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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란 새로운 인연과 사라지는 인연의 연속임을 깨달은 날은 아주 지독한 하루가 된다.
1장. 구질구질씨 이야기
어릴 적부터 그랬다. 여행 가서 만난 친구, 놀이터에서 하루 놀고 말 친구, 학원 끊으면 못 볼 친구. 한 번 맺은 인연과 멀어지는 걸 극도로 슬퍼했다. 다음날이면 녹아내릴 눈사람을 붙잡고 울 만큼 지나가는 인연을 쉽게 놓지 못하는 건 넘치는 잔정 탓이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떠나는 거 잡는 거 아니라고. 나는 고민했다. 그게 된다고?
개중에는 일방적으로 그리워하는 인연도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너’는 현재를 살아가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구나, 체감한다. 가끔은 지금의 내가 잘 살아내고 있지 못해서 과거에 연연하나 자책도 한다. 흘러가는 인연을 보고만 있자니 불가항력에 사무치는 기분이다. 수많은 ‘너’와의 이별에 서툰 모습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이 글을 세상 모든 구질구질씨와 질척질척씨에게 바친다.
2장. 추억에 애끓으며
나라고 이런 질척거림을 즐기는 건 아니다. 멋지게 이별하는 법을 찾기 전에 나는 왜 ‘너’를 놓지 못하는지 생각해본다. 실낱같은 인연도 쉽사리 넘기지 못하는 것은 소중한 추억을 과거로만 남겨두지 못하는 미련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너’를 만난다. 부모 형제부터 소꿉친구, 사제 간, 연인 사이, 직장동료, 가끔은 일회성 만남까지. 훗날 이 사람들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2015)에 나오는 기억의 구슬처럼 내 추억의 일부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한 손으로는 손뼉을 칠 수 없듯 지금의 ‘나’는 그들과 내가 함께 만든 결실임을 알고 있다. 이것이 내가 스치는 인연에도 애정을 주었던 이유다.
좀 더 솔직해져 보자. 어쩌면 내 안에 있는 구질구질씨의 본심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김춘수의 「꽃」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시구가 등장한다. 사람과 사람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사건이 필요하다. 그 사건은 그들만의 사연, 보통의 특별함, 그로 인해 서로를 인지하고 있음을 주고받는 과정으로 탄생한다. 우리는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를 인식하고 그 속에서 나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한다. 그러니 ‘나’라는 존재가 ‘너’에게 잊혀질까 걱정하는 것은 소외를 경계하는 사회적 동물에게 당연한 일이다. 영화 <코코>(2018)에서 망자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때 진정한 죽음, 영원한 소멸을 맞이한다. 사실 타인에게 인식되고자 하는 욕구는 꼭 망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흐려진다 해서 그 시절의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망각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두려운 건 어쩔 수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을 보고 눈물이 나는 건, 더는 나에게서 기억되지 않는 그 어느 ‘네’가 떠올랐기 때문이리라.¹ 이처럼 인연을 놓지 못하는 데에는 관계와 기억을 통해 소외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나를 확인받고자 하는 심리가 포함된다. 적어도 나의 구질구질씨는 그렇다.
관계의 아쉬움은 애정과 두려움에 기인한다.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람에 대하여 어차피 떠나갈 인연이었다고 다독여도 본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인간상이 너무 많다. 가령 그 옛날 인연들을 여전히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 질척질척씨가 이렇게 외친다. 넌 왜 저 사람처럼 인연을 이어가질 못했냐. 왜 놓아 버렸냐. 끊어진 인연은 실패한 인연으로 취급되고, 이는 인간관계를 가꾸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책망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책장을 잡고 있는 당신의 손을 펼쳐보라. 저마다 크기가 제각각이다. 아마 손에 쥘 수 있는 모래의 양도 다를 것이다. 마음도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을까?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인연의 그릇이 다른 건 손 크기가 다른 것처럼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인연이 강박감이 되어 돌아오고 불필요한 소모전이 계속된다면 그건 놓아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는 숱한 미련과 비교 끝에야 등장했다.
3장. 어떻게 남길 것인가
불안의 출처를 알았으니 ‘너’를 보내주는 방법이 궁금해진다. 헤어지는 그 순간에 정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람을 좋아하는 구질구질씨에게 그런 강단까지 기대하진 말길 바란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우리만의 방식으로 느린 인사를 준비해본다.
