부가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새로운 배치를 위한 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관한 고찰이다.⁴
그러나 모든 일이 언제나 우리의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기술이 가진 편리함과 예측 불가능 속에서 다양한 의문을 제기하는 건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1차 기계 혁명⁵ 이후 이에 맞는 사회적 제도가 만들어지기까지 족히 100년쯤 걸렸다. 이 변화가 사회를 혼란으로 빠트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18세기, 19세기 기계 발전 속도가 사회적 혁신 속도보다 느렸기 때문이다. 2차 기계 혁명 또한 앞으로 20년에서 50년은 더 걸릴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제도가 정립되는 와중에 기술이 사회를 앞지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당장 결론에 도달할 수 없어도 우리를 덮쳐 올 변화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란다. 낯설고 어려워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 과정엔 기계가 인류를 지배한다는 상상이나 기계가 모든 노동을 대신해 안락한 삶을 누리는 상상이 함께할 수도 있다. 어쩌면 다양하고 이상한 모든 가능성 너머에 우리의 결론이 있지 않을까. 사람을 넘어서는 존재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예견치 못한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¹ 동물 또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다만 인간처럼 정교한 문법 체계를 가지고 있거나 자의성·창조성·분절성 등 인간 언어의 고유한 특징의 존재 여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² 무생물인 돌부터 식물, 동물, 사람, 천사, 최종적으로 신이 온다는 생물관. 이는 로마제국시대, 중세, 르네상스를 거 쳐 19세기 초까지 서구 사회를 지배했다. 인간이 지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가장 우월하다는 가치관의 토대. 다른 말로는 ‘존재의 대 사슬’이라고도 불린다.
³ 오영주, 「『미래의 이브』, 인간과 기계의 흔들리는 경계 - 포스트휴먼 담론의 역사성에 대한 하나의 고찰」, 불어불문 학연구, 109, 2017, 83-105
⁴ 백욱인, 「인공지능 시대의 기계들과 인간들」, 『문화과학』, 105, 2021, 27-52
⁵ KAIST 김대식 교수의 「인간과 기계의 경주」에 나온 단어로 증기기관을 통해 일어났던 1차 산업 혁명과 전기의 발 명을 통해 일어났던 2차 산업 혁명까지를 지칭한다. 이 두 혁명을 통해 물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참고문헌
김대식, 「인간과 기계의 경주」, 『철학과 현실』, 2019
김종규, 「사람중심’ 4차 산업혁명의 문화적 조건」, 『인문과학』, 75, 2019
김진웅 「[우리말과 한국문학] 꿀벌의 언어와 인간예외주의」, 『전남일보』, 2019.12.19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메리 셸리, 김선형, 『프랑켄슈타인』, 문학동네, 2021
백욱인, 「인공지능 시대의 기계들과 인간들」, 『문화과학』, 105, 2021
오영주, 「『미래의 이브』, 인간과 기계의 흔들리는 경계 - 포스트휴먼 담론의 역사성에 대한 하나의 고찰」, 『불어불문학연구』, 109, 2017
윤혜섭·장수철, 「일반생물학 수업을 위한 『종의 기원』 탄생에 대한 연구-다학제적 역량 배양을 위한 생물학 수업 모색」, 『교양교육연구』, 14(2), 2020
이동성, 「라캉의 구조주의 욕망이론」, 『동서언론』, 9, 2005
이승우, 「AI가 쓴 국내 첫 장편소설 '지금부터의 세계'」, 『연합뉴스』, 2021.08.20
이연희,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 문제 고찰 -C. Taylor의 시각에서-」, 『윤리연구』, 1(128), 2020
이정헌, 「단편 소설 창작에 도전한 일본 인공지능…문학상 1차 통과」, 『중앙일보』, 2016.03.22
임솔, 「카카오, 초거대 AI ‘민달리’ 공개…글 쓰고 그림도 그려」, 『시사포커스』, 202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