당신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책임해 보일지라도 인간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시간은 꽤 효과 좋은 약이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그간 달려온 관계들에 제동이 걸렸다. 조급함도 잠깐이다. 제삼자라도 된 양 한 걸음 떨어져서 나를 둘러싼 인연들을 훑어본다. 시간은 그리움이라는 감성에 빠지게도 하지만 관계의 재정립이라는 이성을 되찾게도 한다. 갖가지 인연들은 떨어져 있을 때 비로소 베일을 벗는다. 시간이 흘러 당시의 상황에서 빠져나온 나는 ‘너’와의 인연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가끔은 억지로 붙잡고 있었구나,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고 과거의 인연이 흑역사였다며 자책할 필요는 없다. 관계의 재정의는 인연을 정리하는 과정일 뿐이다. ‘완벽한’ 인연만을 바라는 우리에게는 ‘그땐 그랬지’라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도,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는 것도 아니다. 그때도 맞았고 지금도 맞다.² ‘너’를 보내는 시간이 자책과 후회로 물들지 않길 바라며 ‘하쿠나마타타’처럼³ 주문을 외워보자. 그땐 그랬지.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불교 용어가 있다. 인연을 비롯한 모든 사물에는 오가는 때가 있다는 뜻이다. 애쓰지 않아도 만날 사람은 만나고, 아무리 애를 써도 무르익지 않은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 고로 헤어짐 역시 어느 가사의 말마따나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인 거다. 혹자는 운명론 특유의 무력함을 느낄지 모르겠으나 뭐가 됐든 때가 있다는 건 묘한 안정감을 준다. 그 ‘때’라는 것은 인연의 종료를 알리기도 하고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는 예고를 날리기도 한다. 다양한 모습을 한 ‘너’는 그 결과마저도 이토록 다양하다. 꽉 막힌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나에게 ‘너’는 열린 결말로 남은 유일한 이야기다.
4장. 가끔은 영원한 이별도 있다.
국·영·수·사·과 어디에서도 ‘상대방이 준 명함은 바로 지갑에 넣지 말고 테이블 위에 올려둬라’ 따위의 사회생활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학 교양 과목에 있을 리도 만무하다. 그저 어른들 어깨너머로 눈치껏, 즉석에서 다급히 배울 수밖에. 그러나 예의란 게, 특히 인사란 게 처음부터 아쉬움 없이 주고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성인이 되니 주변 사람들의 행복과 슬픔에 공식적으로 함께 하는 날이 점점 많아진다. 그중에서도 조문 예절은 알아두면 분명 도움이 된다. 잘 가, 하고 손 흔들며 직접 인사할 수 없기에 나는 늦었지만 ‘너’를 제대로 보내는 방법을 익히려 한다.
-조문 순서
조객록 서명 > 분향 혹은 헌화 > 재배 혹은 묵념 > 조문 > 조의금 전달
-복장
검은색, 진한 회색 등 어두운색의 상·하의가 기본이다. 화려한 디자인의 옷이나 장신구는 피하자. 필자는 무난한 사계절용 검은 바지와 겉옷을 미리 사두는 것을 추천한다. 슬픔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분향, 헌화
오른손으로 향/꽃줄기 하단을 잡고 왼손으로 이를 받친다. 막대 향은 하나만 집어도 충분하나, 여러 개를 집을 경우 하나씩 꽂도록 한다. 향을 끌 때는 손가락으로 집어 끄거나 왼손으로 살짝 흔들어 끈다. 헌화의 경우 보통 꽃봉오리가 신위를 향하게 놓는다.
-재배
재배(再拜), 말 그대로 두 번 절한다. 종교에 따라 기도나 묵념을 해도 괜찮다. 다만 상가의 가풍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문
상주와 맞절을 하고 짧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문상이 끝나면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난 뒤 몸을 돌려 나온다.
-장례식장에서 밥을 꼭 먹어야 할까?
장례식장에서의 식사는 조문객의 성의로 비치기도 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잠깐 앉아 음료만 마시고 가도 좋다
-조의금 홀? 짝?
음양오행론에서 그림자를 뜻하는 음(陰)은 짝수, 볕을 뜻하는 양(陽)은 홀수를 상징한다. 즉 부조금을 홀수 단위로 맞추는 것은 상대방의 경조사에 길하고 긍정적인 기운이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10만 원 역시 3만 원과 7만 원을 합한 금액이다.
5장. 안녕과 안녕
우리는 왜 멋지게 인사해야 하는가? 그것은 ‘너’를 보내는 인사이기도 하지만 나를 지키는 데 필요한 인사이기도 하다. 나의 일부를 비우고 새롭게 채우기 위한 준비인 셈이다. 안녕(Hi)을 위한 안녕(Bye)에 언제쯤 익숙해질는지 모르겠다. 남들보다 결정이 더뎌 앞으로도 한껏 아쉬워하고 나서야 그 인연이 거기까지였음을 인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도 끝내 걸러지지 않아 여과장치에 남은 미련들을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갈 것이다. 구질구질씨와 질척질척씨의 숙명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여럿의 ‘너’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있는 힘껏 상처받지 않으려 한다.
¹ 빙봉은 영화 주인공의 어린 시절 상상의 친구다. 주인공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잊혀진다.
² 지독한 악연은 배제한 문장이다.
³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는 영화 (1994)에 나오는 노래 가사로, 근심 걱정을 모두 떨쳐버리라 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참고문헌
강다솜, 「알쏭달쏭, 사회초년생을 위한 장례 예절」, 『한국연예스포츠신문』, 2020.12.10
국립중앙의료원, 「종교별 문상예절」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노블레스상조, 「조문순서」
보람상조, 「조문예절」
손승희, 「부조금, 왜 홀수로 내야하나」, 『팁팁뉴스』, 2016.10.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절인연(時節因緣)」